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느릿느릿 살아갈 용기 2011년 11월 13일
작성자 김기석

느릿느릿 살아갈 용기

 

괴테와 쉴러의 도시인 바이마르를 찾아가는 길은 오랜 과거와 만나는 길이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며 회의와 번민으로 생을 허비하는 것 같은 조바심이 들 때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한 대목을 떠올리곤 했다. "사람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다." 그 말은 종작없는 방황조차 따뜻하게 감싸는 품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보일 때 "지혜로워질 용기를 가지라"고 했던 쉴러의 말은 얼마나 큰 위안이었던가? 그는 천성의 무기력과 심정의 비겁함이 세워둔 방해물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서는 용기라는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상의 쳇바퀴를 굴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성에 젖어들 때마다 그 말은 혼곤한 의식을 일깨우는 장군죽비가 되곤 했다.  

하지만 괴테와 쉴러의 숨결을 만나리라는 기대와 상념은 이내 긴장감으로 바뀌었다.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차량의 행렬 때문이었다. 그 엄청난 속도감은 사색을 허락하지 않았다. 속도와 생각은 양립하기 어렵다. 피에르 쌍소는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참된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오직 이동 통로로서의 역할만 기대할 수 있는 길이 있다 한다. 아우토반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한눈팔지 말고 빨리 지나가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 길은 멋진 숲을 보거나 새소리를 듣기 위해 멈출 수 없는 길이었다.

 괴테와 쉴러의 도시에서 보낸 반나절은 느긋했지만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길은 또다시 속도의 무게감에 압도당하는 시간이었다. 긴 여정에 지쳐 간간이 나누던 대화도 뚝 끊기자 괴테와 쉴러는 사라졌고 빨리 숙소에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해졌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은 그루네발트 숲길에 접어들자 질주하던 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 마치 만유하듯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안내자는 내 표정에 스친 의문부호를 재빨리 읽고는 그 길의 제한속도가 시속 30km라고 말했다. 숲에 살고 있는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는 일체의 차량 통행이 금지된다고도 했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들도 희미한 전조등을 켠 채 느릿느릿 그 숲을 통과하고 있었다. 돌연 뭐라 말할 수 없는 뭉클함이 복부 깊은 곳에서 치밀었다. '아, 이들은 이렇게 사회적 약속을 지키는구나!'

당연한 것이 오히려 낯설 게 느껴진 것은 반칙이 일상화된 곳에서 너무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홀로 감동하고 있던 그 때 어둑어둑한 숲길을 천천히 걷고 있는 붉은 여우 한 마리를 보았다. 몽환적 광경이었다. 그 여우는 마치 평화는 속도를 줄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모두가 속도에 취해 날뛰는 세상에서 '지혜로워질 용기'를 가지고 느릿느릿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

 

목록편집삭제

정병철(11 11-23 03:11)
감사합니다.
삭제
김현민(11 11-30 02:11)
목사님, 감사합니다 많이 감사드립니다.
삭제
자작나무(13 12-08 10:12)
느릿느릿 가는 열차를 타고 여행길에 나서고 싶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