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지금은 고수의 얼굴을 살필 때 2011년 11월 22일
작성자 김기석

지금은 고수의 얼굴을 살필 때

 

말은 겸손한데 어깨가 뻣뻣한 사람을 만나면 참 불편하다. 유대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날 느부갓네살 왕이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느닷없이 천사가 그의 머리를 살짝 쳤다. 당황한 왕은 "나는 지금 주님을 예배하려는 것인데 왜 나를 칩니까?" 하고 항의하자 천사가 대답했다. "왕관을 쓴 채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들의 마음과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누구도 '왕관'을 쓴 채 예배드릴 수는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독교인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다. 문제는 그런 고백에 부합하는 결단의 엄정함이나 자기 부정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거룩한 말은 일쑤 자기 욕망을 가리거나 치장하기 위해 동원된 수사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진단하는 목소리가 다양하게 터져 나온다. 참회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그러나 대개는 참회라는 말 속에 모든 것을 얼버무리고 만다. 참회의 몸짓조차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일 때가 많다.

덕수궁 앞을 지나가는데 외국인들이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고 상기된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때 수문장 교대식을 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얼마 후 돌담길 저편에서 조선시대 무사 복장을 한 사람들이 열 지어 걸어왔다. 낙엽을 밟으며 느긋한 발걸음이 어느새 빨라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수가 두드리는 북소리에 발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몸이 북소리에 반응을 한 것이다. 북소리의 마력이다. 문득 "모든 사람이 열 지어 걸어가고 있을 때 홀로 다른 길로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라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우리는 어느 북소리에 맞춰 걷고 있는가? 풍요의 환상을 심어주며 경쟁과 효율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는 자본의 북소리인가? 아니면 섬김과 나눔과 돌봄이야말로 평화로운 세상의 초석이라고 말하는 주님의 북소리인가? 입술의 고백을 삶으로 부정하는 이들 때문에 교회는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조롱을 받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고수의 얼굴을 다시 살펴야 할 때이다. 길 잃은 혹은 지친 동료를 외면한 채 홀로 내달려 얻는 승리는 사실은 패배이다. 스스로를 비인간의 자리에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세상, 모든 사람이 우정을 나누며 사는 벗들의 나라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현실의 어둠 속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그 방향으로 검질기게 발걸음을 옮기는 '바보'들을 통해 온다. 종말론적인 희망에 사로잡혀 우줄우줄 그 길로 가는 사람들은 예기치 않은 기쁨과 자유를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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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린천(11 11-27 09:11)
예민하게 귀를 세우고 흔들리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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