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8 2011년 11월 30일
작성자 김기석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서,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다. 마침 유대 사람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6:3-5)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있는 산에 올라가 제자들과 함께 앉으시자 많은 사람들이 그 앞으로 나왔다. 순례의 절기인 유월절 무렵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갈 때 그들은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마음의 헛헛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야 할 일, 가야 할 길을 잃은 채 떠도는 그들을 보며 예수는 가슴이 아팠다. 남루하고 초라한 행색의 무리는 다름 아닌 자기 부모요 형제요 자매였다.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빌립을 보며 하신 그 말씀이 사뭇 가슴을 파고든다. 예수는 그들의 영적인 허기에도 반응하시지만 그들의 육적인 허기에도 반응을 하신다. 고맙지 않은가!

빌립은 난감했다. 예수의 시린 마음 모를 리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책은 없지 않은가. 그 인적이 드문 광야에서 설사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구할 수 있다 해도 그 많은 무리에게 충분하지 못할 거라는 그의 말은 이성적이다. 안드레가 빌립을 거든다. 그는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께 내밀며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최선을 다해 보아도 결국 해답은 없다는 것이다.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을 때 사람들은 흔히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발화자의 심리에 깃든 발 빼기 욕망을 읽는 것은 과민한 탓일까? 믿는 이들이라면 차마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저 허기진 무리가 내 살붙이로 느껴지는 데 어떻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저 안타까워하고 가슴을 칠뿐이지.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앉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이 앉았는데, 남자의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고,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10-11) 

예수는 사람들을 풀밭 위에 앉게 하신다. 낯익은 얼굴도 있고 낯선 얼굴도 있다. 서로의 얼굴을 보았을까? 뭐라 말은 하지 않아도 모두가 가슴에 멍이 든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서로의 추레한 모습을 보는 순간 낯섦이 빚어내는 날선 경계심은 허물어지고, 내남없는 안타까움이 그들을 하나로 엮어주고 있었을까? 고통 안에서 그들은 한 몸이었다. 예수는 빵을 들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 그리고 그것을 쪼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했다.

‘에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요?’ 하고 묻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고 엉너리를 치고 싶지 않다. 아이가 자기 먹을 것을 내놓는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들이 슬금슬금 먹을 것을 꺼내놓았다느니, 그 풀밭 위의 식사는 성찬을 상징한다느니, 출애굽 공동체가 경험했던 만나 사건을 상징한다느니, 사람들은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으며 의심을 잠재우려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설명도 찹찹하지 않다. 나는 다만 그들의 배고픔과 허기진 마음을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체화한 예수의 마음에만 주목하고 싶다. 그 마음은 ‘할 수 있을까?’를 먼저 묻지도 계산하지도 않는다. 결과를 미리 예측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주려는 마음 하나뿐이다. 그 마음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아니, 그 마음이 곧 기적이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뒤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은 부스러기를 다 모으고, 조금도 버리지 말아라.” 그래서 보리빵 다섯 덩이에서,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6:12-13)

그 기적의 식탁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배가 불렀다. 남은 부스러기가 무려 열두 광주리였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 ‘만족’에 있다. 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을 비우게 그 배를 채워준다’(虛其心, 實其腹)는 옛말이 있다. 갈릴리에 있는 오병이어의 교회를 방문했던 미당 서정주 선생은 <예수가 빵과 물고기를 몽땅 만드신 자리의 교회에서>라는 시에게 이 놀라운 사건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먹은 거나 진배 없네’가 아니라,/‘먹은 것 보다 더 뿌듯하네’인/그 비상한 마음의 요기―그 다정다한多情多恨한 요기를/인색한 자여, 어찌 하필 그대는 인증하지 못하느뇨?” 

‘그 다정다한한 요기’라는 말 속에 많은 뜻이 담겨 있지 않은가? 예수의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고도 사실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추태는 벌이지 않을 것이다. 9.11 사태가 벌어진 뒤에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무슬림들은 상당히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고, 여성들은 정체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베일을 벗었고, 남자들도 가급적이면 바깥출입을 삼갔다. 그 어려운 때 몇몇 교회가 나서서 무슬림들을 위해 장을 보아주는 봉사를 했다 한다. 종교와 이념의 차이를 넘어 ‘아픔’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 교회들은 모두가 증오에 사로잡혀 있던 그 엄혹한 시기에 ‘평화의 씨’를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묵상하는 동안 가슴 한 켠이 무지근해졌다. 오늘의 교회는 이런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찾아온 무리들을 가르치고, 해 저물면 차마 그들을 그저 보낼 수 없어 많거나 적거나 나눠 먹으려는 그 소박한 마음을 이미 부유해진 교회는 다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어머어마한 교회당을 짓고,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편하게 머물 수 있도록 온갖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에서 이 풀밭 위의 기적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15) 

사람들은 이렇게 어리석다. 예수라면 자기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려니 여겨 그를 왕으로 삼으려 한다. 왕이 바뀌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믿음처럼 허망한 것이 또 있을까?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문제는 언제는 문제로 남게 마련이다. 예수는 무리를 긍휼히 여기지만 그들이 또한 얼마나 변덕스럽고 허약한지도 아신다. 아직도 때가 오려면 멀었다. 그래서 다시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신 것이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의 제자들은 바다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갔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께서는 아직 그들이 있는 곳으로 오시지 않았다. 그런데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졌다.(6:16-18)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고 싶어하는 민중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지만 예수는 단호하게 그 바람을 무지르고 만다. 그것은 자기에게 맞는 옷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는 어느 영웅적 인물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향했지만 예수는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셨다. 예수 정신은 이 ‘혼자서’라는 말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신앙은 독립, 곧 홀로 섬이다. 홀로 섬이 허락되지 않는 ‘더불어’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홀로 있는 시간이야말로 ‘더불어 삶’을 제대로 이루기 위한 밑절미이다.

그러나 아직 정신의 독립을 이루지 못한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재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날은 저물고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사나워졌다. 그런데 이 어둠, 이 바람, 이 물결, 익숙하지 않은가? 살펴보면 그것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오는 것임이 분명하다. 삶은 그런 것이다. 예수라는 중심이 사라지면 우리 삶은 이 지경이 되고 만다.

 

제자들이 배를 저어서, 십여 리 쯤 갔을 때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예수를 배 안으로 모셔들였다.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6:19-21) 

그래도 어쩔 것인가? 삶이 제 아무리 힘겨워도 살아야지. 저 어둠을 뚫고 가야지. 제자들이 안간힘을 다 쓰고 있을 때 예수는 바다 위를 걸어서 배에 다가오셨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두려움의 뿌리는 낯섦 혹은 상대에 대한 무지이다. 담장 너머의 야수도 알고 보면 따뜻한 심성의 사람인 것이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요일4:18a) 아직 어둠의 저편에 있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의 햇살같은 말씀이 던져진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 장면에서 ‘나다’라는 말은 이중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낯선 존재가 아니다는 뜻과 아울러,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나다’라고 대답하셨던 분의 존재가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천근의 무게로 우리를 잡아끄는 인력을 거스르며 물 위를 걷으신다. ‘자아’를 여읜 사람의 자유로움이 이보다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을까?

제자들은 기꺼이 예수를 배 안으로 모셔들였다. 그러자 배는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이것을 산문처럼 읽어버리면 안 된다. 이것은 시적 언어이다. 요한은 지금 옛 시인들의 더불어 실존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신다.”(시107:30) 행선지가 어디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와 함께라면 이미 그곳에 당도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이루어야 할 목표가 우리 삶을 이끌어가게 하려는가? 지금 ‘나다’ 하시는 분을 모시는 것이 우선이다. 그분을 모시지 않는 배가 참 많다. 크고 화려하지만 세속의 풍랑에 휘둘리고 있는 교회 말이다.

 

그들은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를 만나서 말하였다.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6:25-27)

바다 건너편에 있던 무리는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배를 타신 것을 보지 못했던 그들은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라고 묻는다. 도무지 인과의 고리를 헤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부질없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곧장 핵심으로 뛰어드신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지, 뭔가 새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상만 볼 뿐(見) 본질을 꿰뚫어 보지는(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컵에 든 물은 보지만 심층수가 솟아나는 샘물은 보지 못하는 격이다.

스스로 샘이 될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않은 이들에게 예수는 준엄하게 이른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라고. 이 말은 우리의 노동을 폄하하려는 말이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하다고 하여 사람됨의 기본을 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썩을 양식을 구하는 것이든 영생의 양식을 구하는 것이든 ‘일’이라는 매개는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그 일이 지향하는 바이다. 예수님은 일을 통해 뜻을 구하는 이들은 인자가 공급하는 양식을 얻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소비주의라는 환각의 사회에 포섭된 이들에게 이 말은 낯선 말, 부질없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하다 보면 이웃을 폐기처분해 버리기 쉽다. 그것은 스스로를 비인간화시키는 일이다. 지금 당장 굶주린 이들에게 대가 없이 주는 행위야말로 영생의 양식을 구하는 일이 아닐까?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4-36)

이제 사람들은 예수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달라 한다. 예수는 당신 자신이 ‘그 빵’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자신을 인류의 먹이로 내놓으신다. 그 먹이를 제대로 먹을 때 생명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알 수 없는 헛헛함에 시달리던 무리들은 과연 예수를 배불리 먹었을까? 아니, 질문을 바꾸자. 당신에게 예수는 생명의 빵인가? 빵은 이미 주어졌는데, 씹어 삼키려는 사람이 적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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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덕(11 12-09 11:12)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는 석가모니의 일성이 귓가에 맴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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