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일상의 거룩함을 꿈꾸다 2012년 02월 01일
작성자 김기석

일상의 거룩함을 꿈꾸다

--전병식, <<평범한 날들의 축복>> 서평 

"파우스트를 위해 기도하는 영혼, 그레트헨이 곁에 있었듯이, 오늘 우리의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방황하는 영혼들, 악마와 거래하고 있고, 악마의 노예가 되어 영혼이 팔려가고 있는 어두운 영혼들에게 그 거래를 끊어버리고 돌이키게 할 영적인 힘이 있는가?"(212쪽) 

운명처럼 글쓰기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서 내밀한 상처를 찾아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결핍이 없다면 그렇게도 치열하게 자기 내면을 응시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막막함 속에서 혼돈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 그리고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적확한 언어의 배치를 통해 기록한다는 것, 그것은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고통이자 기쁨이다. 전병식 목사는 상당히 오랫동안 시를 써왔다. 20대 초반, 그의 시를 읽으며 뭔가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작품의 자기 지시성이 높지 않아 그의 속내를 알아차리기 어려웠는데, 그래도 세상 뭐 심각할 게 있냐는 투로 툭툭 던지는 어법 속에는 냉소와는 다른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그것은 어떤 그늘이었다. 그 그늘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삶의 내력을 캐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을 벗어난다. 다만 그 그늘이야말로 그의 지속적인 글쓰기의 내적 연료라는 사실만 지적하고 싶다.

나이가 들어 자기와의 불화가 극복되었기 때문일까, 직업적 관성 때문일까? 오롯이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던 그의 글이 어느 순간부터 타자와의 소통을 지향하고 있었다. 교계 신문에 연재했던 칼럼과 학교 채플에서 전했던 설교 몇 편을 가려 묶은 <평범한 날들의 축복>은 그가 세상을 향해 건네는 수인사인 동시에, 자기 존재에 대한 중간결산이다. 인생이라는 순례길에서 지금 그가 당도한 자리는 어디일까? 뜻밖에도 그는 평범한 날들, 어찌 보면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이야말로 우리가 누리는 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희망과 절망이 갈마들고, 기쁨과 슬픔이 뒤섞이는, 덤덤하고 시큼한 그래서 가끔은 벗어나고 싶은 것이 일상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는 평범한 날들이 곧 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평범한 날들은 비루한 욕망에 덜미 잡힌 채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평범한 날들이 축복이 되려면 욕망의 주술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타자의 욕망을 내면화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일상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기 십상이다. 몸에 바탕을 둔 생래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정서적 결핍인 욕망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 충족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은 마치 휘황한 집어등 빛에 현혹되는 오징어와 다를 바 없다. 기독교인이라면 '오징어잡이 배에 매달린 집어등의 치명적 유혹'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교회조차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풍요의 신화에 나포된 채 '번영의 복음'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마당에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거룩함이란 일상과 분리된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일상생활 곳곳에서 묻어나는 편안함과 선함이라고 말한다. 그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일이관지하는 것은 ‘꾸준함’이라고 말한다. “어디에서고 뛰어나다거나, 비범하다거나, 드러내는 모습이 없이 일상에서 늘, 항상恒常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일상성으로 평범하게 지켜내고 행하는 것 그것이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149) 탁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비범한 일 혹은 사람의 존재는 무슨 의미냐고? 저자는 단순하고 명료하게 답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끔 우리들에게 분발하라고 보여주시는 분위기의 환기와 같은 것”(151)이라고.

<평범한 날들의 축복>을 읽다보면 그의 칼럼과 설교가 상당한 수준의 인문학적, 신학적 소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좋은 칼럼이 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요소는 정보, 읽는 재미, 그리고 관점이다. 독자들은 상투적이고 교훈조인 글을 싫어한다. 새로운 인식의 길을 열어주는 정보가 풍부하게 담겨 있는 글이라야 관심을 갖는다. 다양한 정보가 설득력을 갖는 것은 구체적인 전거와 함께 버무려질 때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보와 전거들을 하나로 엮는 관점의 일관성이다. 전 목사의 칼럼은 이 세 가지 요소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저자의 전방위적 독서 편력에 우선 놀라게 된다. 대중문화, 시, 미래학, 인문학은 물론이고 주역과 맹자를 비롯한 동양 고전이 두루 망라되어 있다. 적어도 그의 독서는 자기 계발을 위한 것이거나 설교에 써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식과 수양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보물 창고에서 옛 것과 새 것을 꺼내오는 서기관처럼 그는 필요할 때마다 인식과 기억의 창고에서 적절한 보화를 꺼내온다. 하지만 그의 글이 '공자 왈 맹자 왈'처럼 들리지 않는 것은 현실 정합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고전을 자꾸 조회하는 것은 현학의 욕구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거울삼아 우리가 서있는 현실의 좌표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필법이 자못 화려하여 자칫하면 잡다하게 보일 수 있는 그의 글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은 ‘관점’이다. 저자는 기득권자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보다는 중심에서 조금쯤 밀려난 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읽는다. 이것은 신앙인이라면 특별할 것도 없는 선택이다. 아니,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관점이다. 히브리들의 해방자를 자처하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언제나 아래로부터의 눈길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 수전 손택의 말은 소박하지만 강력하기 이를 데 없다.

“종교적 사유에 있어 뿌리는 바로 고통의 관점, 즉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점이다. 이 관점은 고통을 희생에 그리고 희생을 정신적 고양에 결부시킨다.”(43쪽)

고통의 관점이 아닌 종교적 사유는 성서적 사유가 아니다. 그렇기에 성서의 담론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제국적 질서에 도전한다. 예수는 로마 제국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 기존질서의 입장에서는 반역적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오늘의 교회가 새로운 제국으로 변해가는 현실을 유감스러워 한다.

그는 기본을 지키지 않는 목회자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저자는 1516년 독일의 인골슈타트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빌헬름 4세가 맥주의 순수성을 보장하기 위해 맥주에 보리, 호프, 물 3가지 외에는 어떠한 원료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맥주 순수령麥酒 純粹令’을 반포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목회자가 ‘자본과 권력의 욕망에 달라붙어 기생寄生하는 기식자寄食者’가 되지 않도록, ‘목회자 순수령’이라도 제정하여 공표해야”(60)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목회자 순수령에 들어가야 할 내용이 제시되지 않는 것은 유감이지만 한국교회가 한번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목회자들이 먼저 변화되고 교회가 교회답게 복음의 대의에 합당하게 변화될 때, 새로운 세상의 꿈은 영글어간다. 버나드 브랜든 스캇은 예수의 비유를 다룬 그의 책 <예수의 비유 새롭게 듣기>의 부제를 ‘세상 다시 그리기’라고 붙였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제시했고, 그 꿈에 지핀 사람들이 초대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이다. 전 목사는 기독교인은 ‘밤꿈’이 아니라 ‘낮꿈’을 꾸는 사람이라고 요약한다. 밤꿈은 무의식 속에서 다가오는 꿈이지만, 낮꿈은 ‘철저히 의식하고, 생각하고, 간절히 바라는 의지가 담긴’ 꿈이다. “밤꿈은 혼자 꾸지만 낮꿈은 여럿이 함께 꾸는 것”(219)이다. 낮꿈을 공유한 이들이 늘어날 때 세상에 희망이 유입된다. 그 꿈의 세상은 어떤 곳일까? 저자는 시인 김완하의 시 <엄마>를 통해 그 세상을 그려본다.

“첫돌 겨우 지난 아들 녀석

지나가는 황소 보고 엄마

흘러가는 도랑물 보고도 엄마, 엄마

구름 보고 엄마, 마을 보고 엄마, 엄마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찌 사람뿐이랴

저 너른 들판, 산 그리고 나무

패랭이풀, 돌, 모두가 아이를 키운다.”

시 한편이 때로는 신학 논문 한편보다 훨씬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한다. 무릇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은 사랑의 빚을 지고 산다 할 수 있다. 한 생명을 키우는 데는 온 우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상의 아픈 자, 슬픈 자, 외로운 자들을 만나 엄마 노릇을 해 줄 사람을 고대하고 있다. 특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 목사는 고대하는 눈길로 기독교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의 기독교에 희망은 있는가? 이 질문은 절실하지만 적절하지는 않다.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목사의 말을 빌어 말하자면 희망은 십자가라는 봉변逢變을 능변能變으로 바꿔 부활이라는 통通으로 바꾼 분을 믿는 이들을 통해 온다. 그들은 욕망의 집어등이 아닌 하늘빛에 매료된 사람들이다. 모두가 가족이 되는 세상, 벗들의 나라를 꿈꾸는 이들이야말로 세상에 희망이라는 산소를 공급하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잘 차려진 상을 대하듯 흐뭇하게 책을 읽으며 못내 아쉬운 대목도 있었다. 첫 번째 글인 ‘거시기하게’에 기대 말해본다. 좋은 책에 사족을 붙이는 게 좀 거시기하지만 그래도 벗된 자로서 할 말을 하는 것이 예의라 여겨 한 마디 한다. 앞으로는 ‘되어진’ 혹은 ‘되어져’와 같은 불필요한 피동형 문장 사용을 피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구어체의 긴 문장에서 주어와 술어의 호응관계를 좀 더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글쓰기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학인의 기개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할 뿐 아니라 언어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그리고 있는 길벗이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다. 부디 그의 사유가 깊어지고, 깊어진 사유만큼 삶 또한 향기로워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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