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2 2012년 10월 18일
작성자 김기석

내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는가?

 

세상의 모든 생명은 삶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쾌락에의 의지나 권력에의 의지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살고자 하는 의지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타나토스 곧 '죽음에의 본능'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 본능조차 삶의 의지가 굴절된 것이 아닐까? 물론 죽음은 생명을 위해 부정되어야 할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비일상적인 경험이기에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이 두렵기에 사람들은 의례를 통해 죽음을 비일상화하기도 한다.

죽음의 현실은 모든 생명에게 보편적이지만 죽음을 능동적으로 자각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구석기인인 네안데르탈인들도 죽은 자에게 꽃을 바치고 시신의 훼손을 막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한사코 죽음과의 대면을 회피하며 살지만, 죽음의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질병과 실패와 고통이라는 한계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확실성을 회피할 수 없도록 만든다. 낯설기 만한 죽음을 자각하는 순간 삶의 시간은 이전과 전혀 새로운 밀도로 다가온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물음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예수의 죽음을 통해 구원이 세상이 유입되었다고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구속한다는 것이다. '피'는 물론 '생명'을 가리키는 제유법적 표현이다. 예수의 피가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명, 이웃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희생적 사랑, 어둠 속을 거닐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뜨거운 연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피를 신비화하여 마치 예수의 피 속에 마술적 능력이 잠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삶으로는 예수의 피를 부정하며 예수의 피를 찬양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경우 예수의 죽음은 그가 선택한 치열한 삶의 결과라기보다는 삶의 목적이 된다. 예수는 죽임당하기 위해 태어난 것인가? 제삿날을 위해 준비된 동물처럼 말이다. 함석헌은 장편 시 <흰 손>에서 예수의 피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을 향해 일갈하고 있다.

 

이놈들아 갈보리에 흘렸던 피

그 피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 위해 네 몸 위에, 네 혼 위에, 흘려

네 피 된 산 피 말이지.

 

네 만일 그 피 마셨다면야,

(왜, 내 살 먹어라 내 피 마셔라 않더냐?)

그러면야 지금 그 피 네 속에 있을 것 아니냐?

네 살에, 뼈에, 혼에, 얼에 뱄을 것 아니냐?

 

단적으로 말한다. 예수는 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예수에게도 죽음의 현실은 전율 그 자체였다. 사람들이 예수의 죽음을 신비화하는 것은 예수가 앞서 걸었던 길을 걸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소리 높여 찬미함으로 실존적 변화의 요구를 무지르려는 것이다. 쇠렌 키에르케고르가 들려주는 우화가 떠오른다. 그는 교인들을 집거위들에 비유한다. 거위들은 매주 뒤뚱거리며 교회에 들어와 설교를 듣는다. 설교자는 날아오름의 경이로움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뒤뚱거리며 걸어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이 장소에만 머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저 창공으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더 먼 지역, 더 축복받은 땅으로 비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날 수 있습니다." 거위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날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기억한다. 죽음의 위협이 시시각각 다가옴을 예수는 몸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무심한 제자들은 스승의 고통을 모른다. 예수는 근심하며 괴로워했다. 오죽하면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26:38) 하고 부탁하셨을까. 예수는 홀로 동산에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마26:39)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 기도를 한 달음에 읽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와 '그러나'라는 접속 부사로 이어진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그곳에는 산 자의 땅에 머물고 싶은 예수의 바람이 있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이 있다. 사람들은 '그러나'라는 단어가 발설되기까지의 그 심연 혹은 어둠을 응시하려 하지 않는다.

예수에게도 죽음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후퇴하면서도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는 소크라테스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고요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석가모니의 경우와는 다르다. 예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임 당함이었다. 예수는 역사와 전통 그리고 율법에 대한 해석학적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서 살해당할 위협 아래 있는 것이다.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성전 체제와 식민체제를 공고히 하여는 로마 제국이 결탁하여, 유대의 사회적 세계의 기반을 뒤흔들고 있는 한 존재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십자가'(cross)의 은혜에 주목하면서도 '십자가 처형'(crucifixion)이라는 스캔들을 짐짓 외면한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희생양이 되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희생양이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역사적 위기의 순간마다 박해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빼드는 '희생양 만들기' 문화에 대해 잘 안다. 한 사회에 예기치 않은 위기가 찾아와 기존의 가치관이나 질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그래서 사회가 극심한 혼돈에 빠져들 때, 체제를 수호하려는 하는 이들은 누군가를 그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함으로 사람들의 분노와 폭력성에 배출구를 마련해준다. 분노와 폭력이 그 희생양에게 집중되면서 사회는 임계점을 넘어 질서를 되찾게 된다. 희생양으로 지목되는 이들은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아줄 능력이 없는 이들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희생양은 늘 사회적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네로 황제 시절 로마에 대화재가 났을 때 그 화재의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기독교인이었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중세에는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이 희생양으로 지목되거나, 마녀사냥을 통해 수많은 무고한 여성들이 희생되었다. "한 사람이 온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요18:14)고 유대 사람들에게 조언했던 가야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도 이런 메커니즘을 잘 아셨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세운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증언하며 찬동하는 것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였는데,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세우기 때문이다."(눅11:47-48)

한편으로는 무고한 자에 대한 죽음을 기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덤을 세우고 비석을 세운다. 폭력을 미화하고 은폐하려는 것이다. 무덤을 세움으로써 양심의 소환에 맞서고 자신에게 면죄부를 발행하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살고 싶었던 예수는 죽음이 예기되는 그 순간의 긴장과 두려움을 넘어 죽음의 현실을 직시했다. 회피할 수도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만들어놓은 관습적 질서에 순응하면 됐다. 하지만 그 체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역이었다. 그렇기에 그 불의의 체제에 온몸으로 부딪쳐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운명의 키를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돌려드린 것이다.

삶을 사랑했던 예수는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영혼의 힘으로 얻은 것은 죽음조차 건드릴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일까? 타골은 <내어줌>이라는 시에게 이렇게 노래한다.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을 돌려줌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얻는다.

(<루미의 사랑 노래 타골의 죽음 노래>, 이현주 번역, 한국기독교연구소, 81쪽)

십자가는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부과되는 잔혹한 형벌이지만 무죄한 자 예수의 십자가는 제국의 가면을 벗겨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처형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울 수 있나를 보여주었다(김달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했던 예수는 가장 극심한 고통의 순간 영혼의 힘으로 폭력의 고리를 잘라냈다. 예수는 폭력을 받아들임으로 폭력을 해체했다. 십자가가 구원의 길인 것은 그 때문이다. 고난을 미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고난 받은 이가 아니라면 어찌 다른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겠으며, 폭력에 찢긴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용서의 아름다움을 알겠는가? 기독교는 '상처입은 어린 양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선언하는 종교이다(스탠리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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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3 01-10 10:01)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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