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12 2012년 10월 18일
작성자 김기석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9:1-2)

성전에서 돌팔매질을 당할 뻔했던 예수님과 ‘날 때부터 눈먼 사람’, 동병상련이었을까? 기존 질서에 의해 배제의 대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일쑤 타자에 대한 배제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런 세상일수록 그늘이 짙다. 사람들의 천대와 무시에 익숙해진 그 눈먼 사람을 바라보는 예수의 시선이 애잔했을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예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오히려 이 사람이 앞을 못 보는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는다. 아주 단정적이다. 그들은 한 사람이 처해 있는 현실이 그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러한가? 이것은 정말 무서운 말이다. 카르마(業)가 오늘의 현실을 결정한다는 말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데 참으로 편리한 도구이지만, 타자에 대한 폭력이 될 때가 많다. 이런 생각은 강자의 이익에 복무할 때가 많다. 오늘 가난하고, 병들고, 내몰린 사람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암암리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뒤집으면 지금 부유하고 건강한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정말 그러한가?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은 채 놔두는 겸손이 필요하다. 욥의 세 친구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다가 책망을 받았다. 예수의 제자들조차 그릇된 전제와 선입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눈먼 사람과 대화를 시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제자들은 그의 내밀한 아픔과 상처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를 애잔한 눈길로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한다. 이래저래 예수님은 외롭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9:3-5)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릇된 전제를 단칼에 무질러 버린다. 이런 경우 말은 단순할수록 좋다.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이 말이 참 어렵다. 드러내놓고 말하긴 어렵지만 복잡한 생각이 머리에 스친다. 아니, 이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그가 겪는 불행의 숨겨진 뿌리가 하나님이었단 말인가? 그는 다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선택된 교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왠지 불쾌하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판단할 것 없다.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은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은 존재 자체로 독특하다. 그렇다면 예수의 말은? 그가 앞을 보지 못하는 까닭을 신학적으로 탐구하기 이전에, 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그의 삶이 온전히 회복되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뜻이 아닐까? 죄와 병의 상관관계를 논하는 신학적 이론은 그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었다. 신학적 논의에서 개별자의 고통은 추상화되고 만다. 하지만 애잔하게 바라보는 예수의 시선 속에서 눈먼 사람은 소중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의 연약함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다.

우리가 낮 동안에 해야 할 일은 생명을 온전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일이다. 예수는 이 일을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다. 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온다. 예수라는 빛이 우리 발 앞을 비추는 바로 그 때 생명의 회복자가 되어 사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9:6-7)

말씀만으로도 병자들을 치유하시던 예수님이 왜 이런 복잡한 과정을 택하셨을까?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신다. 참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친절한 배려가 아닐까? 예수님은 친밀한 접촉을 통해 그의 마음속에 신뢰를 창조하셨던 것이다. 칼릴 지브란은 <첫 키스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첫 키스를 가리켜 '생명의 나뭇가지 끝에 핀 첫 꽃망울'이라 했다. 첫 키스는 아니라 해도 예수의 부드러운 손길은 눈먼 사람에게 어떤 말보다 많은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몸에 손을 댔을 때 어떤 연민과 사랑의 기운이 그의 속에 유입되었다. 예수님이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 하셨을 때, 그는 주저 없이 실로암으로 가서 눈을 씻었고, 눈이 밝아져 돌아왔다.

눈이 밝아져 돌아온 사람을 보고 사람들은 설왕설래 말이 많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이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말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사람들은 눈을 뜬 사람을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데려갔다.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전문가의 판단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전문가들의 말은 늘 옳은가?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말하기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였고, 더러는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표징을 행할 수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졌다.(9:16)

당사자로부터 일의 자초지종을 다 듣고도 그들은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만큼 전대미문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기껏 한다는 말이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으로 보아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 참으로 파리하고 납작한 영혼이 아닌가? 그러나 판단을 유보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죄인이라면 그런 표징을 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가련하구나, 생명 회복 사건을 보면서도 낡은 율법책을 뒤적여 전거를 찾고 있는 전문가들!

유대 사람들은, 그가 전에 눈먼 사람이었다가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마침내 그 부모를 불러다가 물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당신의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또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가 자기 일을 이야기할 것입니다.”(9:18-22)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처음부터 믿으려는 생각이 없었으니 말이다. 유대 사람들의 불신은 참 진리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론적 회의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상질서의 유지이지 진리와의 대면을 통한 자기 갱신이 아니었다. 진리 그 자체보다 진리를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충동을 더 소중히 여겼던 레싱(Lessing)의 치열함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들은 불편한 진실과의 대면을 피하기 위하여 다각도로 노력한다.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는 눈먼 사람의 부모를 소환하여 마치 심문하듯 묻는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당신의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부모의 대답은 어정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은 사실 관계만 확인해주고는 그가 어떻게 낫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아들이 이제 보게 되었다는 그 놀라운 현실 앞에서도 그들은 맘껏 기뻐하지 못한다.

요한은 그 까닭을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하거나 고백하는 사람들은 회당에서 축출하기로 이미 결의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 유대인들이 회당을 중심으로 정체성을 구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을 공동의 적으로 삼았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내부의 모순과 불만을 잠재우고 내부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권력자들의 관행화된 수법이 아니던가?

여하튼 공동체로부터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부모들은 마치 남의 일인 양 이야기한다. 스스로 권부가 된 제도 혹은 체제는 사람을 이렇게 길들이는 것이다. 제도 혹은 체제는 다양한 형태를 설핏 내보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지배한다. 그런데 폭력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할 때이다. 압제자들이 웃음을 싫어하는 까닭은 웃음은 자기에게 덧입혀진 위엄의 맨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는 <<새벽의 약속>>에서 유머를 “현실이 우리를 찍어 넘어뜨리는 바로 그 순간에도 현실에서 뇌관을 제거해버릴 수 있는 완전히 만족스럽고 능란한 방법”(165쪽)이라고 정의한다. 유머를 허용하지 않는 종교와 정치는 억압적이다. 유머를 통해 사람은 제도보다 자신이 더 우월함을 드러낸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눈멀었던 그 사람을 두 번째로 불러서 말하였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9:24)

눈을 뜨게 된 사람의 부모들을 두려움으로 묶어두는 일에는 성공했지만, 자기들이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바리새파 사람들은 당사자를 다시 소환한다. 그리고 다짜고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한다. 이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집요한 심문을 신심행위로 치장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처럼 오용되기 쉬운 말이 또 있을까? '하나님을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구호 아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착취당하고 억압당하고 기만당했던가? 어떠한 형태이든 권력을 가진 이들의 손에 들린 종교적 언어는 때로 살상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욕망실현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바리새인들은 앞을 보지 못하던 그가 해야 할 말을 일러준다. 예수는 죄인임을 공적으로 고백하라는 것이다. 마치 독재정권 시절 공안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진술서의 내용을 불러주며 받아적게 하던 기관원들을 닮지 않았는가. 참으로 부도덕한 짓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9:25)

하지만 그는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그가 당신들이 말하는 대로 죄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를 통해 내게 나타난 이 변화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니냐고 그는 되묻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 대한 인식 근거는 전통이라는 잣대가 아니라 그를 통해 나타나는 사건이어야 한다고 그는 넌지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당황한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가 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말문을 막히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냐고 묻는다. 기지에 찬 역공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욕을 퍼붓는 것 밖에 없었다.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고, 근거도 없는 예수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제 다 드러났다. 예수는 요즘으로 하면 학벌사회 혹은 새로운 신분사회라는 덫에 걸린 것이다. 성령의 바람은 불고 싶은 곳으로 불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성령의 바람이 불어갈 길을 지정하고 싶은 것이다. 대체 누가 불경한 것인가?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은 듣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어주시는 줄을 우리는 압니다…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9:30-31, 33)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뒤집어졌다. 눈 뜬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 ‘사건’이다. 생명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야말로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곳이다. 예수,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현존이다. 이쯤 되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밖에 없다. 그를 내쫓는 것이다. 배제와 축출을 통해 그들은 자기들이 누구인지를 드러냈다. 그가 내쫓긴 자리에 예수가 찾아와 그를 더 깊은 믿음의 자리로 이끈다. 못보는 사람은 보게 되고, 본다 하는 이들은 보지 못하게 되는 이 놀라운 역설!

목록편집삭제

정병철(13 01-13 06:01)
감사합니다 목사님.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