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11 2012년 07월 25일
작성자 김기석

너희는 사람이 정한 기준을 따라 심판한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심판하면 내 심판은 참되다. 그것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8:15-16)

 

똑같은 심판이라도 심판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가 된다. '사람이 정한 기준'이라도 잘 적용된다면 그나마 낫다. 하지만 그 기준이라는 것이 온기 없는 원리이거나, 적용 주체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것이라면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정의는 강자의 편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말은 그릇된 말이지만 우리의 현실 경험은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든다. 모든 판단 혹은 심판은 상대적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놀랍다. 어느 누구도 현재의 모습으로 규정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닌가. '아무개는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그가 가지고 있는 다른 모든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차단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것은 생명의 낭비이고 폭력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은 무전제적일 수 없다. 우리는 순간순간 판단을 하며 산다. 예수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가 부득이 심판을 한다면 그 심판은 참되다. 억지스러운가? 하지만 그게 참이다. 타자를 바라보는 예수의 시선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마음을 거친 곡선의 시선이다. 즉 아버지의 눈으로 본다는 말이다. 모든 생명을 내신 분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가고, 너희는 나를 찾다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8:21)

 

사람들은 예수의 자기 증언은 참되지 못하다면서 당신을 보냈다는 아버지가 어디에 계신가를 묻는다. 깨달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 눈을 뜰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말이 부질없을 때가 많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마치 독백처럼 말씀하신다. "나는 가고, 너희는 나를 찾다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앞의 '나'는 백성들 앞에 서 있는 역사적 예수이고, 뒤의 '나'는 진리를 가리키는 말일 터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진리를 피하면서 찾았다고 고백했다. 진리가 지금 눈앞에 현전해 있는 데도 사람들은 그 진리를 만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은 다른 곳을 더듬고 있을 뿐이다. 집안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외등 앞에서 두리번거리는 격이다.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그곳에 없는 것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그 타령하다가 죽는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자기를 버려 보내신 분의 뜻을 온전히 수행한 사람이 가는 곳, 그곳은 아버지의 품이 아닌가? 사랑은 마주봄으로 나타나고, 미움은 등 돌림으로 나타난다. 지금 우리는 저 영원한 나라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8:23)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자살하려고 하는 것인가 하며 서로 수군거린다. 아 답답한 사람들! 예수는 은유적인 언어를 통해 그들의 무지를 깨쳐주려고 한다. '아래'에서 온 사람과 '위'에서 온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위와 아래가 나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는 동안 그런 구분이 생겼을 것이다. '아래'에서 왔다는 말은 삶의 중력에 속절없이 끌려가며 산다는 말일 터이고, '위'에서 왔다는 말은 하늘 뜻에 붙들려 산다는 말일 터. 잠시 바람이 불어도 다음 순간 수직의 중심을 향해 몸을 일으키는 촛불처럼 살아가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위로부터 온 사람이 아닌가? 확고히 땅을 지향하면서도 하늘에 속한 줄 알고 사는 사람이 참 많다. 싸구려 은총에 속은 탓이다. 우리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는 오직 삶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8:28-29)

 

아래에 속한 사람들이 보기에 위에 속한 사람은 통약 불가능한 존재요 낯선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묻는다. "당신은 누구요?" 당혹스러운 것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인자가 높이 올려질 때는 요한복음에서 십자가 고난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내가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잠깐. '내가 곧 나'라는 표현이 낯익지 않은가? 그렇다. 떨기나무 불꽃 사이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하나님이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다. '나는 곧 나'라는 말은 나는 인간의 어떤 말로도 규정될 수 없는 존재,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나'라는 주어는 오직 술어를 통해서만 설명된다. '나'의 나됨을 드러내는 술어는 결국 말과 행동이다. 예수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보내신 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이 오롯한 일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1-32)

 

당신의 말을 수용하게 된 예수는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라 이르신다. 믿음이란 어쩌면 인내가 아닐까? 주인이 기약된 시간에 돌아오지 않아도 끝내 깨어 기다리는 종처럼, 고통이 예기되는 상황 속에서도 피하여 달아나지 않고 끝까지 말씀을 붙드는 것. 진리 인식은 그런 인내 끝에 찾아오는 새벽빛과도 같은 것. 그 빛이 스며들면 우리는 허깨비 같은 것들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인이 된다. 관습적인 신앙에 집착하지 않고, 우리를 길들이려 하는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너희에게 하나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말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하고 있다.”(8:39-40)

 

존재로서 말할 것이 없을 때 흔히 사람들은 자기 직함을 드러낸다. 명함에 여러 개의 직함을 훈장처럼 새겨넣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존경심보다는 경계심이 앞선다. 그들은 자아가 강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유대인들은 존재로 말하기보다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자랑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의 진술이 허구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영적인 의미에서 자녀됨을 확인해주는 것은 그의 자기 진술이나 족보가 아니라 그가 하는 일 뿐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아버지께 부치는 편지 말미에 '불초 소자' 아무개라고 적곤 했다. 아버지의 덕을 닮지 못한 부족한 아들이라는 뜻일 게다. 세상에는 불초 아들이 너무 많다. 불초 신자는 또 어떠한가?

베이컨의 말을 빌어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종족의 우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삶으로 나타난 진리를 보지 못한다. 오히려 그 진리를 낯설어 하고, 낯선 진리를 없애려 한다. 예수의 말이 신랄한 것은 그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하고 있다'. 예수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엉너리를 치거나 얼버무리지 않는다. '너희 아비'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사탄이다. 예수는 외견상 가장 경건해 보이는 이들 속에서 암약하고 있는 악한 영을 보고 있다. 무섭다. 오늘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지만, 사실은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치열한 영적 전장에서 예수는 물러설 뜻이 없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8:47)

 

말을 바꾸어 보자. 누구의 말을 듣는가 보면 그의 소속을 알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문제는 말들이 제 집을 잃고 떠돌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단적으로 말해 없다. 하지만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 하지 않던가? 우리 삶을 보면 우리가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지 알 수 있다. 날마다 자아를 강화하며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정의에 민감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커지고 있다면, 배움을 향한 개방성이 자라고 있다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은 예수의 말에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상처를 입힌 자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힘으로 보복하려 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향해 '사마리아 사람',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욕한다. 혈통이 의심스러운 사람, 거룩과 무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이들을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로 포박하려 한다. 그라는 존재가 상기시키는 자아의 부끄러운 모습과 대면하기보다는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게 훨씬 간편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겪지 않을 것이다.”(8:51)

 

예수는 자기에게 집중되고 있는 비난을 반박한다. 자기는 오롯이 아버지의 영광만 구한다는 것이다. 굳이 변명을 해야 했을까?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볼 생각이 없는 그들의 완악함의 한 구석이라도 허물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 예수와 유대인들의 지루한 공방에 조금 지쳐 있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예수는 끝까지 소통을 향한 문을 닫지 않으신다. 그게 사랑이 아니겠는가.

알아듣거나 못 알아듣거나 예수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신다. '나의 말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겪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말을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할 말로 받아들인다. '죽음을 겪지 않는다'는 말이야말로 예수가 귀신들린 증거라는 것이다. 그들은 신이 났다.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나의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겪지 않을 것'이라니? 그들은 은유의 언어를 사실의 언어로 치환하려 하고 있다. 예수의 말에 담긴 시적 진실을 보기보다는 산문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마이동풍이다. 수많은 사람이 성경을 이렇게 읽는다. 한국교회는 진실과 사실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예수의 언어가 낯선 것 이상으로 예수라는 존재는 낯설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당신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오?' 함정 질문이 때로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길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예수는 그 대답을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들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성실히 그 질문에 답하려 한다. 아브라함의 자녀를 자처하는 그들에게 아브라함을 전거로 삼아 자신이 누군지를 밝히는 것이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기대하며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 기뻐하였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8:56-58)

 

아브라함이 '나의 날'을 보리라고 기대하고 즐거워했다고? 나이 쉰도 안 된 사람이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게다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그들은 더 들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참람한 말을 뿌리치려는 듯 그들은 돌을 들었다. 예수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그것이 스스로의 거룩함을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의 말에 사족을 붙여볼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날을 기다리며 살았고, 예수 자신은 그 언약의 성취라는 말이 아닐까? 언약의 성취는 모든 창조의 의미와 목적이기에 예수는 만물보다 먼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있다'라는 말은 장엄하다. 호렙산의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들려왔던 말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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