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10 2012년 04월 24일
작성자 김기석

명절이 중간에 접어들었을 즈음에,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셨다. 유대 사람들이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14-15)

 

여러 해 전 이집트를 거쳐 이스라엘을 방문한 적이 있다. 국경 검문소에서 폭발물로 추정되는 가방이 발견되어 국경은 폐쇄되고 아주 긴장된 상황이 지속되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국경이 열렸고 우리 일행은 한 밤중이 되어 숙소에 도착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고단한 몸을 눕혔는데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밖에 나와 악단의 연주에 맞춰 어깨를 겯고 춤을 추고 있었다. 춤과 노래는 자정이 넘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우리가 초막절 축제의 한 복판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초막절 축제는 추수가 완료된 것을 경축하는 축제이기도 하지만, 다가올 최후의 추수를 미리 맛보며 경축하는 축제이기도 하다. 지난날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 전개될 일들에 대한 부푼 기대를 그들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농경사회의 리듬을 역사의 지향과 결부시키는 그들의 빛나는 상상력이 참으로 놀라웠다.

초막절은 빛과 물의 축제이다.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생명의 물이 역사의 갈피갈피에 흘러들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축제 기간 중 사람들은 "너희가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을 것이다"(사12:3)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 성전까지 운반하는 행렬을 이루곤 했다.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나서, 절반은 동쪽 바다로, 절반은 서쪽 바다로 흐를 것"이라는 기대감을 통해 그들은 척박한 현실을 넘어설 힘을 얻었던 것이다.

예수는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가르치셨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놀람이었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도 않은 사람이 도저하게 풀어내는 이야기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담론 이전에 말씀이었다. 다바르, 곧 에너지로 가득 찬 말씀 말이다. 물 흐르듯 유장하고 나직하지만, 마치 폭포처럼 힘찬 말씀에 사람들은 놀랐다. 개념과 논리로 오염되지 않은 말, 본질을 향해 곧장 돌진하는 그 말씀은 낯설지만 거역할 수 없는 매혹이었다. 말씀은 그런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16-18)

 

'보냄을 받은 자'야말로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예수의 정체성이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보낸 이가 있다는 말이고, 또한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말이다. 보내신 분의 뜻을 가르치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불화 없이 살아가는 길이다. 그것이 오해와 불신과 박해로 귀결된다 해도 할 수 없다. 이런 자기 이해가 없어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삶이 가리산지리산이다. 고백과 삶 사이의 그 아득한 거리, 심연과도 같은 그 간격 때문에 예수는 울고 있다.

예수는 가르침의 참됨과 그릇됨을 판별하는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인가를 보면 된다. 상식적인 듯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용인된 기준, 관습적인 기준과 달라도 많이 다르다. 하나님의 뜻을 빙자해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이들, 불의를 자행하면서 그것을 신앙적으로 분칠하는 사람들,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배제의 대상으로 타자화시켜 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거의 직관적으로 참된 가르침과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다. 학식이나 경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지식이나 경험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물이 될 때도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8-29)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라는 유대인들의 말에 대한 긍정인 동시에 부정이다. 그들은 예수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목수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들의 앎은 불충분하다. 그들은 예수를 알지만 예수를 알지 못한다. 예수의 말은 보면서도 보지 않으려 하는, 들으면서도 듣지 않으려는, 알 수 있으면서도 한사코 알려 하지 않는 완고함에 대한 일침이다. 사람들은 왜 알려고 하지 않을까? 아는 순간 안일한 삶이 끝나기 때문이다. 자기 실존의 참상과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허위의 가치가 만드는 안개를 벗어나 원래 모습대로 사물을 보기 위해서는 집착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시몬 베유의 말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마음을 열고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예수가 '참'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냐고? 그에게는 지켜야 할 '나'가 없지 않던가? 고래 힘줄보다 더 질긴 '나'가 없었기에 그는 티끌 세상에 속한 모두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 그는 사람들의 비참 속으로 흐르고 또 흘러가 생명을 깨웠다.

예수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믿었고, 어떤 이들은 적대감을 보였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성전 경비병까지 보냈다. 그들은 서로 대립할 때가 많았지만 자기들의 권위를 지켜내기 위해 공모한 것이다.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든 불온시 되게 마련이 아니던가. 그러거나 말거나 예수는 칼바람 앞에서도 홀로 당당하다. 때가 되면 보내신 분께로 가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이끌림에 따라 언제든 천막을 거둘 준비를 갖추고 사는 유목민처럼 예수는 그렇게 떠날 준비를 하고 사셨다. 그래서 공포에 짓눌리지 않았다. 그 능소능대한 자유에 이르는 길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 예토에서 이렇게 서성이고 있다.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37-38)

 

초막절 축제의 마지막 날, 사람들은 실로암 연못에서 길어온 물을 제단에 붓는 퍼포먼스를 한다. 그것은 미구에 열릴 새로운 세상을 가시적으로 선취하는 것이다. 그 광경을 흥분과 설렘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은 에스겔 47장을 떠올렸을 것이다. 성전의 동쪽 문에서 흘러나온 물이 이르는 곳마다 죽은 물이 살아나고, 온갖 생물이 번성하게 되는 그 놀라운 광경,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흥감해진다. 삶이 척박할수록 꿈은 그렇게 오달지지 않던가.

흥분으로 얼굴이 벌개진 사람들을 바라보며 예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차마 앉아서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근조근 말할 수도 없었으리라.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에게 하셨던 말씀을 여기서도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내면에 깃든 목마름을 보고 계셨다. 그들 속에 마르지 않는 샘 하나 파주고 싶으셨다. '내가 물이다.' 사람들은 그 '나'를 2000년 전 갈릴리와 유대 광야 일대를 누비고 다녔던 한 사나이와 주저 없이 일치시킨다. 일단 옳다. 그런데 예수라는 물은 우리 속 깊은 곳에 이미 흐르고 있는 물을 끌어내는 마중물이다. 예수를 마신 사람은 그 또한 샘이 되어 목마른 이들의 목을 적셔줄 수 있어야 한다.

요한은 우리의 배에서 솟아나올 생수가 성령이라고 설명한다. 꽃들을 피어나게 하는 봄 햇살처럼, 예수는 봄기운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예수와 성령은 여기서 안팎 없이 일치한다. 아, 일렁일렁 밀려오는 예수의 강, 그 강에서 마른 목을 축이면, 우리 또한 강이 된다. 생명을 살리는 강 말이다. 아, 사붓사붓 다가오는 봄 햇살같은 예수의 영, 그 영에 사로잡히면 우리도 꽃을 피울 수 있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가운데는 “이 사람은 정말로 그 예언자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 사람은 그리스도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더러는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리에서 그리스도가 날 수 있을까? 성경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날 것이요,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40-42)

 

예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깊이 감동했다. 목석같던 가슴이 울렁거렸다. 마치 영혼의 날개가 돋아나듯 어깨가 간지러웠다. 어떤 이들은 수런거리며 예수가 신명기에 언급된 '그 예언자'라고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 사람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예수가 갈릴리 출신임을 상기시키며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머리가 가슴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안다 하는 자부심이 참된 앎을 가로막기도 하는 것이다.

할머니 권사님 한분이 한번은 집에 며느리가 처음 들어왔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좋은 대학을 나온 며느리는 모든 것을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하는 시어머니의 살림살이가 미덥지 않았다. 며느리는 음식을 만들 때 늘 계량컵과 저울로 양을 재곤 했다. 어느 날 부엌에서 밥이 타는 냄새가 나길래 "악아, 밥 탄다" 하고 말했더니 며느리가 그러더란다. "어머니, 아직 3분 남았어요." 우스운 상황이지만 이게 우리 모습이 아니던가? 예수는 분명 놀라운 분이지만, 갈릴리 출신이기에 별 볼 일 없는 사람일 거라는 이 편견은 참으로 강고하다. 그림자에 붙들려 실체를 보지 않으려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무리 가운데 예수 때문에 분열이 일어났다. 그들 가운데서 예수를 잡고자 하는 사람도 몇 있었으나,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지는 못하였다.(43-44)

 

똑같은 것을 보아도 사람들은 각기 다른 것을 본다. '아는 만큼 보고, 보는 만큼 안다' 했던가? 정말 그렇다. 서 있는 자리에 따라서 세상은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물 가운데 선 돌로 인해 물이 갈라지듯 예수 때문에 분열이 일어났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 경건한 체 하며 예수를 잡으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한다. 왜? 가슴이 그들의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예수에게서 피어오르는 거룩함의 광휘를 그들도 느꼈을 것이다. 거룩함에는 손을 댈 수 없는 법이다.

성전 경비병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빈 손으로 돌아온 그들을 책망한다. 여차하면 그들의 밥줄을 끊을 수도 있는 권세자들에게 그들이 한 대답이 참 놀랍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말은 의도한 것은 아닐 테지만 성전 체제의 수호자들의 불경건과 무능을 폭로하고 있다. 당신들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곁에서 귀가 닳도록 들어왔지만, 그것은 상투적인 말․관습적인 말이었을 뿐 영혼을 깨우는 말․살리는 말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알았을까? 어떤 힘이 그들 속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른 말을 무지르기 위해 권세자들이 동원하는 것은 권위 주장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너희도 미혹된 것이 아니냐'면서 지도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믿은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가련하구나. 너희 바리새파여. 앨버트 노울런은 일찍이 바리새파와 예수를 비교하여 이렇게 말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권위를 진리로 삼지만 예수는 진리를 권위로 삼는다." 무죄한 성전 경비병들을 꾸짖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그들은 저주의 말까지 보탠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지렁이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아, 가련한 사람들! 예수는 이런 이들을 일러 '눈먼 인도자들'이라 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를 찾아간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50-51)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어섯눈이나마 뜬 사람이 있다. 니고데모, 예수를 찾아왔던 그가 애써 예수를 변호해 보지만, 지도자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니고데모에게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오?'라고 묻는다. 색깔 씌우기이다. 소수자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다수자의 목소리는 이렇게 폭력적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8:3-5)

 

성전 체제에 기대 살아가는 이들의 시샘을 모를 리 없건만 예수는 성전에서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두지 않으신다. 누구의 눈치를 살피며 살 순 없었기 때문이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자기 검열을 하지 않는 자유인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직정적으로 자기들의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나름대로 경건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다가 그들은 좋은 기회를 잡았다. 그들은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예수 앞에 끌어온다. 그리고 여인을 가운데 세워 놓고는 그 여인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옳으냐고 묻는다. 말은 정중하지만 그들의 혀 밑에는 칼날이 숨겨져 있다.

'가운데 세워 놓고'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사진 한 점이 떠오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비시 정권 치하에서 나찌에 협력하고 독일인의 아이를 낳았다 하여 한 여인의 머리카락을 다 자른 후 군중들 앞에서 조리돌림하는 사진 말이다. 그 노골적인 모욕주기는 신체에 가하는 폭력 이상으로 잔인하지 않던가. 종교 전문가를 자처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이 어쩌자고 '하나님의 딸'을 그렇게 취급한단 말인가. 종교는 가끔 살리고 북돋는 일보다, 가르고 차단하고 죽이는 일에 열중할 때가 많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을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8:6-7)

 

예수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다만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모욕을 당하고 있는 그 여인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일까? 아,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를 향한다. 그때 그들은 예수에게 답을 내놓으라고 다그친다. 그들의 음성에 득의의 음험함이 배어있었을 것이다. 진퇴양난이다. 율법을 어기라고 말할 수도 없고, 율법대로 하라고 할 수도 없다. 이런 아포리아적 상황에 설 때마다 예수는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재정위한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단 말이냐? 날선 마음으로 여인을 정죄하는 너희들 속에는 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지 않더냐?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8:8-9)

 

예수는 또 다시 몸을 굽히고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적대적인 마주 섬이 그들 속에 있는 에고를 강화할 것임을 잘 아셨기 때문이리라. 그들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을까? 바깥을 향했던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들일 때 내면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하나 둘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돌이 날아왔다면 여인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수의 말은 돌을 던지려던 그 날선 마음을 붙들어 맨 올가미였다. 제발 사람들을 향해 첫 번째 돌을 던지는 이들이 되지 말자. 비난의 돌, 원망의 돌, 조롱의 돌, 불평의 돌 말이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8:10-11)

 

마침내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예수와 여인만 남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는 몸을 일으키시고 여인을 바라보신다. 고요하고 따뜻한 시선이었으리라. 상처받은 여인, 공포에 떨던 여인, 모멸감에 잠긴 그 여인을 감싸 안는 듯한 눈길이었으리라. 그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꺼져가는 등불과 같았던 여인의 마음에 생명의 불길이 당겨졌을 것이다. 상한 갈대와 같은 여인의 가슴에 하늘의 숨결이 닿았을 것이다. 이윽고 그 마음을 향해 말씀이 떨어진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에너지로 가득한 그 말씀은 여인을 거룩함의 길로 인도하는 길이 되었을 터이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8:12)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함을 일러 무명, 즉 '빛이 없다' 한다. 눈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다. 기독교인은 예수의 빛을 의지해 세상을 보는 사람이다. 그 빛으로 세상을 보는 순간 너와 나를 가르는 온갖 장벽들은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장벽 세우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이 많다. 장벽이 많아질수록 생명의 빛은 가물거리고, 비틀걸음으로 걷는 이들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비록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내 증언은 참되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8:14)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의 말을 두고 사람들은 또 다시 논쟁을 벌인다. 증언이 참되기 위해서는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의 말을 입증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예수는 더 어려운 말씀을 하신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으니 내 증언은 참되다'는 것이다. 아,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처럼 말할 수 있을까? 그 말이 우리의 말이 되는 순간 삶은 단출해지고, 든든해진다. 파스칼은 하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왕위를 뺏긴 왕의 비참함'이라 일컬었다. 다시 우리의 지향을 가다듬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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