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3 2012년 11월 03일
작성자 김기석

1.3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처럼 모호한 말이 또 있을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어떠한 진술도 경험적으로나 객관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말은 오용 가능성이 크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고 기도하라 했지만 문제는 그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이다. 몇 해 전 서남아시아에 쓰나미가 몰려와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을 때 어느 목사는 그 사태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했다. 그에게 세상은 단순하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 2005년 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으로 말미암아 뉴올리온스가 초토화되었을 때도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재난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 도시에 동성애자들이 많기 때문에 신의 심판이 임했다는 것이다. 그에게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은 없다. 그는 자신을 신의 위치에 올려놓고 있다. 이런 상황인식은 인식의 오류에 그치지 않고 강자들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한다. 그런 이들은 지금 고통 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일자리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저마다 그럴만한 숨겨진 죄가 있다고 판단한다. 이런 생각은 대단히 폭력적이다. 종교적 권위를 빙자하여 사람들의 상처를 덧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 두려움을 주입하여 더욱 더 의존적이 되도록 한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들의 경험과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상황이 제시한 물음에 답하여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제기된다. 예기치 않았던 재앙으로 말미암아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저 허허로운 허공에 눈길을 건넨다. 인식의 한계에 부딪칠 때면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한다. '오,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하지만 옛 사람은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 모든 것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대한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노자 5장)고 말했다. 이 말은 자연의 냉혹함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친소관계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자연의 이치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창조주로, 역사의 섭리자로 믿는 이들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유한함과 뿌리깊은 죄성이 빚어내는 고통에 직면할 때마다, 그리고 아주 중대한 선택의 고비에 설 때마다 믿는 이들은 '하나님은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누구도 분명하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없기에 사람들은 종교적 권위자의 판단에 의지하거나, 자의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문제는 거짓 예언자들, 미혹된 지도자들이다.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예언자들은 내가 보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달려나갔으며, 내가 그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예언을 하였다."(렘23:21)

"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예언자들이 있다. '내가 꿈에 보았다! 내가 꿈에 계시를 받았다!' 하고 주장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 이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거짓으로 예언을 하겠으며, 언제까지 자기들의 마음 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 예언을 하겠느냐?"(렘23:25-26)

문제는 거짓 예언자들이 말이 귀에 달다는 데 있다. 예레미야 28장에는 두 사람의 예언자, 곧 하나냐와 예레미야가 등장한다. 그들은 동일한 상황 가운데서 정반대의 길을 가리킨다. 하나냐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드기야 왕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 버리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지은 죄로 인해 바빌로니아 왕을 섬길 수 밖에 없다고 예언한다. 누구의 말이 참인가? 하나님의 뜻을 식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탄식시의 저자들은 난폭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지쳐 침묵을 깨뜨리고 역사에 개입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한다.

"하나님, 묵묵히 계시지 마십시오. 하나님, 침묵을 지키지 마십시오. 조용히 계시지 마십시오. 오, 하나님! 주님의 원수들이 소리 높여 떠들고,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치켜들기 때문입니다."(시83:1-2)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무력함 혹은 부존재에 대한 증명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찌의 수용소에서 살아난 엘리 비젤은 <신에 대한 소송>이라는 책에서 그런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침묵하고 있는 신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신학이 가능한가를 묻는 신학자도 있다. 하나님의 침묵은 언제 깨지는가?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악한 이들에게 이용당할 때가 많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벌어졌던 수많은 종교 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십자군 전쟁이 대표적이다. 때로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을 동원하곤 한다. '성전聖戰'을 명분으로 하여 사지로 내몰린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정녕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의 뜻은 알 수 없는 것인가? 아브람은 '살고 있는 땅, 난 곳,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명령과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야훼의 명령에 순종했다. 아브람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어떻게 확신했을까?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오류 가능성이야말로 인간의 한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고 결단하고 행동함으로써 자기 삶을 구성해나간다.

설사 그렇다 해도 오류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예수는 아마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성경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뜻을 식별하는 기준은 성경의 가르침일 수밖에 없다. 예수에게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은 모어(母語)나 마찬가지였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약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민을 보이시는 분이었다. 애굽과 바로로 상징되는 억압의 질서를 전복시키시는 하나님, 사회 계층의 맨 밑바닥에서 숨죽이고 살고 있는 이들의 살맛을 되찾아 주는 하나님, 바로 그분이 예수의 하나님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품부된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천명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6:39)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b)

장엄한 고백이다.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끌어 주신 존재로 대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자기를 바친다. 예수의 첫 번째 이적은 갈릴리 혼인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이다. 포도주가 떨어져 잔치의 흥이 떨어진 그 집에 흥을 돌려주었다. 예수의 병자 치유나 귀신 축출 사건, 그리고 소외된 이들에 대해 보이는 깊은 애정은 모두 일그러진 생명의 온전한 회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예수는 사람들의 생명을 얽어매는 온갖 불의에 대해 분노했다. 사람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로마의 정치․경제 질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분하에 사람들을 지배하던 가시나무 같은 종교 지도자들과 성전체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이었다. 예수는 그런 질서와 체제에 온몸으로 부딪쳐나갔다. 그 결과가 바로 십자가이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사실은 가장 무지한 이들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예수의 눈으로 우리는 현실과 역사를 보아야 한다. 그것이 '생명을 온전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가깝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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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01-13 06:01)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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