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예수의 내면 엿보기1 2012년 10월 18일
작성자 김기석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그가 아닌가?' 잊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마련이다. 어린 시절 문득 나와 타자의 차이를 의식할 때, 그런 질문은 자연스레 떠오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면 누구나 당황한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자기 자신이 낯설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계면쩍은 표정을 짓고 자신이 누군지를 숙고한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올리기도 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대답도 시원하지 않다. 고심 끝에 내리는 결론은 결국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 묻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애써 찾고, 고심하고, 희망하고 또 절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델피의 아폴로 신전 문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신들과의 관계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뜻일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주제넘지 말라는 엄중한 충고가 담겨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자기 성찰의 문제로 바꿔놓았다.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나찌의 철권 통치에 저항하다가 순교당한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목사가 감옥에 갇혀 있던 동안에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인 <<옥중서간>>은 신학에 관심을 둔 이들이 간과할 수 없는 책이다. 그 가운데 나오는 시 <나는 누구인가?>는 출중한 신학자이자 저항자였던 본회퍼의 진솔한 자기 드러냄이다.

 

나는 누구인가?

성에서 나오는 성주처럼

침착하고 명랑하며 흔들림없이

감방에서 나올 거라고

그들은 종종

나에게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마치 내가 상전인 듯

자유롭고 친절하며 명료하게

감시원들에게 이야기한다고

그들은 종종 나에게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승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태연하게 웃으면서 당당하게

불행의 날들을 짊어진다고

그들은 종종 나에게 말한다.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 나에게 관해 말하는 그 사람인가?

아니면 내가 내 자신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해하고 그리워하다 병이 나고

누군가 목을 죄는 듯 숨을 몰아쉬며

색깔, 꽃, 새 소리에 굶주린 채

호의적인 말, 인간적인 친밀감에 목말라하며

횡포와 하찮은 모욕에도 분노하고 전율하며

큰일을 바라다가 절망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들을 걱정하다가 지쳐서

기도하고 생각하며 활동하기에는 피곤하고 마음이 허전해진 채

기진맥진하여 모든 것과 작별을 고하려고 하는 내 자신?

 

나는 누구인가?

그 사람 아니면 저 사람?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다른 사람인가?

동시에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내 자신 앞에서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비통해 하는 약자인가?

아니면, 아직도 내 안의 모습이

이미 거둔 승리를 포기하는 혼돈 속의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외로운 물음이 나를 조롱한다.

 

오 하나님 !

제가 누구인지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저는 당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에서 확신에 찬 듯 보이지만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장 위대한 정신을 보이면서도 평범하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에 목이 메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대답할 수 없다. 다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고백한다.

'주', '메시야', '평화의 왕',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사람들이 예수에게 붙이는 호칭들이다. 그러한 호칭들은 한결같이 역사의 꿈과 관련되어 있다. 슬픔과 눈물과 한숨으로 점철된 역사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그렇게도 역사를 갱신할 새로운 존재를 갈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픔의 땅에서 비틀걸음으로 걷던 이들은 예수에게서 빛을 보았고, 그에게서 하늘을 보았기에 자기들의 소망을 담아 그런 호칭을 헌정했다. 하지만 예수 자신은 그런 호칭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을 '인자'(人子, Son of Man)라고 일컬었다. 유대교 묵시문학의 전통에서 '인자'는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예수는 자신의 구별됨을 드러내기 위해 그 단어를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분잡한 거리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필부필부와 자신을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고백이 어떠하든 역사 속에 던져진 한 생명으로서의 삶에 충실했을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예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광야의 고요 속에서, 사람들이 복닥거리는 거리에서, 회당과 성전에서 고투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인생의 정답은 없겠지만, 자기 삶이 수렴되어야 할 하나의 중심은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르키메데스는 지구 밖에 한 지점과 긴 지렛대를 주면 지구를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수도 그 한 지점과 지렛대를 찾고 또 찾았다. 로마 제국이라는 절대 강자가 지중해 세계를 유린하고, 유대교라는 사회적 세계가 사람들의 삶에 억압의 그림자를 드리웠던 때, 그는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투의 시간을 보낸 후 그는 마침내 한 가지 확신에 도달했다. '나는 누구인가?' '보냄을 받은 자'이다. 물론 보내신 분은 세상의 창조자시오 구원자이신 하나님이다. 예수는 그분을 친밀하게 아버지라 부른다. 예수의 삶을 일이관지하는 핵심은 바로 이런 자각이다. 그것은 몽상이 아니라 실존적 자각이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롬5:36)이 증거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소명을 이렇게 요약한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6:39)

알리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나는 어떤 이야기 혹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로 자신을 이해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결단의 순간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추상적으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으로 응답되어야 할 질문이다. 나의 '있음'은 '나는 ~ 이다'라는 술어를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고백도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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