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만물의 합창에 끼어들다 2011년 10월 14일
작성자 김기석

만물의 합창에 끼어들다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어느 한가지에도 마음을 집중하지 못한다. 인생의 한 순간이라도 소홀히 하지 말자 다짐하지만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시간과 공간조차 삼켜버리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에 소스라쳐 놀랄 때,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 <개>가 떠올랐다.  

모래폭풍을 만난 것인지 흐르는 모래에 빠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개 한 마리가 목만 내놓은 채 묻혀 있다.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겠지만 기력이 쇠진되고 만 것일까. 이윽고 개는 죽음을 예감한 듯 으늑한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마치 세상과 작별하기 전 이생의 풍경을 가슴에 새기기라도 하려는 듯. 저 멀리 검푸른 하늘이 얼핏 보이지만 세상은 온통 황톳빛이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그 그림과 만났을 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 개의 눈망울 속에서 고통 받는 인류를 보았기 때문이다. 

슬그머니 다가와 우리를 확고히 사로잡아버리는 저 흐르는 모래의 정체는 무엇일까? 분주함이 빚어낸 우울과 염려가 아닐까? 분주함이 신분에 대한 상징이 되어 버린 세상은 우리에게서 공감의 능력과 경탄하는 능력을 빼앗아 갔다. 분주함을 핑계로 우리는 고통 받는 이웃들 곁을 재빨리 지나치고 만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그들을 기억에서 지우려 한다. 조금씩 붉게 물들어가는 감을 보고도 ‘너 참 아릅답구나’라고 말하지 않고, 재재거리며 풀숲을 오가는 새를 보고도 미소를 짓고 않고, 바람에 몸을 뒤채는 억새의 군무도 차창을 통해 물끄러미 바라보고 만다.

 분주함은 생을 경축하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을 앗아간다. 분주한 사람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진다. 어울림이 빚어내는 빛과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쁨의 능력이 퇴화된 자리에 남는 것은 원망과 불평이다. 멋진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 타락한 실존의 모습이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땅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이다. 주님의 세계에 초대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함께 기뻐하는 일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라고 말했다. 놀랍지 않은가?

불필요한 일은 줄이는 게 상책이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툴툴거리기 보다는 그 일을 덥석 부둥켜안는 게 지혜이다. ‘요구받았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때 그 일은 돌연 가벼워진다. 사람은 그가 응답해야 하는 요구의 술어로만 이해될 수 있다지 않던가. 산을 옮기는 믿음은 다른 게 아니다. 내가 움직이면 산도 움직인다. 이 가을날 만물의 합창에 슬며시 끼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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