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길들여짐에 저항하라 2011년 10월 30일
작성자 김기석

길들여짐에 저항하라

 

노트에 ‘길들다’라고 써놓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아련한 슬픔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그 단어가 환기시키는 삶의 부박함 때문일 것이다. ‘물건에 손질을 잘하여 윤기가 나다’, ‘짐승을 잘 가르쳐서 부리기가 좋게 되다’라는 뜻의 이 단어를 삶에 대입해본다. 길든다는 것 혹은 길들여진다는 것은 무심코 천관녀의 집으로 향하던 김유신의 말처럼 늘 다니던 길로 가려는 마음의 습속인지도 모르겠다. 길들여짐은 편안함을 제공하지만 대신 낯선 것, 새로운 것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관습이나 제도는 길들여짐이 사회화된 것이다. 그것은 시간 여행자인 인간의 가슴에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일탈에의 욕망을 차단하는 사회적 울타리이다. 우리 삶이 나름의 지향과 지속성을 갖는 것은 그런 울타리 덕분이다. 하지만 제도나 관습이 그 안에 머무는 이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규제하고 가두려 한다면 문제다. 안식일 법은 생명을 살리고 삶의 근본을 돌아보라고 주어진 것이지만, 그것이 제도로 굳어졌을 때는 오히려 삶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 박제화된 제도를 깨뜨리는 폭탄이었다.

 

제도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길들여진 줄도 모르고 자기에게 익숙한 방식대로 살아간다. 기존질서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는다. 제도가 지배하는 세계는 당연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의 세계를 낯설게 보는 이들은 있게 마련이다. 제도의 폭압을 직시하며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다. 요즘 새삼스럽게 주목받고 있는 로자 파크스는 인종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자리를 비우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그 작은 행동이 미국의 인종 차별 철폐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히브리 여인들이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라는 바로의 지엄한 명령을 거부했다. 차마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의 명령보다는 자기 가슴에 심겨진 양심의 법을 따랐던 것이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제도로 변해버린 중세 교회를 향해 ‘아니오’라고 말했다. 권력이 그를 향해 지금까지의 모든 발언을 취소하라 했을 때 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보름스 의회에서 한 그의 말은 살아있는 혼의 울부짖음이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하는 것은 위험하며,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교회를 향한 세상의 시선이 사뭇 따갑다.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굳어진 제도로서의 종교 말고 예수의 그 뜨거운 마음에 접속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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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민(11 11-03 01:11)
삶이 마음에 들지 않을때 읽고 죄송하여 글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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