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종교, 온 인류의 자산 2011년 10월 19일
작성자 김기석

종교, 온 인류의 자산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신앙인들의 여러 가지 관습과 테마를 상실함으로써, 세속 사회는 불공평하게도 너무 빈곤해지고 말았다.”(15쪽)

“신앙의 지혜는 온 인류의 것이며, 심지어 우리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사람의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것의 가장 큰 적들이라도 이를 선별적으로나마 다시 흡수해야 할 것이다. 종교는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이고, 지적이기 때문에 신앙인들만의 전유물로 남겨두기에는 너무 귀중한 것이다.”(329쪽)


종교는 고도의 소비사회로 전환한 오늘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타당성을 가질 것인가? 종교성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고 있지만 제도로서의 종교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프랑스에서는 종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지식인의 수치로 여긴다 한다. 그들은 이성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자신을 지탱할 내적 근거를 갖지 못한 허약한 사람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가 빚어낸 폭력과 분쟁에 대한 기억이 그들의 DNA 속에 새겨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정은 영국이나 북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라 한다. 

종교는 이제 더 이상 당연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 서방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2011년 9월 11일 사태, 자본주의 세계의 상징인 무역 센터 빌딩에 최첨단의 기술력의 상징인 비행기가 부딪혀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폭력은 그처럼 원초적이다. 그 사건은 지금의 세계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가를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학계에서 탈식민주의 담론이 유행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9.11 이후, 삶의 덧없음을 실감한 이들 가운데는 종교에 귀의함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차라리 종교가 없었더라면 세상이 더 평화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제도 종교를 떠난 이들도 있다. 아랍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스민 혁명은 엉뚱하게도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로 번지고 있다.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죽음을 낳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급진적 무신론자들이 과학의 이름으로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제도 종교를 조롱하는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 없다. 종교적 담론과 과학적 담론은 언어나 논리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똑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해도 그 함의는 다르게 마련이다. 한편에서는 신은 없다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은 있다 한다. 종교에 관한 한 논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없다. 그러면 결론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돌아서서 각자의 길을 가야 하는가? 아니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일까?  


종교, 인류의 공동 자산 

스위스 취리히 태생의 빼어난 에세이스트인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는 바로 그런 지점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문학, 철학, 역사를 아우르며 현대적 일상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글로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그는 한국에서도 많은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다. 사람들은 왜 이 젊은 유대계 작가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일상의 미세한 숨결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시선, 재빠르게 사유를 전환시키는 발랄함, 묵직한 주제에 짓눌리지 않는 견고함 등이 범상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세속적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공공연하게 밝힌다. 그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나의 확신만큼은 일생 동안 결코 흔들린 적이 없었다”(14)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종교에 관한 글을 쓰는 까닭은 무엇일까? “신앙인들의 여러 가지 관습과 테마를 상실함으로써, 세속 사회는 불공평하게도 너무 빈곤해지고 말았”(15)기 때문이다.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종교가 우리 삶을 밝히기 위해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종교가 두 가지 필요성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첫째는 “몸속에 깊이 뿌리박힌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필요성”이다. 둘째는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끔찍스러운 고통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다.(13)

확신에 찬 무신론자인 알랭 드 보통은 종교는 특정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본래 인류의 소유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종교의 외피를 입고 전해진 그 유산에서 소중한 가치들을 가려내 활용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짐 월리스는 <신의 정치>에서 “우파는 종교를 오도하고 좌파는 종교를 아예 내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알랭 드 보통은 좌파와 우파의 틈새를 파고든다. 그에게 종교는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해 소중한 보물이 묻힌 밭인 것이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알랭 드 보통은 아홉 가지의 보물을 호명하고 있다.


더불어 사는 길

그가 맨 먼저 언급하는 것은 ‘공동체 정신’이다. 유목적 삶이 일상이 된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익명의 개체가 되어 세상을 떠돈다. 가장 가까운 이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할 때가 많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외로움이라는 질병에 시달린다. 하지만 종교는 나이, 인종, 직업, 학력, 소득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특정한 가치에 대한 헌신을 공유함으로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공동체는 ‘너’의 세계와 만나게 함으로써 우리 인간성을 확장하도록 돕는다. 낯선 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음을 통해 관용과 배려의 삶을 배우게 되고, 의례에 동참함으로써 자기의 어리석음과 일탈 행위를 고백할 수 있도록 해준다.

보통이 주목하는 종교의 유용함은 ‘친절’을 가르치는 것이다. 세속적인 세상에 사는 이들은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는 듯한 도덕주의에 혐오감을 느낀다. 문제는 그로 인해 공공의 영역에서 도덕에 관해 논의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무례함과 증오와 굴욕주기 등이 일상이 되고 말았다. 아무도 우리에게 바르게 살라고 충고하지 않는 세계는 성숙한 세계라기보다는 위험한 세계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보편적 죄악성을 지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고, 또 삶의 모범을 제시하는 종교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매우 유용하다 할 수 있다. 

저자는 종교 교육에도 주목한다. 매슈 아널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고취시키고, 인간의 혼란을 제거하고, 인간의 불행을 감소시키려는 열망을 불어넣는 것이 문화 교육의 목표라 한다(112). 교양을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으로 규정한 이들도 있지만 교육은 참 사람됨을 목표로 한다. 오늘의 교육은 전문가를 만드는 데 집중할 뿐 전체와의 관련성을 보도록 견인하지 못하고 있다. 인문학자들은 또한 앎을 삶으로 번역하도록 사람들을 인도하지 못한다.  저자는 인문학 강사들을 아프리카계 미국인 오순절 교파 설교자에게 보내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다고까지 말한다(143). 저자는 종교가 만들어놓은 정교한 달력과 일과표, 그리고 그에 따른 반복적인 의례가 갖는 교육적인 중요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

‘자애’와 ‘비관주의’도 저자가 꼽는 종교의 유산이다. 그는 제단 앞에 꿇어 엎드리는 사람들을 주목한다. 때로 우리는 추론 능력, 용기, 경험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일을 만나기도 한다. 무력감을 경험할 때마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을 받아들여주는 온화하고 따뜻한 시선을 갈망한다. 마리아상 앞에서, 관음상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슬픔을 인정함으로 슬픔에서 벗어난다. 보통이 말하는 ‘비관주의’는 이런 상황과 관련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파스칼은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데에서 시작된다”(195)고 말했다. 우리 현실은 포부와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다. 과도한 희망이 절망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희망과 절망이 갈마드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결함이 많은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아무리 스스로를 통제하려 해도 우리는 일쑤 성적 욕구에 휩싸이고, 지위에 집착하고, 끔찍한 사고를 당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결함과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내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길이라고 말한다.

욥기를 분석하면서 ‘관점’의 문제를 다루는 대목에서는 저자가 진짜 무신론자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원의 견지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당하다’거나 ‘불합리하다’는 말을 함부로 쓸 수가 없다. “우주에는 인간이 적절하게 해석할 수 없는 비밀이 많으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결점투성이의 논리를 감히 우주에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212)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유한함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도덕적으로 모호한 비극을 좀 더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야심으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의 유산 가운데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어쩌면 ‘미술’ 작품과 ‘건축’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미술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주는 심리적 위안과 정화의 경험을 서술한다. 우리는 미술관에서 “자기보다 더 큰 무엇인가와 교제하는 듯한, 그리고 혼탁하고 불경건한 이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듯한 감정을 체득한다”(223)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곳을 돌아나오는 순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종교 미술 작품에서 신학적인 맥락을 제거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가 이젠하임의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에 그린 제단 장식화나 여러 화가들이 그렸던 ‘성모의 일곱 가지 슬픔’이라는 주제의 그림 앞에 설 때 사람들은 자아의 경계가 무너짐을 경험하게 된다. “타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약하고, 불확실하고, 결함이 많은 존재이며, 또한 우리처럼 사랑을 갈망하고 용서가 다급하게 필요한 존재임”(242-3)을 알게 해준다. 저자는 미술관이 새로운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성스러운 ‘건축’은 성사(聖事)의 진리를 상기시킨다고 말한다(268). 교회나 성당, 혹은 사원에 들어설 때 거룩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말과 생각이 그치도록 만드는 공간이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자기의 작음을 절감하고 숭고미를 경험할 수 있는 관점의 신전과, 산만해 질 수 있는 요인이 제거됨으로 자극이 최소화되고 그로 인해 정화됨을 느낄 수 있는 반성의 신전 그리고 보호하는 영들을 위한 공간인 수호신의 신전을 제안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것은 신에게 봉헌된 신전이 아니라 ‘감정과 추상적 테마를 위해서 고안된 세속 신전’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종교 ‘제도’이다. 물론 현대 사회에 제도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기업들은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직의 특성들을 다 가지고 있다. 기업들은 우리의 외적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모든 힘과 기술과 정보를 동원하지만 정작 내적 자아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세속적 실체를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해 “종교는 자칫하면 항상 작고 무작위적이고 사적인 순간으로만 남을 수 있는 일에 규모와 일관성과 사회적인 힘을 준다”(313). 우리 삶을 구성하는 정말 중요한 가치들에 대해 상기시켜주고, 그런 가치들을 마음에 새겨주는 데 전례보다 나은 것은 없다. 


도킨스와 테리 이글턴 사이

책의 말미에 가서 저자는 “종교의 초자연적인 측면에 대한 반감과 종교의 일부 사상은 물론 실천에 대한 감탄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한 사람”(317)은 자기가 처음이 아니라고 실토한다. 그는 인지의 발달에 따라 사람은 신학적 사고라는 마술동산에서 벗어나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지나 실증적 사고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던 오귀스트 콩트가 선구자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콩트는 신과 종교를 제거한 세상이 디스토피아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찰했기에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곧 인류의 종교를 제안했다. 그는 동료 시민의 행복 능력과 도덕 관념을 드높이는 것을 사명으로 사는 세속 사제직을 창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종교력과 유사한 달력을 만들어 인류의 진보에 기여한 사람들을 기념하자고도 말했다. 하지만 콩트의 기획은 실패로 끝났다. 알랭 드 보통은 그 실패 원인을 콩트가 자신의 계획을 종교라고 일컬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저자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 생각이 없다. 다만 현대인이 겪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 종교가 제시해온 해결책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답게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가 초자연적인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잊지 않는다. 

풍부한 전거를 제시하며 전개되는 저자의 논지에 공감하면서도 그가 왜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는지를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저자는 종교 현상 일반이 아닌 제도로서의 종교, 그 중에서도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불교를 다루고 있다. 신현적神顯的 종교와 성현적聖顯的 종교의 차이에도 주목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는 어딘가에 귀의하고 싶은 마음이나 거룩한 시선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나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유한함을 받아 안는 품을 그는 무엇이라 부를까?

그는 기독교가 내세에 대한 기대에 확고히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는 데(197) 이 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나 종말론은 오히려 현세의 변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류의 무신론과 거리를 두면서도 자본주의적 야만이나 폭력성에 대해 침묵하고 또 억압받는 인류와 연대하면서 역사 변혁의 주체로 우뚝 섰던 종교의 노력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가 말하는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는 유감스럽게도 십자가가 설 자리가 없다. 내가 '종교는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이라면서 신은 인간에게 주어진 희망이며 혁명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던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가인 테리 이글턴에 더 공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종교인들에게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를 일독하라고 말하고 싶다. 저자는 우리 것이지만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종교의 소중한 자산을 잘 분류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그것을 꼭 붙들고 발전시킬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풍요로운 신앙이 가능해질 것이다. 한국 교회는 초월적 차원 하나만 붙들고, 알랭 드 보통이 호명했던 그 멋지고 아름다운 종교의 자산을 대부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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