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5 2012년 11월 13일
작성자 김기석

2.1 우정에 바탕을 둔 세상의 꿈은 지속될 수 있는가?

창세기는 에너지로 가득 찬 신적 언어를 통해 창조된 세상과 날들을 열거하면서 마치 추임새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여섯 째 날의 창조에는 '좋았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된다. 집짐승과 들짐승을 종류대로 만드셨을 때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고 그들의 삶의 영역과 해야 할 일을 지정해주신 후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신 다음이다. 이때는 좋음을 강조하여 '보시기에 참 좋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조화롭고 평온하고 흐뭇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이 등장했다. "남자가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2:18). '혼자 있음'이 문제다. 하나님은 그를 돕는 사람,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신다. 창세기의 이야기꾼은 인간의 인간됨은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인간人間이라는 단어 속에는 이미 '관계'를 가리키는 '사이 간間'이 들어 있다.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두 주제어를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일 것이다. 나의 나됨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 관계를 소홀히 하고는 인간답게 산다고 말할 수 없다. 시인 김광규는 <나>라는 시에서 이런 사실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살펴보면 나는/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나의 형의 동생이고/나의 동생의 형이고/나의 아내의 남편이고/나의 누이의 오빠이고". 이 명단은 조카, 제자, 선생님, 납세자, 예비군, 친구, 적, 환자, 손님, 주인, 가장으로까지 확장된다. 세심하게 톺아본다면 이 명단은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존재가 수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망 속에 얽혀 있음을 살핀 후 나는 "오직 한 뿐인/나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탄식하듯 묻는다. "과연/아무도 모르고 있는/나는/무엇인가/그리고/지금 여기 있는/나는/누구인가". 묻는다고는 했지만 물음표조차 없기에 굳이 답을 들으려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누구도 그 삶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주체이지만, 그의 주체는 관계 속에서 형성될 수 밖에 없다.

독불장군은 없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비스듬히 기댄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시인 정현종은 <비스듬히>라는 시에서 '생명이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 그리고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라고 시를 맺는다. 누군가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 주는 것, 설 땅이 되어주는 것이야말로 사람다운 삶의 길이 아닐까. 하지만 에덴 이후의 세상은 이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에덴 이후에 태어난 첫 사람 가인은 형제 살해자가 되었고, 누군가 자기를 해칠까 두려웠던 가인은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 땅의 이름을 성경은 '놋'이라 한다. '놋'은 '유리하다', '방황하다'는 뜻이다. 에덴 이후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이다. 이웃은 행복의 조건을 놓고 겨루는 경쟁자이거나 잠재적인 적이다. 그러니 삶은 늘 외롭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안식 없음과 고향 상실이야말로 인간의 보편적 운명이 되고 말았다. 기쁨과 슬픔을 허심탄회하게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처럼 쓸쓸한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기원전 1세기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는 우정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친구 간의 상호 선의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는 삶이 어떻게, 엔니우스의 말처럼, 살 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자네가 마치 자네 자신과 말하듯 무엇이든 마음껏 더불어 말할 수 있는 누군가를 갖는다는 것만큼 감미로운 일이 또 있겠는가? 자네가 번영을 누릴 때 자네 못지않게 그것을 기뻐해줄 누군가가 없다면 어떻게 그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겠는가? 자네 자신보다도 더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다면 불운은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된다네."(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숲, p. 117-118)

예수가 선포하고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는 죽음 이후의 맛볼 지복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경험하는 또는 경험해야 할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은유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삶의 충만함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삶을 짓누르는 일체의 억압에 대한 저항이다. 죄와 가난, 억압과 착취, 질병과 소외…. 예수는 에덴 이후 시대를 특징짓는 이런 요소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예수는 자신의 비유를 통해 그것이 극복된 세상을 그림 언어로 들려줬다. 그 세계의 핵심을 우정이라 말하면 어떨까?

예수가 살던 사회적 세계는 로마의 학정으로 인해 민초들의 삶이 거덜난 세계였다. 토라가 가르치는 아름다운 상호부조의 전통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일상이 되었다. 삶은 고단했고, 성정은 거칠어졌다. '정의는 강자의 편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말이 통용되는 세상에서 전통적인 종교조차 사람들에게 위안이나 희망이 아니라 질곡이 되어버렸다. 그런 세상에서 예수는 전혀 다른 삶을 꿈꾸었다. 다른 세상을 꿈꾼다는 것, 기존체제의 입장에서 그것처럼 불온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멸시를 운명처럼 여기고 사는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의 꿈을 심어주는 사람이야말로 혁명가가 아니던가. 예수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운 혁명가였다. 예수는 신분질서에 따른 지배와 복종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일깨웠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마23:8-12)

'선생', '아버지', '지도자'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우리 삶에 대한 결정권을 요구하는 일체의 권위를 상징하는 이들이다. 예수는 스스로를 '높임'이나 '지배'가 아니라 '자기 낮춤'과 '섬김'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의 주춧돌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우정의 전제조건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 자체이지, 그가 속한 인종이나 종교가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그런 사실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묻는 율법학자에게 예수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하고 되묻는다. 전문가답게 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핵심을 정확히 언급한다. 예수는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하고 대답한다.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었다. 그 길을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도 못 본 척했다. 하지만 한 사마리아 사람은 차마 그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치료해주고, 자기 나귀에 태워 그를 안전한 장소까지 데려갔다. 그는 길을 떠나며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꺼내 주면서 그 사람을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한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는 확언과 함께(눅10:25-37).

사마리아 사람은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강도만난 사람을 돕지 않았다. 사회적 명성에 대한 관심, 혹은 보상에 대한 관심은 애당초 없었다. 차마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마음이야말로 조각난 세상을 하나로 묶는 연대의 끈이 아니겠는가? 그가 낯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이의 아픔과 두려움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야말로 영생에 속한 사람이 아닐까? 예수는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을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질문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칼릴 지브란은 <우정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대들의 친구란, 그대들의 궁핍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이다.

사랑으로 씨를 뿌려 감사로 수확하는 그대들의 들.

또한 그대들의 식탁이며 아늑한 집이다.

그대들은 굶주린 채 그에게로 와서 평화를 찾는다."

누군가의 궁핍을 충족시켜줌으로 감사의 마음을 확대하는 것, 누군가의 아늑한 품이 되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예수가 평생 마음에 그린 세상이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 나라, 곧 우정의 나라에 속한 마음이라 할 것이다. 예수 운동의 가장 큰 특색 가운데 하나는 밥상 공동체이다. 그의 식탁에서 배제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예수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의 집에도 거리낌 없이 들어갔고, 죄인으로 규정된 이의 헌신도 즐겁게 받았다. 그렇기에 그것은 어머니가 차려주시던 두레 밥상을 닮았다. 누군가와 음식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그를 벗으로 혹은 식구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우정에 바탕을 둔 세상에 대한 소박하지만 견결한 꿈은 아직도 스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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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01-16 09:01)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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