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2011년 11월 13일
작성자 김기석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귀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손석춘 선생님,

그간도 평안하셨는지요?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 어느덧 한해의 끝자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맘 때가 되면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내실이 부족한 탓일 겁니다. 오늘도 저를 찾아왔던 젊은이들이 ‘목사님의 꿈은 뭡니까?’ 하고 물어 당황스러웠습니다. 제가 젊은이들에게 묻던 질문을 되돌려 받고 보니 뚜렷이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원론적인 대답으로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만, 학생들이 돌아간 후 ‘나는 무엇에 절실한가?’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 몸으로 살기보다는 머리로 살아가는 일에 익숙한 사람의 한계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울가망한 심사를 달랠 겸 찾아간 찻집 창밖으로 쏟아져 내리던 노란 은행잎은 지금이 돌아가는 때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노자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모든 사물이 끊임없이 바뀌지만 저마다 제 뿌리로 돌아오는구나. 뿌리로 돌아옴을 일컬어 고요함이라 하고, 고요함을 일컬어 제 운명으로 돌아감이라 하고, 제 운명으로 돌아감을 일컬어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일컬어 밝음이라 한다”(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靜曰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뜻을 깊이 새길 능력은 제게 없지만 자꾸만 되뇌고 또 되뇌고 나니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어쩌면 제 삶이 부박함을 면치 못하는 까닭은 삶의 뿌리로 돌아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고, 지천명을 맞은 지 벌써 오래이면서도 여전히 우죽거리며 사는 것은 고요함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다”(요8:14)고 하셨던 예수님이 새삼 부러워지는 요즘입니다. 지향 없는 실존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호메로스가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향인 이타카를 향해 가던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은 여러 가지 난관에 직면하게 됩니다. 무시무시한 바람이 불어와 아흐레 동안 바다 위를 떠밀려 다니던 그들은 마침내 열흘째 되던 날 뭍에 닿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로토파고이족의 나라였습니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그곳에서 물을 깃고, 배 옆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기력을 되찾은 부하들을 보내면서 그 땅에 사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오라고 명했습니다. 로토파고이족은 그 낯선 사람들을 경계하기는커녕 그들에게 로토스 열매를 주었습니다. 정찰대원들 가운데 꿀처럼 달콤한 로토스를 먹은 사람은 동료들에게 소식을 전해주거나 귀향하려고 하기는커녕, 로토파고이족 가운데 머물고 싶어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울고불고하는 부하들을 억지로 배로 데려가서는 노젓는 자리 밑에 끌고가서 묶어놓았습니다. 그런 후에는 아무도 로토스를 먹고 귀향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전우들에게 급히 서둘러 배에 오르라고 명령했습니다.(오디세이아 9권 80행 이후)   

어쩌면 우리도 로토스 열매를 먹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로토스, 쾌락과 소비라는 로토스에 취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잊고 사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는 우리 눈길을 끄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이게 아닌 데, 이게 아닌 데!’ 하면서도 여전히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일상에 안주하여 떠나지 못함은 정신적 쇠락의 징조이고, 그것은 또한 불신앙의 표지임을 잘 알면서도 선뜻 새로운 삶을 향해 달려가지 못합니다. 울고불고 하는 부하들을 강제로 끌고 가 배 밑에 묶어 두었던 오디세우스적인 존재가 그립기도 합니다. 부질없는 생각이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큰 낭비

퇴행 조짐을 보이고 있는 역사의 흐름을 되돌려놓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이들은 오늘도 거리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습니다. 한미 FTA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한창입니다. 그리스의 재정 위기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고, 이탈리아 총리가 사임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지구촌이 들끓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만들어놓은 살풍경입니다. 그런 반면 신선한 소식도 들려옵니다. 박원순 서울 시장의 파격적이고 소탈한 행보에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지하철 역 화장실에서 사망한 무연고 노숙자의 주검이 안치된 곳을 찾아갔다고 하더군요. 그는 동행한 이들에게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이니 누군가는 친구가 되어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했답니다. 당연한 말인데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웠습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길을 떠났으면서도 ‘그 길’에서 저만치 비껴난 채 살고 있는 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바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만난 사람을 외면한 채 지나친 그 제사장이고 그 레위인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큰 낭비는 사람을 아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지향하는 바가 아주 다르다면 할 수 없지만, 비슷한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공통점보다 차이점을 먼저 보고 그 때문에 서로 비난하고 미워하고 갈라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습니다. 사실 지향이 다르다고 해도 인류의 일원이라는 공통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에 발끈하는 이들을 만납니다. 돈이든 쌀이든 전쟁 무기로 변하고 말 텐데 도와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분들의 양보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래도 영유아들을 굶주리게 버려둘 수는 없지 않냐고 물어도 그분들의 사박스런 마음은 풀리질 않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에 새겨진 증오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으로도 지울 수 없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지금처럼 지속된다면 세상은 전쟁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한 마디로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제도라고 하지요? 자본주의 체제는 끊임없이 행복의 환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행복은 신기루 혹은 ‘연기(延期)된 행복’일 뿐입니다. ‘연기된 행복’은 유명인사들에 의해 ‘연기(演技)된 행복’이고, 연기만 남기고 사라지는 ‘연기(煙氣)된 행복’입니다. 행복의 신기루를 향해 내달리는 동안은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합니다. 목표와 자기 현실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에 몰두하느라 이웃에게 다가설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해 전 학교에 재직할 때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보내온 편지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대학입시라는 소실점을 향해 앞만 보고 내달리다가 문득 허전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니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황무지에 서기 위해 내달린 것인가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아마 이런 느낌은 그 학생만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웃이 배제된 행복과 안녕은 죄입니다. 과격한 말 같지만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그의 집 문간에서 가련한 생존을 이어가는 나사로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반면 나사로는 헌데 투성이 몸으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개들까지도 그를 불쌍히 여겨 헌데를 핥아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보편적 운명인 죽음이 다가오자 그들의 처지는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했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만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대체 그 부자의 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던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그게 아닐 겁니다. 부자의 죄, 그것은 ‘잘 먹고 잘 산 죄’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집 문간에 있는 나사로를 돌보지 않은 것이 그의 죄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급진적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까닭은 부자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부유함이 빚어내는 둔감함 때문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보면 함께 아파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우리에게서 그 마음을 앗아갑니다. 그 마음을 빼앗긴 이들이 좀비처럼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지옥입니다. 


성령이 임한 곳

손석춘 선생님,       

미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월 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시위는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의 실상을 알아차린 결과라도 해도 될까요? 그들이 내세운 ‘99:1’이라는 구호는 매우 상징적입니다. 시위대는 성경에 나오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를 절묘하게 비틀고 있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에 두고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진력하는 목자의 모습은 언제 생각해 보아도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세계는 소수의 사람들의 부와 행복을 위해 다수의 사람들을 불행으로 내모는 전도된 세상입니다. 이 뒤집힌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나선 사람들은 어쩌면 이탈리아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주장했던 ‘시민사회의 진지전’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한국 지성계를 온통 사로잡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이 뉴욕의 시위대를 향해 한 연설문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지금과 같은 풍요로움이 무한히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백일몽을 꾸고 있는 것인 반면, 시위에 나선 이들은 점점 악몽이 되고 있는 꿈에서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1%에 속한 사람들의 논법을 지적합니다. 

“만일 당신이 부자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약간 올리고 싶다고 해 보자.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경쟁력을 잃는다고 주장하면서, 만일 당신이 의료 체제를 갖추기 위해 돈이 좀더 필요하다고 해 보자. 그들은 ‘전체주의 국가가 되자는 말이야.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곧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도 당장의 의료 혜택을 위해서는 약간의 추가 지출도 허용되지 않는 세상, 이런 세상은 무언가 잘못된 곳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높은 수준’의 생활을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수준의 생활을 원하는 것이다.” 

그의 연설문을 읽다가 제가 소스라쳐 놀란 것은 다음 대목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로 연결된 곳이야말로 성령이 임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세계적인 인문학자의 입을 통해 듣는 설교에 저는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성령의 제3시대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일까요? 좋은 세상, 모두가 존중받고 사는 세상의 꿈이 바야흐로 영글어가고 있습니다. 혼자 꾸는 꿈은 허망하게 스러지기 쉽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역사 변혁의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시대에나 꿈쟁이들은 불온하게 취급되었습니다. 그들은 기존 질서에 틈을 내고 그 기초를 뒤흔드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바보들

손석춘 선생님,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있는 때가 마침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떠난 날을 앞두고 있는 날입니다. 벌써 41년이 되었네요. 어떤 부름 때문이었을 겁니다. 책장 한켠에 꽂혀 있는 <전태일 평전>을 뽑아 들고 뒤뜰로 나갔습니다. 이곳저곳 책을 뒤적이며 그의 숨결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똑똑한 인간, 약은 인간되기를 거부하고 바보가 되기로 작정했다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는 근로조건 개선을 목표로 하는 재단사 모임의 이름을 ‘바보회’라고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당당하게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계 취급을 받으며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찍소리 한번 못하고 살아왔으니 바보가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을 깨닫고 스스로를 ‘바보’라고 말하는 이들은 더 이상 바보일 수 없습니다. 그는 나이 든 선배 재단사들을 찾아다니며 협조해 달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냉랭했습니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뭘 안다고 너희가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이려 하느냐”면서 노동운동을 한다고 설치는 놈은 ‘바보’라 했습니다. 그런 장벽에 부딪혀 기가 죽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태일은 그렇다면 능동적으로 바보가 되기로 작정합니다. 

그 바보의 맥을 이은 것이 한진중공업의 김진숙 위원이 아닌가 싶습니다. 35미터 크레인에 오른 지 309일만에 그는 환한 미소와 더불어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저는 그의 미소를 바라보며 허공에 거처를 마련하기까지 그가 겪어야 했던 내면적 갈등과 분노가 떠올랐고, 너무나 지친 나머지 악마의 미소를 보았다고 말했던 그 위기가 떠올랐고, 희망버스를 보며 의지의 등뼈를 곧추 세웠던 날들을 떠올렸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바보입니다. 바보이기에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고, 바보이기에 그는 절망의 땅에 희망을 심을 수 있었습니다.  

윤똑똑이가 넘치는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능동적으로 바보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예수보다 더 큰 바보가 또 있을까요? 기득권자들의 폭력과 위선과 허약함을 폭로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폭력과 점령으로 유지되는 로마 제국의 평화가 가짜임을 드러내고, 거룩한 지향을 잃어버린 성전 체제는 무너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의 말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일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안전지대를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하기 싫어하는 성향을 일러 ‘아크라시아akrasia’라 했습니다. 아크라시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천을 위한 지혜인 ‘프로네시스phronesis’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프로네시스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장에 설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를 비롯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처럼 무력하게 된 것은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야 할 아픔의 자리에 서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는 안전지대에 머물며 종교를 유물로 만들고 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민다”(마23:29)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십자가는 지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길이라고 말하면서도 예수가 앞서 걸으신 길을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진리라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을 기준 삼아 우리 마음을 조율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팔아 부유해진 교회는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칼릴 지브란은 <사람의 아들 예수>에서 베드로의 입을 빌려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느 날 해질 무렵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 마을에 가셨다. 다 지쳤고 길의 먼지를 뿌옇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일행은 어느 동산 한복판에 있는 큰 집으로 갔는데, 주인이 대문 곁에 서있었다. 예수님이 그를 보고 말했다. “이 사람들은 지쳤고 발도 부르텄습니다. 그들을 좀 재워주십시오. 밤은 차고 저들은 따뜻하게 쉬어야 합니다.” 부자는 싸늘하게 거절했다. 예수는 다시 부탁했다. “그러시면 이 동산에서라도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부자는 그 부탁도 거절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며 말씀하셨다. “이것이 너희의 내일의 모양이요, 이 현재가 너희의 미래와 같을 것이다. 모든 문이 너희를 향해 닫힐 것이요. 별 아래 있는 동산조차 너희 침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견디고 걸을 수 있거든 나를 따라오너라. 혹시 세숫대야와 침대를 만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밥과 포도주도. 그렇지만 그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해도 너희는 나의 사막 중의 하나를 겨우 건넌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자, 더 나가보자.”   

예수는 우리를 모든 문이 닫히고, 동산조차 우리 침대가 될 수 없는 고단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걷지 않습니다. 이미 부자가 되었거나 부자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기독교’ 할 때 ‘기독’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가차(假借)한 한자어입니다. 그런데 ‘기독’이라는 그 글자 자체에 이미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여실히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기基’는 ‘터전, 토대’를 뜻하는 말이고, ‘독督’은 ‘살피다’는 뜻도 있지만 ‘가운데’라는 뜻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독’을 등골로 새기기도 하더군요. <장자>에는 ‘그 등골로 올을 삼으라’(緣督以爲經)는 말이 나옵니다. 중용 식으로 말하자면 '중심을 붙잡으라'는 말이 되겠지요.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 곧 ‘기독’은 모름지기 우리가 토대와 등골로 삼아야 할 분이라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예수를 무서워합니다. 그분이 부르는 삶에 응답할 용기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김지하는 70년 대 초반에 이미 교회가 예수를 침묵시키기 위해 그의 머리에 금관을 씌우고는 저 높은 곳으로 추방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가 경배의 대상일 때는 덜 불편하지만, 그가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신 것은 받아들이기 버거워합니다. 예수를 입 맞추어 배반하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문관만은 아닙니다.      


피를 주소서

사람들은 예수의 피가 우리를 구속한다고 말합니다. 교회 바깥의 사람들에게 이 말은 비합리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과도 연관되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말을 해석 없이 문자 그대로 믿어버리는 태도입니다. 예수의 피에 무슨 마술적 능력이 있어서 우리 죄를 없이 하는 것은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성자의 유물이나 유골에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병이 낫거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중세기라면 모를까 이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적인 태만함이거나 자기의 죄와 심층적으로 대면하지 않으려는 영적 회피일 뿐입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피로 고쳐날 때뿐입니다. 예수의 피가 내 속에 흘러 내가 예수적 존재로 거듭날 때 비로소 우리는 새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 씀이나 행동이 예수와 무관한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에 대한 찬양은 넘치지만 예수의 심정에 사로잡힌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에 부족한 것은 돈도 아니고 영성 훈련도 아니고 사회봉사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예수의 피가 부족합니다. 저는 이 척박한 한반도에서 살다 간 영혼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으로 시무언 이용도 목사를 꼽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30년 남짓 이 땅에 머물다 간 그가 남긴 글은 그가 어디에 접속하고 살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는 1930년대의 조선교회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립니다. <눈물을 주소서>라는 시는 읽고 또 읽어도 좋습니다. 오늘은 그 시의 2연에 나오는 ‘피를 주소서’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눈물도 말랐거니와 피는 더욱 말랐습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빈혈 병자가 되었습니다. 피가 없을 때는 기운이 없고, 맥없고, 힘없고, 담력 없고, 의분 없고, 화기 없고 생기가 없습니다. 그 대신 노랗고, 겁 많고, 쓸쓸하고,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주사해 주소서. 그래서 우리는 새 기운을 얻고 화기와 생기 있고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우리는 죄에게 잡히어 죽어 가되, 그 죄가 더불어 싸울만한 피가 없습니다.

  악마가 우리 인간을 유린하되, 그것을 분히 여기는 피가 없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당신의 피를 주사해 주옵소서. 그래서 죄악과 더불어 싸우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혼이 원수 마귀를 격파하게 하여 주옵소서. 피가 있게 하소서. 피가 없으면 죽은 사람-우리에게는 피가 없어요. 주여, 우리는 기이 죽게 되었나이다.

  당신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써 우리에게 주사해 주옵소서.”

이 피가 없어 한국교회는 빈혈 병자가 되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고, 아픔의 현실에 반응하지 않고,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는 일에 게으릅니다. 예수의 피가 없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책임의 일단을 져야 할 목사가 쓰는 참회록이거니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칼릴 지브란이 말한 그 부자 동산 주인은 어쩌면 이 땅의 중대형교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몇몇 지인들과 만나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공신력을 되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외부자들이 보기에 교회는 '불투명한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공감했습니다. 교회를 거의 사유화하다시피 하고 있는 목사들은 교회 운영이나 재정 문제가 투명하게 공개되는 것을 꺼립니다. 공공의 것을 마치 사금고처럼 사용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평화로운 세상의 초석

손 선생님,

선생님은 세금을 내지 않는 교회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재정의 10%만 내도 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제가 알기에 이미 그 이상의 실천을 하는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만, 자립이 가능한 교회 일반이 여기에 동참한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몇 해 전부터 교인들과 더불어 '일인 일 구좌 갖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의 후원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운동의 현장에 나설 수 없다면 소극적으로나마 그런 대의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이들과 연대한다는 뜻에서 후원자가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후원하는 단체 가운데는 이데올로기의 문제 때문에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또 걷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 단체도 있고, 환경단체도 있고, 사회복지단체도 있고, 이주노동자들을 돌보는 단체도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의 80%가 엔지오 후원자가 되면 이것을 한국교회에 보고하고 동참을 촉구하겠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아직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교인들에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조금 더 신앙적으로 설명해주기 위해 제가 동원하는 단어는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예수를 전하지는 않더라도 생명과 평화를 만들기 위한 일에 동참하는 것은 넓은 의미의 선교라고 설명하는 것이지요. 저를 신뢰하고 따라주는 교인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교인들의 헌신과 아울러 교회 재정도 가급적이면 다양한 곳에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함세웅 신부님은 "인간의 욕심에 제동을 거는 하나님의 장치이며 공동체의 약속인 십일조가 오늘날에는 한낱 종교적 의식과 의무, 그리고 과장된 헌금의 방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말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시인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기에 낙심하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교회를 모색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언급하셨던 진보대통합 정당의 정책 대안 20가지를 꼼꼼히 읽어보았습니다. 그 목표는 당장 실현되기는 어렵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명색이 목사인지라 그 대안 하나하나를 성경의 세계관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뜻있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 대안에 대해 기독교적인 응답을 하는 일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가 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예언자적 비전을 통해 이 사회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제시하는 일일 터이니 말입니다. 돈이 ‘본本이 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인간은 언제나 ‘말末’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아닙니다. 성경의 밑바탕에는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로마 등 세상의 모든 제국의 논리에 대한 저항이 깔려 있습니다. ‘힘이 정의’로 인식되는 세상은 부정의한 세상입니다. 예수는 힘에 의한 지배를 거절하고 섬김과 나눔과 돌봄이야말로 평화로운 세계의 초석임을 누누이 밝히셨습니다. 


오래된 미래

손석춘 선생님,

이제 우리들의 긴 대화를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느낀 것은 어떤 경우에도 지레 포기하거나 절망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악의를 가지고 사는 이들도 있지만 선한 뜻을 품고 사는 이들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못 생긴 사람은 얼굴만 봐도 즐겁다는 말이 있지요? 내가 고심하고 있는 그 일을 풀어내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여기저기 있다는 사실처럼 힘이 되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국 각지에서 김진숙을 응원하기 위해 달려갔던 희망버스는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 차를 탔던 사람들의 가슴에 핀 꽃입니다. 

선생님은 또한 신앙이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어야 함을 준엄하게 일깨워주셨습니다. 편리와 소비에 중독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중독으로부터 어떻게 깨어나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지침이고, 또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는 자각입니다. 저도 이제부터는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삶을 구체적으로 사고하고 제시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자본의 지배는 약화될 것입니다.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또 절감한 것은 종교가 여전히 ‘오래된 미래’일 수 있다는 안도감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보물인지도 모르고 소홀히 다루어왔던 성경의 가르침을 선생님은 닦고 윤을 내 우리 앞에 내놓으셨습니다. 이제 성경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과의 이야기를 나눠온 지난 18개월 내내 참 행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사회비평가이면서도 온유하고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선생님의 태도에서 배운 게 많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제 마음대로 말하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우리는 ‘그 길’ 위에 함께 서있습니다. 든든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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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11-23 04:1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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