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무례한 당당함은 제발 2012년 01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무례한 당당함은 제발

 

모임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한 덕에 오랫동안 누리지 못한 고요함의 호사를 누릴 수 있겠다 싶어 근처의 카페에 들어갔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그 고요하고 느긋한 평화는 일단의 중년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순간 깨지고 말았다. 잔잔한 수면을 휘저어놓는 일진광풍처럼 그들은 그 좁은 공간을 왁자지껄한 소리로 가득 채웠다. 그들은 마치 그 자리에 자기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처신했다. 갑작스런 소란에 놀란 사람들은 눈빛으로 조금 조용히 해달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들의 당당함과 무례함은 그런 눈길조차 가볍게 무질러버렸다. 

대체 이런 무례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홀로 있을 때는 수줍고 점잖아 보이던 이들도 여럿이 모인 자리에 감정 과잉 상태에 빠지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본래 흥이 많은 민족이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문득 ‘정서적 허기’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저 지나친 명랑함 혹은 당당함은 자기 속의 상처와 그늘을 숨기기 위해 택한 무의식적 방어기제가 아닐까?

파시스트적 속도로 변하는 세상은 우리에게 정주의 안온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욕망의 매트릭스를 벗어나지 않는 한 이 숨 가쁜 질주는 끝날 수 없다. 자기 성찰과 절제가 허락되지 않는 이 인공의 낙원에서 주눅 들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다. 여러 해 전 무용극의 거장인 피나 바우쉬는 대한민국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한국을 찾아왔다. 그는 두 주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무용극을 만들었다. 그 작품에서 무용수들은 무대 위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것이 거장의 눈에 비친 한국이었다. 좋게 보면 다이내믹한 것이고, 나쁘게 보면 중심을 상실한 혼돈이다. 이런 세상에서 정서적 허기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하여 무례함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아감을 가능케 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이다. 공공의 장소에서 지나치게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들, 거침없이 애정 표현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마치 우리가 없는 사람처럼 취급받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어느 신학자는 ‘공을 사유화하는 것’이 죄라 했다.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할 것을 누군가가 독점하는 순간 세상은 잿빛으로 변한다. 이미 잿빛으로 변한 세상을 무지갯빛으로 전환시킬 이들은 누구인가?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뜻으로 수정된 사람들이다. 고요하고 당당하지만 결코 무례하지는 않은 직립의 사람들이 그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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