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세상 다시 그리기 2012년 01월 08일
작성자 김기석

세상 다시 그리기

 

모처럼 찾아온 후배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느닷없는 질문을 던진다. “범세계적인 기후 변화 문제는 인류의 존속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텐데, 우리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실내에서도 두터운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일하고 있던 내가 딱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 질문의 이면에는 당신이 그런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판단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해결할 수 없을 겁니다.” 뜻밖의 대답에 머츰한 기색을 보이는 그에게 말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기에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해야 하는 일이기에 하는 것이지요. ‘요구받은 일’을 묵묵히 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말아야 낙심하지 않을 수 있어요.”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하던 그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물었다. “문학에 관심이 많으시잖아요? 목회자들이 시나 소설을 읽어야 할 까닭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묻는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좋은 시는 우리가 긴장감 없이 대하는 일상에 내재한 아름다움이나 광휘를 포착해 명징한 언어로 표현해줘요. 그러니까 시는 세계를 읽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준다는 말이지요.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에 대한 저항이에요.” 뜨악한 눈길로 건네는 그에게 사족처럼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시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세상을 대할 수 없도록 만들어요. 권력과 자본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을 규정함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려 하지만 시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지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도 시인이었다. 칼릴 지브란은 말한다. “그는 우리 눈을 대신해 보았고 우리 귀를 대신해 들었으며 우리가 말로 못하는 말을 그는 입술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그는 손가락으로 만졌습니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세상을 해체하고, 마땅히 지향해야 할 세상의 밑그림을 다시 그렸다. 예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다른 이를 압도하는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작고 여린 것들을 보듬어 안는 따뜻함과 섬세함을 통해 열린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신앙생활은 우리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신적인 능력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조회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낮잠을 자다가 사과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세상 종말이 온 줄 알고 내달리는 토끼와 영문도 모른 채 토끼를 따라 질주하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우화가 떠오른다. 누군가는 그 질주를 멈추고 물어야 한다. ‘무슨 일이지?’ 믿는다는 것은 멈추어 서는 일이고, 질문을 제기하는 일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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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12 01-13 03:01)
귀한 깨우침을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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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린천(12 01-14 01:01)
고맙습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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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12 01-14 01:01)
멈추어서서 질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
마음에 새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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