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9 2012년 02월 01일
작성자 김기석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6:37-38)

오늘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우리의 결단 이전에 아버지의 이끌어주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보이지 않는 끈이 우리를 묶어 이 자리에 데려왔다.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예수는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을 아무도 물리치지 않았다. 호불호의 감정, 미와 추, 빈부귀천, 피부색이나 종교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님은 인간이 한갓 티끌임을 아셨기에 누구든 품지 못할 사람이 없었다.

‘나’를 중심에 놓고 사람을 대하면 당연히 분별심이 일어난다. 내게 도움이 될 사람인지 해를 끼칠 사람인지 먼저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우리는 지금 비근한 일상의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이끌어주신 사람으로 대하는가? 이 마음이 없어 세상은 우울하다. 받아들여짐의 욕망이 좌절될 때 우리는 세상에 지옥을 짓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보면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당장 내 비위에 맞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은 그 또한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은 사람은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또한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다.(6:39-40)

보내신 분의 뜻을 어쩌면 이렇게도 간명하게 요약할 수 있을까? 주께서 내게 주신 사람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이 당차고 복된 다짐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산과 들을 헤집고 다니는 목자의 애끓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마지막 날’이라는 표현 때문에 예수의 구원이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 일이다. 모든 골짜기의 물이 모여 강을 이루듯, 영생은 ‘지금 여기서의 삶’과 분리할 수 없다. 예수의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살림’이다. 그 살림의 궁극이 영생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51)

예수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 하신다. 빵의 보람은 먹히는 것이다. 먹히지 않는 빵은 빵이 아니다. 빵은 먹힘으로 먹는 자를 살리고, 먹는 자는 그 빵을 먹음으로 빵을 살린다. 예수는 ‘살아있는 빵’인 동시에 ‘살리는 빵’이다. 예수가 들어가면 참 사람이 살아나고, 역사의 봄이 찾아온다. 성전에서 솟아난 물이 이르는 곳마다 죽었던 생명이 되살아나는 에스겔의 비전은 예수를 통해 구현되었다 할 수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54-57)

그런데 생명을 살리는 그 빵은 관념도 아니고 은유도 아니다. 바로 예수의 살과 피이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예수 안에 있고, 예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그런가? 우리 속에 예수가 있는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고 많지만 예수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은 만나기 어렵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의 입을 통해 음식을 먹고 그 음식이 무엇으로 변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했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비단을 토해낸다. 양은 풀을 먹고 우유를 만든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1930년대의 신비가인 이용도 목사의 시를 자꾸만 되뇌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피가 말라 빈혈병자가 되었다면서 예수의 피를 달라고 기도한다. “피가 없을 때는 기운이 없고, 맥 없고, 힘 없고, 담력 없고, 의분 없고, 화기 없고 생기가 없습니다.” 그는 무기력증에 빠진 교회를 보며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피를 달라고 간구한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 이 말씀을 창조적으로 오독하면 어떨까?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 덕분에 살게 되지만, 동시에 예수라는 대의를 꼭 붙들고 산다고 말이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60)

말씀이 어려운 게 아니다.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니 어려운 것이다. 제자들은 지금 당황하고 있다. 그들이 기대해온 메시야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실 분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지금 그 문제를 풀어야 할 사람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제자들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외로운 사람의 벗이 되어 주고,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는 세상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를 모신 사람의 삶이다.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66-69)

예수가 가리키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는 이들은 예수의 곁을 떠났다. 붙잡을 생각은 없었겠지만 외롭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물으신다. 떠날 생각이 없다는 베드로의 대답이 참 고맙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다. 유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대 지방에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유대 사람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워지니,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형님은 여기에서 떠나 유대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형님의 제자들도 형님이 하는 일을 보게 하십시오.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님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예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7:1-4)

‘두루 다니셨다’고는 하지만 한가로운 여행일 리가 없다. 자기보다 낮은 곳이 있으면 어김없이 흘러가는 물처럼 예수는 아픔이 있는 곳으로 흘러가곤 하셨다. 예수가 던진 불이 갈릴리 도처에서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불꽃은 흔적조차 없이 사위어가던 이들의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기득권을 누리며 거들먹거리던 이들의 가슴에는 울화를 남겼다. 예수의 지혜는 관습화된 당연의 세계를 뒤집어 그 실상을 드러내곤 했다. 불의를 공모하며 다붓하게 지냈던 이들, 곧 성전 체제의 수호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 낌새를 모를 리 있나. 예수는 유대 지방에서 몸을 피했다. 일부러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으니까.

초막절이 이르자 형제들이 넌지시 형을 채근한다. 그들은 변방인 갈릴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구원의 사건에 한껏 고무되었다. 예수를 만나 변화된 사람들 사이에 넘치는 기쁨과 희망이 그들의 꿈을 부풀려주었다. 형제들은 예수가 변방을 떠나 중심인 예루살렘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그들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출세의 길을 걸으라는 것이다. 그런 권유의 이면에는 덕 보려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주석자는 형제들의 그런 진언이 불신앙에서 나온 것이라고 명토 박아 말한다. 피붙이조차도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옛 사람은 성인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마음의 날카로움을 꺾고, 그 엉킴을 풀고, 그 빛을 부드럽게 하고, 세속의 티끌과 뒤섞인다.”(挫其銳, 解其粉, 和其光, 同其塵). 이런 것을 일러 진리와 하나 된다 한다. 입신양명에 목표를 둔 사람과 참 살이에 목표를 둔 사람의 길은 이처럼 어긋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의 때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 세상을 너희를 미워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미워한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보고서, 그 하는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거라. 나는 아직 내 때가 차지 않았으므로, 이번 명절에는 올라가지 않겠다."(6-8)

‘내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니, 이게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말하는 ‘내 때’는 곧 죽음의 때이다. 그 날은 보내신 분의 뜻을 완수하는 날이고, 보내신 분께로 돌아가는 날이다. 예수는 자신이 불의한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을 예감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너희의 때’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 세상은 욕망의 덩굴손을 한껏 뻗치고 있는 이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소속이 다르다. 그는 존재 자체로 세상의 어둠을 드러낸다. 게다가 그는 길들여진 짐승처럼 고개 숙인 채 살지 않는다. 불의를 불의로 폭로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하는 계산이 전혀 없다. 계산이 없으니 세상의 주특기인 나쁜 물을 들일 수도 없다. 예수, 참 불편한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의 형제들이 명절을 지키러 올라간 뒤에, 예수께서도 아무도 모르게 올라가셨다.(10)

예수는 타인의 부추김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돛을 올리는 선원처럼 예수는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예수는 여느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거느린 사람도 없고, 두드러진 표식도 없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그 길 위에서 예수는 온전히 혼자였다. 들뜬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홀로 침묵하고 계신 예수.

명절에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물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소?" 무리 가운데서는 예수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더러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더러는 무리를 미혹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예수에 대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10-13)

예수는 몸을 숨기려 하지만 소문은 막을 수 없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그 사람’이라 지칭한다. 그에 대한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는다. 그만큼 예수는 문제적 인물이다. 동일한 대상을 두고도 각자 서 있는 자리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무리를 미혹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드러내놓고 그에 대해 말하진 못한다. 스스로 자기 입에 재갈을 물린다. 지도자들의 의중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무리는 ‘즉자적 민중’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을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남에게 동원되고 조종되기 쉽다. 허균은 이처럼 기존 체제에 순종하며 부림을 받는 이들을 일러 ‘항민恒民’이라 했다. 즉자적 민중, 항민, 혹은 무리는 어느 시점에 이르면 기존 체제를 뒤집어엎는 해일이 될 수 있지만, 평상시에는 강자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오랫동안 눈치를 보며 살아왔기에 그들은 지배자의 눈으로 자신을 감시하고 처벌하기도 한다. 그뿐 아니다. 그들은 강자들의 시선을 자기화하여 약자들을 감시하거나 무시하기도 한다.

지금 무리들은 예수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예수를 제거하는 데 동조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망설이고 있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결단하지 못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지금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가 전하는 급진적인 평화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자기 삶을 변혁할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예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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