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목기에 파인 비늘처럼 2011년 10월 02일
작성자 김기석

목기에 파인 비늘처럼

 

하늘이 열리던 날. 땅도 열렸다. 상서로운 건들바람이 불어오자 마치 대지가 기지개를 펴듯 푸른 움이 돋아났다. 아스라한 허공 저편에서 우련한 빛이 새어나오면서 해와 달과 별이 탄생했다.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물들이 등장하면서 물과 뭍과 대기는 생기로 충만했다.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오죽하면 생기의 주인이신 분이 ‘참 좋다’ 하셨을까. 우리도 가끔은 이런 경탄을 내뱉을 때가 있다. 지리멸렬한 일상의 자리를 떠나 무구한 자연 앞에 섰을 때, 그래서 나를 잊을 때가 바로 그때이다.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고 그들이 서로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대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할 때 온 우주가 방싯 웃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혼돈이 돌아왔다. 꿈꾸는 순수의 시대가 지나고 고단한 실존이 시작되었다. 분별하는 마음이 자리잡자 대지는 웃음을 거두었고,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깊어갔다. 의구심과 질투는 가장 가까운 이들조차도 갈라놓았다. 삶은 더 이상 축제가 아니었다. 지배에의 욕망은 폭력을 낳았고, 폭력은 전쟁으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인간이 창조한 세상에서 안식을 누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젊은 시절, 잿빛 생활에 지쳐 허덕일 때마다 ‘삶은 의미 없고 안식 없었네’라는 노래에 마음을 담곤 했다.

돌이킬 수 있을까? 과도한 욕망의 분탕질로 인해 거덜난 세상, 기후 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세상이 다시금 회복될 수 있을까? 대기와 대양의 흐름이 바뀌고 수 억 년 동안 평형을 유지해오던 생태계가 뒤틀리고 있는 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여 손을 놓고 있는 것은 불신앙이다. 흐름을 온전히 되돌릴 수는 없다 해도 그 흐름을 저지하기 위해 몸부림이라도 쳐야 한다. 유다인들은 티쿤 올람, 즉 망가진 세상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마땅한 의무라고 가르친다.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해야 하기에 할 뿐인 것이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어느 날 아내에게 작은 선물을 하면서 이런 편지를 덧붙였다 한다. “오늘 보니까 피나무로 만든 목기가 있어 들고 왔어요. 마음에 드실지. 이 목기가 겉에 수없이 파인 비늘을 통해 목기가 되었듯이 당신 또한 수많은 고통을 넘기며 한 그릇을 이루어가는 것 같아요.” 이 글을 본 뒤로는 내 서가에 놓인 작은 목기를 범상하게 대할 수 없었다. 비늘 하나하나에 담긴 장인의 수고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선택하는 삶은 비늘 하나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하늘의 저 위대한 장인은 그 비늘로 새로운 그릇을 만드시지 않을까?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렇게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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