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생명이 넘실거리는 세상 2011년 09월 27일
작성자 김기석

생명이 넘실거리는 세상

 

벌써 오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이맘때면 떠오르는 영상이 있다. 신작로 길을 타박타박 걸어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보를 풀어 마루 끝에 집어던지고는 마을 고샅길 저 너머에 있는 논으로 줄달음질치곤 했다. 닭의 벼슬 같은 맨드라미, 한들한들 바람과 희롱하는 코스모스가 핀 길을 지나, 다복솔이 정겨운 공동묘지 근처를 지나면 우리 논이었다.

밀짚모자를 쓴 지푸라기 허수아비는 늘 빙그레 웃으며 악동들을 반겨주곤 했다. 참새들의 공습에 맞서 홀로 들판을 지키다가 지친 판에 어린 친구들이 와서 반가웠던 것이다. 우리는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 날아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참새를 향해 나름의 구성진 가락을 실어 외쳤다. '훠어이 훠어이'. 사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는 참새들은 성가신 적이 아니라 친구였다. 참새와의 술래잡기가 시들해질 때면 메뚜기를 잡았다. 두 손 가득 잡고 또 잡았다. 벼를 밟는다고 지청구를 듣기도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들판을 누볐다.

추수 때가 되면 흥겨웠다. 논두렁에 주질러 앉아 놀면서도 연신 소나무 숲 쪽에 눈길을 보내곤 했다. 새참을 인 채 손에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오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번개처럼 내달려 주전자를 받아들었다. 새참이래야 고작 햇감자 삶은 것과 김치뿐이었지만 들판에서 벌어지는 식사에 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마치 한 몫 톡톡히 감당하는 일꾼이 된 것 같아 흐뭇했다. 어른들이 볏단을 지게 가득 짊어지고 집으로 나를 때면 어떻게든 거들고 싶어 안달했다.

집 마당가에는 여름내 베어둔 풀을 썩히는 두엄더미가 있었다. 가끔 풀에 섞은 가축의 배설물 냄새가 역겹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두엄 익어가는 냄새가 구수해졌다. 타작을 위해 마당을 고를 때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마당벌레를 잡는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아이들은 마당에 엎드려 벌레 구멍에 부춧잎을 집어넣고는 놈들이 물 때를 기다렸다. 그 숨 막히는 대치의 시간을 우리는 마치 제의를 집전하는 사제처럼 엄숙하게 보냈다.

추억담이 길어졌다. 저 서럽도록 청명한 하늘 탓이다. 오늘부터 세계유기농대회가 남양주에서 열린다 한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종자부터 퇴비 순환, 유통과 가공에 이르기까지 생태계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생명의 일꾼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죽임의 기운이 넘치는 세상에서 생명이 넘실거리는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거룩한 사람들이 아닌가? 이번 세계유기농대회를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새롭게 회복하는 기회로 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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