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4 2012년 11월 03일
작성자 김기석

1.4 어떻게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가?

예수도 절망감에 사로잡힌 때가 있었을까? 보수적인 신자들에게는 대단히 무례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절망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몸을 가지고 살았던 인간 예수가 절망의 심연과 대면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 사람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방황한다는 것은 길을 모색한다는 말이고, 길은 언제나 낯선 곳을 향해 열려 있기에 선택 앞에서 우리는 늘 두려움과 설렘을 맛보곤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말했지만, 절망과의 정직한 대면을 통하지 않고는 신 앞에 설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 아니던가.

16세기의 영성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 1542-1592)은 인간이 경험하는 실존적 파탄의 경험을 일러 '어둔 밤의 체험'이라 말했다. 어둠과 무미건조함, 인식의 파탄, 의미 없음, 버림받음 혹은 잊혀짐의 현실이 자아내는 당혹감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곤 한다. 지금까지 딛고 있던 인식과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림을 경험할 때, 슬그머니 절망감 혹은 자기 멸절의 유혹이 찾아든다. 하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신의 현존으로 우리를 이끄는 임계상황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닿으려면 알고 싶어하기보다 차라리 알지 못하면서 가야 하고, 하느님의 빛에 바짝 다가서려면 눈을 뜨기보다 차라리 눈을 감고 어둠 속에 있으면서 나아가야 한다"(십자가의 성 요한 지음, <<가르멜의 산길>>, 성바오로출판사, p. 137)고 말했다. 절망이 없다면 희망도 없다.

다시 묻는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잃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절망과 무관한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에덴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 시간 속에서 자기 암중모색하며 삶을 기획해야 하는 사람은 절망의 맨 얼굴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히브리서는 예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2:18)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5:7-8)

눈물과 기도와 탄식, 그리고 고난이야말로 예수라는 존재를 탄생시킨 모태였다. 육체를 지닌 존재의 취약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는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절망이라는 실존의 조건에서 면제된 존재가 아니었다.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소명의식을 품고 살기는 했지만 부조리한 현실은 그의 확신을 뒤흔들어 놓을 때가 많았을 것이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 곧 '오클로스'라고 지칭되던 이들은 전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몸을 눕히곤 하는 게 오클로스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악한 자들에 의해 쉽게 이용당할 수 있는 즉자적 민중일 때가 많았다. 아무리 애써도 가난을 벗을 길 없고, 고통을 없앨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선비'나 '군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 아니겠는가. 더욱이 그들에게 유대교는 삶의 든든한 토대라기보다는 질곡으로 작용하곤 했다. 예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가리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그들의 행실을 이렇게 비판한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23:4)

중간계층의 이익을 대변했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수백 개에 이르는 세부 조항을 가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고, 특히 안식일법, 정결법, 십일조법을 강조했다. 사람들이 꺼리는 일을 하고,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종교는 위안이나 해방이 아니라 질곡일 뿐이었다. 예수가 말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마11:28)은 바로 그런 이들이었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사람을 해방의 길로 인도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사람들을 예속의 길로 몰아넣는 현실에 대해 예수가 어찌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절망의 어둠 속에 머물 수 없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무리들, 종교를 자기 강화와 이익의 수단으로 변질시킨 유대교의 현실은 절망스러웠지만, 그런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기에는 예수의 분노와 사랑이 너무 컸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가슴에 드리우는 절망의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을까? 우선 떠오르는 것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기도에 대해 상론할 수 없기에 범박하게 말한다. 기도를 통해 상황이 바뀌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도는 기도자 자신을 변화시킨다. 기도는 사물이나 사태에 붙박인 우리의 시선을 멀어지게 한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면 우리를 그토록 사로잡고 있던 문제의 크기가 달리 경험되듯이 기도는 하늘의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이끈다.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는 순간 현실의 지형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예수는 새벽마다 한적한 곳을 찾아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엎드림을 통해 그는 현실을 넘어설 수 있었다. 깊이를 뒤집으면 높이가 되지 않던가? 절망이 깊어갈수록 희망은 더욱 찬란하다.

예수가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대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쉽게 절망에 빠질 수 없는 법이다. 예수는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 자포자기적인 심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깊이 공감했다. 사랑의 마음이야말로 절망의 감염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묘약이 아니던가.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영화 가운데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 있다. 영화는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마을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쿠르드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아윱은 소년 가장이다. 어머니는 막내를 낳다 죽고 아버지는 밀수길에 지뢰를 밟아 죽었다. 그의 형 마디는 열다섯 살이지만 정신과 육체가 세 살 아기 상태에 머물고 있는 장애인이다. 마디는 때마다 주사를 맞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아윱은 형의 생명을 연장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어른들을 따라 위험한 밀수길에 나서는 것은 그 때문이다. 국경지대의 겨울 추위는 혹독해서 짐을 싣고 다니는 말들도 술에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다. 영화는 그렇게 참혹한 상황을 보여주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 구석 따뜻함이 배어드는 것은 마디를 돌보기 위해 어린 가족들이 보여주는 훈훈한 사랑 떼문이다. 존재 그 자체가 거치장스러운 마디이지만 아윱과 여동생 아마네는 오빠에게 끝엇이 입을 맞추고 말을 건넨다. 아마네는 오빠를 안고 다니며 시간에 맞춰 약을 먹이기도 한다. 고통스러워하는 마디를 안고 부모의 무덤에 가서 비석을 붙잡고 신께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큰 누나 로진은 동생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나이 많은 남자에게 기꺼이 팔려간다. 그 영화는 절망의 광경을 보여주지만 희망을 증언하고 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절망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가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다른 까닭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먹구름이 온 하늘을 가리고 있어도 그 너머에 푸른 하늘이 있고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흐린 날에 낙심하지 않는다. 투사된 광선이 구름을 뚫고 산란되는(틴들현상tyndall effect) 광경을 볼 때마다 일종의 장엄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예수는 땅의 현실에 마음을 두고 살았지만 그의 시선은 늘 현실이라는 구름 너머의 세계에 두고 있었다. 내가 넘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는 절망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드러나지 않게 품이 되어주었던 이들이 있었다. 자기들이 재산으로 예수 일행을 섬겼던 여인들(눅8:3)이 있었고, 언제든 그를 맞아주곤 했던 베다니의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집이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마음이 절망으로 기우는 것을 막아주는 희망의 매개였다. 말없이 나를 맞아주고, 품이 되어 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든든한가. 예수도 위안이 필요한 존재였다. 그들의 우정과 사랑이 있었기에 예수는 절망을 넘어 희망을 기획할 수 있었다.

희망보다는 절망의 조짐이 더 많은 세상이다. 세상이 빨라졌다. 인성조차 거칠고 조급해졌다. 사람들은 욕망이 즉각적으로 충족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현대문화는 기다림의 요소를 제거하는 문화이다. 패스트푸드와 고속도로와 광통신망이 이루는 세상은 절망을 향해 난 대로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희망을 말하는 것조차 사치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절망의 어둠이 깊을수록 희망의 빛도 밝아진다. 절망과 맞섰던 예수의 길이 우리에게도 희망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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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01-13 06:01)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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