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7 2011년 09월 27일
작성자 김기석

예수께서 누워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 가거라.”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5:6-9)

 

자리에 누워있는 그 사람의 모습을 그려본다. 아주 오랜, 갈망과 좌절 사이를 오가며 자기 삶에도 볕이 들 날이 있을 거라는 희망에 기대어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삶은 한 번도 다정한 눈빛을 보낸 적이 없었고, 그의 기대도 세월과 더불어 늙어갔을 것이다. 애옥살이에 자식만 많다고 세월과 함께 수심이 깊어가면서 어둠이 서서히 그의 영혼을 잠식하면서 분노조차 스러졌다. 완전한 수동! 그는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에게 예수가 말을 건다. “낫고 싶으냐?” 너무나 급작스러운 질문이다. 그는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불퉁거렸을 것이다. ‘아니, 보고도 묻는 거요?’ 하지만 그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자기를 물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이다. 동문서답이다. 육신의 병보다 더 깊어진 마음의 병 때문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 그의 영혼의 형편을 알 수 있다. 이 환자는 경쟁이 지배하는 비정한 세상에서 번번이 탈락하는 사람들의 초상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는 그를 향해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 가거라” 하고 말씀하신다. 그동안 주저주저 하던 성서 기자는 이 대목에서 지체 없이 다음 말을 해버린다.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많은 것이 생략된 시적인 언어의 전형을 본다. 명령과 실행 사이의 간극이 전혀 없다. 예수의 말은 창조의 어둑새벽에 울려 퍼지던 하나님의 말씀을 닮았다. 그러나 잊지 말자. 그가 나을 수 있었던 것은 신적 다바르, 즉 에너지로 가득 찬 말씀 덕분이지만,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은 이미 그의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체 무엇이 그 사람 속에 잠들어 있던 힘을 깨운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 한다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격이 될 것이다.

 

그 일로 유대 사람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신다고 해서, 그를 박해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유대 사람들은 이 말씀 때문에 더욱더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기 때문이다.(5:16-17)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안식일, 얼마나 아름다운 날인가? 하나님조차도 쉬면서 숨을 돌리신 날(출34:17)이니 말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이 ‘시간 속의 성소’라 했던 그 날이 문제가 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오랜 병에 시달리던 사람이 치유되어 새로운 삶의 문턱 앞에 서있음에 주목하지 않는다. 안식일 계명을 범했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춘다. 아, 그들이 회복된 그 사람을 붙잡고 함께 기뻐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율법을 안다 하는 자부심이 그들의 가슴을 오히려 납작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병 나은 사람이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공치사를 하지도 않았다. 참 사람은 ‘공을 이룬 후에 머물지 않는다’(功成而弗居) 하지 않던가.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이 대목을 볼 때마다 자기들이 하는 좋은 일(?)을 흥분에 찬 목소리로 선전하거나 넌지시 암시하는 이들이 떠오른다. 얼마나 긴 세월이 지나야 우리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의 깊이에 접속할 수 있을까?

안식일 계명을 어긴 장본인이 예수라는 사나이임을 알아차린 이들이 몰려와 위해를 가할 분위기 속에서도 예수는 해야 할 말을 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놀랍구나, 이 말이여! 누구는 인간의 삶을 밀어가는 힘이 ‘쾌락에의 의지’라고 말하고, 누구는 ‘권력에의 의지’라고 말하고, 누구는 ‘의미에의 의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의 삶을 밀어가는 비밀은 이것이었다. ‘아버지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이것은 삶의 매순간이 하나님의 은총이 당도하는 시간임을 아는 사람의 말이다. 말없이 그곳에 있어 시린 가슴을 덮어주는 하늘처럼 하나님은 소리도 없이 일하고 계신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되었기에 예수는 생명을 돌보고, 북돋고, 온전하게 하는 일에 헌신한 것이다.

그러나 ‘안다’ 하는 자부심에 사로잡힌 이들은 예수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읽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며 길길이 뛴다. 그 말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뜻하는 은유적 표현임을 그들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예수가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 맞갖잖게 보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편견과 무지의 안개에 가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딱한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5:19)

 

예수는 재차 그들을 일깨우려 한다. 누가 아들인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일을 따라 하려면 먼저 유심히 보아야 한다. 건성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예수는 아버지 요셉의 작업장에서 직인 수업을 받았을 것이다. 나무 다루는 법, 대패질하는 법, 끌과 대팻날을 벼리는 법, 망치질 하는 법, 돌 다루는 법…. 하늘 아버지의 일 또한 마찬가지였을 터.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의 세상 경륜을 배우면서 예수는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 부끄러움으로 돌아본다. 우리는 아버지의 일을 따라 하기는커녕 아버지의 유산만 탐내는 불초자식은 아닌지.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5:24-25)

 

갑자기 마음이 짠해진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진심을 전하시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안쓰럽다.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진정으로 진정으로’라는 말에서 그분의 심정이 느껴진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지만 할 수 없는 일도 있다. 그것은 강제로 사람의 마음을 여는 일이다.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으면 별 수 없다. 그게 문 안에 틀어박힌 이들의 운명이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 그냥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그렇게 듣기 위해서는 말하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 또 그에게 말을 주어 보내신 이에 대한 경외심이 있어야 한다. 들음에서 믿음이 나고,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문지방이다.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여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삶이 지속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실존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죽은 사람들’은 무덤에 묻힌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님의 말이 그들에게 들어갈 때 그들은 생명의 나라로 옮겨간다. 그런데 그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신앙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이다.

돌아본다. 예수의 말은 오늘 한국교회에서 경청되고 있는가? 언제든 들을 수 있기에, 삶으로 번역하려는 치열한 고투가 사라졌기에 그 말은 닳고닳은 말이 된 것은 아닌가? 주님의 말씀이 상투어처럼 들릴 때 우리는 확고히 타락의 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용히 마음 깊은 곳을 파고들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는 말씀, 우리 내면의 실상을 드러내 우리로 하여금 울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말씀과 만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긴장과 두려움으로 읽지 않고 있다면 잠시 성경을 덮자. 말씀이 그리워질 때까지. 도저히 그 말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까지.

예수의 말은 살리는 말이지만 동시에 심판하는 말이기도 하다. 똑같은 말이 양날의 칼이 되어 우리 앞에 있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심판은 다른 게 아니다. 어둠 속에 그저 머무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 두셔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도록 놓아 두셨다’(롬1:28)고 했다. 무섭지 않은가? 그냥 내버려두는 것도 심판이다. ‘그 음성을 듣는 자는 살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공허하게 하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성하라고 주신 일들, 곧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하여 준다.(5:36)

 

무슨 말을 해도 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 요한은 일찍이 '나는 이 사람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그 말에 주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표징 앞에서만 움찔 반응할 뿐 증언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말이 제 값을 잃고 떠도는 세상에서 사는 이들의 비극이다. 에덴 이후 랑그와 빠롤, 기표와 기의는 분리되었다. 하지만 참 소리조차 분별하지 못하는 어둠이 이렇게도 깊다. 말 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예수는 숨겨진 말, 귀로 들을 수 없는 말, 참 말을 들려주신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증언하여 준다." 말의 진정성은 오직 삶으로만 입증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고백한다. 말씀(言)을 이루어내는(成)것이 바로 성실한(誠) 삶이다.

마케루스 산성에 갇혀 있던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분이 바로 당신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는 당신이 있는 곳에서 벌어진 치유와 회복의 사건을 전하라고 하신다. 삶이 곧 그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오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는 까닭은 말과 삶 사이의 괴리가 누가 보아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교사와 어머니를 자처하는 교회를 향해 사람들은 '당신들을 보낸 이가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교회는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해여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생명을 얻으러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39-40)

 

토마스 머튼은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은 성경의 추상적인 서술에 정신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인격적으로 빠져 들어감(personal involvement)을 뜻한다고 말했다. 사실 빠져든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예기치 않은 곳으로 인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나름의 장치를 마련했다.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아우라를 덧씌워 침묵시키기로 한 것이다. 달콤한 말에는 밑줄을 긋고,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불편하지도 위험하지도 않게 되었다. 빚을 탕감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명령은 현실적합성이 없다며 도외시하고,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예언자들의 음성은 모른 척 외면해 버린다.

예수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것은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라면서 '그 생명이 바로 나'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성경 전체는 예수라는 꽃 한 송이를 피워내기 위해 장구한 세월에 걸쳐 형성되어 왔다. 성경이 들려주는 그 수많은 이야기들의 주름진 갈피마다 예수적 존재의 맹아가 깃들어 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어 말씀의 구현인 예수가 나타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말씀은 말씀으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그들 앞에 현전하여 변화를 요구한다면 삶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본회퍼 목사는 말씀을 바로 읽는 것은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예수께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내기 위해 힘쓸 때 그 말씀은 비로소 살아있는 말씀이 된다.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