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힘내라, 팔레스타인 2011년 09월 27일
작성자 김기석

힘내라, 팔레스타인!

 

“점령! 그것은 여러 의미를 지닌 말이다. 유배! 제 땅 한 가운데서 우리는 유배를 당하고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고문! 유엔의 정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일삼아 즐기는 취미. 조국이여 차라리 진창에 빠져 버려라. 지구의 평화를 위해.” -싸하르 칼리파의 <가시선인장>중에서

 

팔레스타인의 수반인 마무드 압바스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넸다. 194번째 유엔 정회원국 지위를 공식 요청하는 문서였다. 역사적 순간이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염원이 쉽게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게 거의 분명해보이기 때문이다. 거기까지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런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연설 한 대목을 듣는 순간 마음 가득 먹구름이 몰려왔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원하지만, 팔레스타인은 평화가 없는 상태를 원한다는 게 진실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평화의 다리를 놓으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을 조롱하는 말이 아닌가? 게다가 이 말은 또 다른 폭력에의 초대가 아닌가? 그 오만한 말속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험난한 여정이 암시되어 있다. 팔레스타인이 옵서버 국가 지위를 요구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니 지켜봐야 할 일이다. 옵서버 국가 지위를 인정받아 국제기구에 동참할 수 있다면 세계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조금은 더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안타깝다. 애굽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새 땅을 찾아 떠났던 출애굽 대장정을 자기들의 정체성의 뿌리로 내세우고 있는 유대인들이 '새로운 애굽'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야훼는 바로가 지배하던 애굽 땅에서 압제를 당하던 히브리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고 역사에 개입하신 분이다. 그렇기에 무력한 자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는 야훼에 대한 반역이다. 야훼의 이름으로 야훼를 부정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갑자기 이스라엘에 세워진 분리의 장벽이 떠오른다. 몇 해 전 차를 타고 유대 광야를 지나다가 저 멀리로 마치 신기루처럼 서있는 그 장벽을 보았을 때 가슴이 먹먹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장벽은 대화의 거부요 단절의 심화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징표였다. 그 장벽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가두는 거대한 감옥이었다. 울울한 심사를 가눌 길 없어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땅에 평화를 주소서." 그리고 얼마 후 눈을 떴을 때 나는 그곳에서 거짓말 같은 광경을 만났다. 장벽의 이편과 저편을 잇는 거대한 무지개가 하늘에 떠있었다. 하지만 평화는 길을 잃었는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현실이 암담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그 상황을 견뎌내는가? 나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작가 임레 케르테스는 수용소에서 벗어나는 길은 셋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탈출이다. 하지만 성공 가능성은 거의 없다. 둘째는 자살이다. 죽으면 벗어날 수 있다. 셋째는 상상력이다. 행복했던 가정생활의 어떤 순간을 떠올리기도 하고, 벗들과 함께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던 때를 상상하면서 암울한 현실이 주는 중력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장벽에 갇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 장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다도 그리고, 열린 창문 사이로 푸른 초원과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있는 산을 그리기도 했다. 꼭대기에 닿는 사다리를 그리고 그 위를 한 걸음씩 오르고 있는 사람도 그렸다. 상상으로라도 열어젖혀야 하는 장벽. 그 기발함에 놀라면서도 가슴이 짠하다. 장벽 그림을 취재하면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던 작가가 한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물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벽을 세우는 까닭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대답은 심플했다. "우리 보고 날아보라고." 그 이야기를 읽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요절한 팔레스타인 천재 화가 아심 아부 샤크라의 화집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그의 그림에는 유난히 선인장이 많이 등장한다. 선인장은 신산스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상징한다. 선인장을 뜻하는 '사비르'는 '인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다. 척박한 환경 가운데 살아가는 선인장을 보며 사람들이 인내를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아심이 그린 선인장은 등불 같은 꽃을 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났던 이들이 귀환할 때 길을 잃지 말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런데 아심은 알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인장을 정착촌에 살고 있는 자기네의 모습으로 전유하고 있음을. 어쩌면 아심은 가슴을 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폭력과 테러가 일상이 된 그 땅에 평화가 깃들 수 있을까? 낙관도 비관도 금물이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무너진 다리를 놓으려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그들은 불화라는 탁류 위에 작은 징검돌 하나를 놓는 심정으로 일한다. 어느 날 그 징검돌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서로에게 다가간다면, 자주 만나 두런두런 자기들 속에 있는 두려움과 희망을 나눈다면, 서로의 눈에서 눈물을 볼 수 있다면 평화의 무지개는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 소망 때문에 지금도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이 많다.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불신과 단절의 언어라면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언어는 신뢰와 소통의 언어여야 한다. 신뢰는 상호성을 전제로 하지만, 어느 한편이 먼저 자기를 개방하지 않는다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다. 때로는 신뢰의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목적이 절대적인 것이라면 환난은 필연적이라 했다. 겉껍질이 두꺼워 산불이 나야 비로소 발아할 수 있다는 뱅크셔 소나무처럼 오늘의 위기와 갈등이 오히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영글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힘내라, 팔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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