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2011년 09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 가을을 맞으며

손석춘 선생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이런 인사말을 올릴 때마다 이게 과연 적절한 인사말인지 스스로 자문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수상쩍은 세월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선생님의 평안을 빌고 싶습니다. 뭔가에 조급해 하면서 먼 길을 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 호젓한 평안을 누릴 때면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누림조차 사치라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른 추석을 맞으며 한 교인이 제게 귀엣말로 그러더군요. “목사님, 이번 추석에는 휴대 전화를 아예 꺼놓고 며칠 푹 쉬세요.” 고마운 당부였지만 그러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저도 알았습니다. 저는 가끔 벗들에게 목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5분 대기조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자기 시간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이 이 땅에서 목사로 살아가는 이들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추석 연휴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잠시 가족들을 방문하는 일을 빼놓고는 아주 한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니, 이 말은 정정되어야 하겠습니다. 써야 할 원고가 많아 다른 계획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좀 억울한 생각이 들어 글을 조금씩 미루다가 습관처럼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지난 번 편지의 말미에 언급한 에릭 메택시스의 <디트리히 본회퍼>였습니다. 책을 손에 드는 순간 저의 휴식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틀 내내 그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책의 내용에 압도되었기 때문이지만 그런 느낌을 더욱 강화해 준 것은 바로 전 주에 베를린에 가서 그의 발자취를 더듬다 돌아왔기 때문일 겁니다. 이 이야기는 편지의 후반에 좀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연휴가 지나고 나니, 이제는 가을이 완연합니다. 집 앞의 벚나무 잎들 가운데도 성급하게 가을볕을 받아 노랗게 물든 녀석들도 보이고, 벌써 바닥에 떨어진 녀석들도 보입니다. 안쓰럽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왔다가 가는 게 인생이련만 우리는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지 못해 전전긍긍하며 시간 속을 바장입니다. 언젠가 잡지에서 이철수 화백의 판화 한 점을 보고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뿌리에 매달린 땅콩과 바닥에 떨어진 땅콩 몇 알을 새겨놓고는 화제(畵題)를 ‘덜 떨어진 놈’이라고 썼더군요. 덜 떨어졌다는 말이 무엇인지 확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더 많이 내려놓을 때 더 많은 자유가 우리 속에 유입된다는 사실을 이론으로는 알지만 막상 현실 속에서는 더욱 굳게 붙잡는 버릇은 언제쯤이나 되어야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낙엽을 볼 때마다 마치 나를 향해 ‘덜 떨어진 놈’ 하고 놀리는 것 같아 마음이 심란해집니다. 객쩍은 소리가 길어졌습니다. 어쩌면 현실을 직시하며 이야기하는 시간을 늦춰보려는 꼼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한국판 피에타

베를린 여정 중에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인터넷이 여의치 않은 곳이라 숙소 로비에 있었던 컴퓨터를 통해 영자신문에 접속한 후에야 듣게 된 소식이었습니다. 외국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죽음이었겠지만 저는 그 소식을 심상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숙소에 올라와 잠시 불을 꺼놓고 앉아 그를 기억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책상에 쌓여있는 신문들을 뒤적이다가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를 ‘이소선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그 호칭이 제게 낯설게 여겨졌던 것은 제가 그만큼 노동자들의 현실로부터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묘한 울림이 되어 제 의식을 사로잡았습니다. 신문은 장례식 소식을 전하면서 1970년 아들의 영정을 안고 비통해하고 있는 그의 사진을 실어놓았습니다. 너무도 익숙한 사진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 사진이 제 눈에 ‘피에타’로 보였습니다. 

다시 보아도 영락없는 피에타였습니다. 시신이 아닌 영정이지만 어머니의 비통한 마음으로 아들을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수없이 많은 피에타 그림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에서도 그 사진이 주는 것만큼 큰 슬픔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합니다. 사실 조형적으로 보면 나무랄 데 없는 걸작입니다. 아들을 무릎에 안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슬픔에 차 있지만 그 슬픔은 매우 억제되어 있어 차라리 우아해 보입니다. 축 늘어진 아들의 모습도 인간적 비참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있는 어머니와 무릎 위에 놓인 아들은 절묘한 십자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슬픔이 거룩함으로 승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당한 청년 예수와 그 어머니의 슬픔은 종교성 속에서 그렇게 표백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보다는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에 소장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더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그 작품을 ‘론다니니의 피에타’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붙잡고 있던 것인데 결국은 미완성으로 남겨진 작품입니다. 놀랍게도 그 작품에서 미켈란젤로는 전통적인 피에타 상을 해체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한 채 자꾸 흘러내리는 아들의 몸을 지탱하기 위해 어머니는 애쓰고 있습니다. 둘의 몸은 하나인 듯 보입니다. 미완성인지라 표정은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이전의 피에타와 같은 초연한 거룩함은 분명 아닌 것 같습니다. 

아들의 영정을 안고 있는 이소선 여사의 사진에서 저는 바로 그 피에타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불경하다고 말해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은 고통을 부둥켜안는 그의 너른 품을 알기 때문일 겁니다. 고통당한 사람만이 고통 받는 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저는 히브리서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읽을 때마다 전율을 느낍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히4:15) 

그런데 말입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제가 ‘이소선 어머니’라는 호칭을 접하면서 느낀 것은 두려움의 감정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그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친숙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만은 아닐 터입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고마움과 깊은 연대의 표현이 아닐까요? 이소선 여사는 제도화된 종교가 주지 못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 제자들조차 다 달아나 버린 그 현장을 지킨 것은 어머니 마리아와 여인들이었습니다. 아픔과 슬픔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모성의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픔에의 연대를 통해 그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소선 어머니’라는 말은 오늘의 종교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어라고 생각합니다.


•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 

김인국 신부님은 “우리가 교회를 아끼고 위한다면 예수님이 맡기신 이 모성이 바르고 따듯하게 구현되는지 엄격하게 관찰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깊이 공감합니다. 가장 연약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지체에게 쏠리는 모정, 그것이 교회의 마음이라는 말씀도 어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신부님은 또 “하늘과 땅 사이에 똑같이 거리를 두고는 ‘여기 아래’는 아래대로 즐기면서 ‘저기 위’는 또 위대로 확보해 놓은 그런 사람들”이 점점 교회의 중심을 차지했다는 카를로 카레토의 말을 인용하셨지요? 우리는 이처럼 본질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가리킬 것도 없는 제 모습니다. 영락없는 삯군 목자입니다. 예기되는 갈등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갖은 핑계를 다 대며 결단의 시간을 미루고 삽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이런 고백조차 허위의식임을 알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사실 두렵습니다.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의 비루함을 절감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던 젊은 날의 치기는 사라진지 이미 오래입니다. 세상의 어둠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자각이 깊어가면서 자꾸만 위축되는 게 사실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을 피해 달아나다가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했던 엘리야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역사의 어둠을 향해 온몸을 내던져 파란 불꽃을 일으키는 이들을 맥 빠지게 하는 일인 듯싶어 죄송스럽지만 제 솔직한 느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의 반대말은 불신앙이 아니라 숙명론이라고들 말합니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보다 무신론적인 태도는 없다는 뜻일 겁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믿는다는 말이나 믿는다는 확신만으로는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행동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호하게 행동하는 이들조차 절망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빛의 자녀들보다 더 지혜로워 보이는 어둠의 자녀들 때문이고, 연대의 손을 붙잡지 않는 이들의 무심함 때문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좌절할 수도 있고 패배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은 패배하실 리 없다는 믿음이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 인간의 한계 앞에서

손석춘 선생님,

선생님은 이기주의와 탐욕이야말로 이 시대의 흑암이라고, 유혹과 악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곳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또 바로 그곳이 우리의 원죄가 서식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뿐이겠습니까? 몸을 가진 인간은 너나할 것 없이 다 자기중심적입니다.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반에 활동하면서 사막 교부들의 영성을 서방 교회에 소개했던 요한네스 카시아누스(Johannes Cassianus, 361-435)는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악덕들을 여덟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폭식, 음란, 탐욕, 분노, 비애감, 나태, 허영, 교만이 그것입니다. 얼핏 보면 가톨릭 교회가 오랫동안 가르쳐왔던 일곱 가지 죄의 뿌리(칠죄종: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와 유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카시안의 가르침에서 눈여겨 볼 것은 폭식과 음란이 앞에 열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몸과 관련된 죄입니다. 그는 욕망에 굴복하기 쉬운 인간의 한계를 너무나 깊이 통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차원적인 욕구에 과도하게 사로잡힌 나머지 인생이 비루해진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자기중심적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은 그가 자기중심성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이기심과 탐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이타적 존재가 되려는 결단 속에서 구성됩니다. 사람살이의 마당은 지양과 지향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끝없이 ‘나’의 한계를 벗어나 ‘너’와의 일치를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무릇 목숨을 받은 자의 소명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의도와 지향은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종작없이 흩어질 때가 많습니다. 저는 배고픔 때문에 남의 담장을 넘는 사람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자기 뜻을 굽힌 이들을 보며 함부로 손가락질을 할 수 없습니다. 어제는 정의를 외치다가 슬그머니 불의의 편에 가담하는 이들에게 비겁한 자라는 찌지를 붙일 수 없습니다. 선 자리에서 한 걸음만 비껴나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곤두박질칠 수 있는 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을 다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렇게도 허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용되기 쉬운 말임을 잘 알면서도 저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믿지 못합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진리의 편에 설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은총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은총은 우리의 넘어짐과 벗어남조차 부둥켜안습니다.

선생님은 빚의 탕감을 주기도문의 핵심어로 보면서 그 명명백백한 메시지를 죄의 용서로 두루뭉실하게 얼버무린 이들을 향해 분노하고 계십니다. ‘빚의 탕감’을 요구하시는 주님의 뜻만 제대로 받아들여도 교회는 지금처럼 방만하게 운영될 수 없을 겁니다. 복지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퍼주기’라는 말로 왜곡하고 조롱하는 목사와 교인들을 보면 그들은 어떤 성경을 읽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1990년에 우리나라에서 개최했던 <정의․평화․창조질서의 보전 대회>는 마지막 날 최종 문서를 통해 몇 가지 신학적 확언을 채택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기 위한 세부지침을 제시했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경제체제의 기본적인 조직원리는 부와 소유의 축적이 아니라 민중에의 권한 부여와 민중의 참여이다.”

“물질주의라는 우상은 인간존재와 다른 살아 있는 피조물들과 환경에 대한 존중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견디기 힘든 채무의 짐을 벗어나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재조정 정책의 부담을 나누며 감수해야 한다.”

“교회는 인간 삶의 모든 부문이 그러하듯이 경제활동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재확인한다.”

“교회는 토지, 건물, 투자분 등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청지기직을 실천해야 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가난한 국가들의 부채를 말소하기 위해 일하는 몇몇 교회들과 운동들이 취한 ‘희년의 해’의 조치들을 지원해야 한다.”

1990년에 한국에서 벌어졌던 이 놀라운 신학적 난장에서 끌어낸 신학적 확언들에 한국교회가 창조적으로 응답했다면 교회는 새로워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일회적 행사로 치러낸 후에는 그 확언과 무관한 길을 걸어 이곳까지 이르렀습니다. 개인이건 교회건 나라건 빚의 탕감을 요구하시는 주님의 뜻을 깊이 숙고했더라면 세상은 지금보다 한결 평화로운 곳이 될 겁니다. 그것을 잘 아시기에 선생님은 ‘빚의 탕감’이라는 주제에서 떠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어둠은 개개인의 내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곳곳에 똬리 틀고 있다는 말씀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성서의 예언자들은 사회에 깃든 있는 어둠과 불의를 직시하면서 백성들에게 쇠북소리를 울려 경고하던 이들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예언자의 음성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물론 그것은 어느 시대나 예언자의 운명입니다만 우리의 경우는 훨씬 심각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무른 음식에만 익숙할 뿐,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신앙의 초보에만 머물 뿐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 위험을 사랑하라

가끔 젊은이들이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자리에 갈 때가 있습니다. 단순하고 조용한 찬양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그런 자리가 낯설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그런 찬양의 분위기에 동참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좀 화가 났습니다. 찬양을 인도하는 이가 회중들에게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몇 단어의 끝없는 반복이었습니다. 상처, 위로, 죄, 용서, 축복, 회복, 사랑…. 그 단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의 현장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은 이상할 정도로 소거되어 있었고, 예수님이 가장 깊이 사랑했던 이들과 연대하려는 다짐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자칫하면 찬양이 값싼 자기 위안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욕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젊은이들로부터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부른 것과 같은 도저한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위험을 사랑하라!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찾아야 할 무엇이다.

그대들은 어느 길을 택하겠는가?

가장 거칠고 울퉁불퉁한 오르막길!

나 역시 그 길을 택하리니, 나를 따르라!”


“복종을 배우라. 자기 자신보다 뛰어난 리듬에

복종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는다.”


“또한, 명령을 배우라.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만이

여기 이 대지 위에서 나를 대신할 수 있다.” 


하나님도 이런 마음이 아니실까요? 하나님은 실패할까봐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은 얌전한 아들보다는, 실패하더라도 시도할 줄 아는 이들을 더 사랑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불의한 현실에 분노하여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 간 거냐고 부르대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이들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연민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입니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오르막길’을 택할 용기를 가진 이들을 보고 싶습니다. 갈 길이 멀다고 징징거리지도 않고, 넘어져 무릎이 까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 가야 할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들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어떠한가?’라는 볼멘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정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 선지자의 길, 랍비의 길

손석춘 선생님,

이야기를 간동그리지 못하고 가리산지리산 마구 늘어놓고만 있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이제는 조금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올라야 할 그 ‘거칠고 울퉁불퉁한 오르막길’도 마음이 급하다 하여 한 달음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당위의 세계에 당도하기 위한 출발점은 현실 세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오늘의 교회는 값비싼 은총보다는 싸구려 은총에 더욱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생님은 그럴수록 “주기도문에 명문화해 있듯이 말 그대로 기도하는 자세로 새로운 사회를 구상하고 실현해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며 사는 저보다도 더 철저하게 말씀을 받아들이고 계신 선생님의 모습이 매우 신선했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국민 대다수인 민중이 “직접 정치하고 경영하는 즐거운 혁명”을 제안하셨습니다. 하나하나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둔중한 제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간 것은 국민의 일할 권리를 정부는 현실로 구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왜 이 당연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노동력의 재배치가 불가피함을 인정하면서도 국가는 실업자가 재취업 할 때까지 생존권을 보장하며 취업 교육과 알선까지 최종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말씀도 깊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여가의 권리라는 말도 신선했습니다. 그동안 국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인지 우리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제시하시는 비전과 대안을 보면서 영연방 유대교 최고 지도자인 조너선 색스의 재미있는 분석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사회의 재창조>라는 책에서 평화와 관련된 두 텍스트를 독자들 앞에 제시합니다. 하나는 이사야 11:6-9절이고, 다른 하나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한 어린아이가 이들을 이끌고 가리니(…)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평화의 방법’에 따라, 가난한 이교도들이 우리의 들판에서 이삭과 버려진 곡식 다발을 주워가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스승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평화를 위하여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를 돕듯 가난한 이교도를 돌봐야 하며, 병든 이스라엘 사람의 집을 방문하듯이 병든 이교도의 집을 방문해야 하며 죽은 이스라엘 사람을 매장하듯이 죽은 이교도를 매장해주어야 한다.”(364-365)

색스는 첫 번째 텍스트가 ‘고무적이고 희망적인 평화의 비전을 표현’라고 있는 반면 두 번째 텍스트는 ‘올바른 공동체 관계의 요건에 관한 무미건조한 서술’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그가 첫 번째 텍스트에 끌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사야의 비전은 매우 아름답지만 그것이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비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선지자들이 “권력 앞에서 진리를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불국의 용기로 부패한 왕과 나태한 사제에 맞섰으며, 쉼 없이 통합과 정의의 소명을 역설했”지만 실질적인 사회변혁을 가져오지는 못했다고 말합니다. 반면 랍비들은 선지자의 비전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실천적 규범과 학습 가능한 행동으로 변환시켰다고 말합니다. 랍비들은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는 동시에 그들을 선의의 목적으로 향하게 할 방법들을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랍비인 저자의 편견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경청할 여지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마땅히 선포해야 할 것을 선포하고 지향해야 할 비전을 제시하면서도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책임적 자세라 하겠습니다. 지난 편지 말미에 선생님은 세계 없는 그리스도도, 그리스도 없는 세계도 우리를 기만할 뿐이라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편의에 따라 그 둘을 별 개로 취급할 때가 많습니다. 이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일상의 거룩함’을 힘주어 말하는 저의 확신이기도 합니다.


•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앞서도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올 추석 연휴는 본회퍼의 전기를 읽는 일에 바쳤습니다. 전기를 읽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일 때문에 방문했던 베를린에서 제가 머물던 곳은 본회퍼가 소년 시절을 보냈던 그루네발트 인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누렸던 가족생활의 즐거운 기억은 아마도 암울한 시절을 견뎌내는 등불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유년 시절은 1차 세계 대전의 풍랑 속에서 형 발터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옴과 동시에 급작스럽게 끝이 났습니다. 그가 살았던 집 근처를 아침마다 산책하는 동안 그가 테겔 형무소에서 썼던  시 ‘나는 누구인가?’가 자꾸 떠올랐습니다. 

기왕 이곳에 왔으니 본회퍼의 흔적을 더듬어보자 싶어 찾아간 곳은 1935년 이후에 그의 가족들이 살던 마린부르거알레 43번지였습니다. 지금은 본회퍼 기념관 및 에큐메니칼 진영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본회퍼는 그곳에서 <윤리>의 일부를 저술했고 또 그곳에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아담한 이층 주택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서가와 장서들, 그가 사용했던 책상과 침대 그리고 즐겨 연주했던 하프시코드도 남아 있었습니다. 1칭의 세미나실 벽면에는 흑백의 패널이 걸려 있었는데, 그 패널은 나찌 치하에 유럽에서 벌어진 여러 가지 참상을 배경으로 하여 본회퍼 일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오버랩 되어 있었습니다. 패널 하나하나가 ‘그대는 어떻게 살 텐가?’ 하는 질문으로 다가왔습니다. 존재 그 자체로 우리를 실존적 물음 앞에 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회퍼가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처음으로 파견되어 일했던 시온교회는 구 동독 지역의 가난함을 보여주듯 많이 쇠락해 있었습니다. 공사 중이어서 먼지투성이인 교회 벽면에 빛바랜 본회퍼의 대형 사진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도 견신례 반을 담당하면서 가난한 악동들의 길잡이 늑대 구실을 했던 본회퍼의 숨결을 아련히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삶을 사랑했던 그가 죽음이 예견되는 길을 회피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를 쉽게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삶으로 제기한 물음에 실존적으로 응답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베를린 대학교의 신학생이었던 침머만이 본회퍼의 강의를 회상하며 들려준 이야기는 고백과 실천의 간극을 좁히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직도 교회가 필요한가? 아직도 하나님이 필요한가?’라고 자문하지만, 이 물음은 틀렸다고 했다. 본회퍼는 우리가 질문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교회도 존재하고 하나님도 존재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그러니 그분께 기꺼이 도움을 드리겠느냐?’는 질문을 받은 존재라고 했다.”(에릭 메택시스, <<디트리히 본회퍼>>, 김순현 옮김, 포이에마, 193-4쪽) 

이제는 ‘그분께 기꺼이 도움을 드리겠느냐?’는 질문에 삶으로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선생님과 대화를 거듭할수록 저 자신의 누추한 몰골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불편합니다. 하지만 고맙기도 합니다. 이렇게라도 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볕으로 벼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올해는 기어코 누렇게 익은 들판 한 복판에 들어가 잠시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들판이 주는 고요함과 넉넉함, 그리고 그 부드러운 색채 속에 잠겨들라치면 내면에 평화가 깃들고 있음을 느끼곤 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선생님과 함께 그런 들녘에 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담아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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