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라이프찌히에서 길을 묻다 2011년 09월 09일
작성자 김기석

라이프찌히에서 길을 묻다

 

분주한 일정을 쪼개어 라이프찌히를 찾은 것은 괴테나 실러,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발자취를 더듬으려던 것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음에 들어앉은 성 니콜라이 교회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흔들리고 있던 1980년대, 그곳은 평화를 갈망하는 동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 교회에 들어가 그곳에서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토론하던 이들의 숨결을 느끼고, 수많은 군중들이 집결했던 광장에 서서 그날의 함성을 새겨듣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땅 곳곳에서 공권력과 시민들이 충돌하는 현실이 없다면 그 먼 곳까지 찾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머물고 있던 베를린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도시였지만 멀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22년 전 바로 그곳에서 일어났던 비폭력적인 저항운동의 성공 사례를 눈으로 보고 또 그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앙역을 지나 상가건물이 즐비한 거리를 걸어가는데 문득 니콜라이 교회로 통하는 모든 길을 차단했던 경찰들과 시민들의 긴장된 모습을 머리에 그려졌다.

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의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성 니콜라이 교회가 서 있었다. 중세부터 상인들의 수호자로 숭앙되었던 성 니콜라이를 기념하기 위해 1165년에 세워진 이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시작되어 후기 고딕 양식이 가미되었고, 3개의 탑은 바로크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회 정문에 서는 순간 ‘모두에게 열린 교회’(Kirche offen für Alle)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독일의 많은 교회가 사용하는 문구이긴 하지만 성 니콜라이 교회이기에 이 말은 강렬하게 다가왔다. 지치고 상한 영혼, 두려움에 떠는 이들을 두 팔 벌려 환대하는 주님의 품이 절로 느껴졌다.

이 문구는 냉전 시대에 니콜라이 교회가 감당했던 역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성 니콜라이 교회는 1982년 9월부터 '칼을 쳐서 쟁기로'라는 슬로건 하에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평화 기도회를 개최했다. 이 연약한 기도의 촛불이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사실을 당시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서독의 군비경쟁이 심화되고 있던 그 때 크리스치안 퓌러(Christian Führer) 목사는 평화 기도회를 시작했다. 그 자리에는 평화를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공산주의자와 반체제인사 등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았다. ‘모두에게 열린 교회’라는 입간판은 한국에서 찾아간 내게 교회가 과연 무엇인지,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언중유골로 들려주고 있었다. 고난받는 이들의 피난처 구실을 포기한지 이미 오래인 한국 교회의 현실이 떠올라 둔중한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초대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종려나무 모양의 기둥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회중석을 지나 제단 앞에 이르렀을 때 나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을 제단 위로 초대합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충격이었다. 가장 거룩한 자리라 해서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여타의 교회와는 분명히 구별되었다. 제단 좌우측 벽면에 그려진 외저(A.F. Oeser, 1717-1799)의 성화와 예수의 수난을 주제로 삼은 펠릭스 파이퍼(Felix Pfeifer, 1871-1945)의 부조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젠체하는 내색 없이 마치 안방을 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제단에 오르기 전 회중석에서 보아 제단 우측면에 놓인 나무 십자가를 유심히 보았다. 그것은 1980년대 초반 중거리 미사일 배치에 항거하기 위해 조직된 '평화를 위한 열흘' 기도 모임을 위해 만든 것이라 한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십자가, 다만 한복판에 촛농이 흐른 자국만 남아 있는 십자가는 암울한 현실에서 빛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 십자가는 반대편 벽면에 부착된 16세기의 십자가 고상과 더불어 전통과 현대의 아름다운 대화를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전통을 계승하되 시대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창조적으로 응답할 때 교회는 비로소 살아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제단 바로 위 천장 가장 높은 곳에는 평화의 천사가 무지개를 손에 쥐고 있는 외서의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외서는 어떤 영감을 받았길래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성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 사역은 이렇게 운명적으로 예비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초를 구입해 불을 밝힌 후 회중석 한 가운데 놓인 촛대에 올려 놓느라니 저절로 경건한 기분이 들었다. 촛불을 밝히고 몇몇 사람들을 떠올리며 기도를 올렸다. 어둠이 짙었던 시기, 복음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던 크리스치안 퓌러 목사와 1989년의 시위를 목도하며 천안문 사태와 같은 유혈 참극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민중들 편에 서서 비폭력적인 저항을 이끌었던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의 세계적인 지휘자 쿠어트 마주르(Kurt Masur), 그리고 신학자 침머만(Zimmermann)박사가 그들이다. 그들은 동료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안락한 삶의 자리를 박차고 나간 참다운 의미의 지성인들이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세속적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그들이야말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증인들이었다.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기도회가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몰락이 가시화되고 있을 때, 수많은 이들이 운집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당국은 성 니콜라이 교회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어떠한 방해도 평화를 향한 갈망을 이길 수는 없었다. 치안담당자는 조직에 속한 700여 명의 사람들을 성 니콜라이 교회에 보내 미리 자리를 차지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뜻하지 않게 좌절되고 말았다. 특수한 임무를 띠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은 목사를 통해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세속사회의 가르침을 뒤집는 그 가르침은 그들의 가슴에도 어떤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필연은 언제나 우연의 옷을 입고 등장하게 마련이다.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 못하다는 바울의 말은 얼마나 적확한가.

1989년 10월 9일은 정말 역사적인 날이다. 평화와 시민의 권리 그리고 인권 신장을 요구하는 3000여 명의 군중들이 몰려들어 성 니콜라이 교회, 성 토마스 교회, 성 요한네스 교회를 가득 채웠다. 민주화의 수확기가 도래한 것이다.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평화 기도회가 열렸고, 개혁 교회에서는 한스 유르겐 지버스(Hans-Jürgen Sievers) 목사가 좋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이르는 길이 옳아야 하고 사용하는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며 비폭력을 호소했다.

성 토마스 교회는 처음으로 평화 기도회를 위해 교회를 개방했고, 몰려든 이들을 향해 리히터(Johannes Richter) 목사는 잠언 25장 8-9절("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아라")을 본문으로 삼아 인내의 용기와 격분을 거절하는 슬기를 발휘하자고 설교했다.

성 미카엘리스 교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 날 처음으로 평화 기도회를 위해 교회를 개방한 게르트 크룸프홀쯔(Gerd Krumbholz) 목사는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면서, 지금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용기의 결여와 두려움에 대한 죽음이라고 말했다.

무혈혁명은 이렇게 마련되고 있었다. 광장과 길거리에는 이미 70,000여 명의 시위대가 운집해 있었다. 그들은 유리 창 하나 깨지 않았다. 1989년 10월 9일은 비폭력 저항운동 역사에 도 하나의 이정표가 놓이는 날이 되었다.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경찰은 결국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라이프찌히 중앙 위원회의 치안 책임자였던 밀케(Mielke)는 죽기 직전에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있었으나 기도와 촛불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날의 무혈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교회 광장 곁에 세워놓은 대리석으로 만든 종려나무 기둥 조각은 어떤 경우이든 비폭력적인 저항과 평화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그 광장을 오랫동안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1723년부터 1750년까지 이 교회의 오르간 연주와 지휘를 맡았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요한 수난곡’이 들려오는 듯 했다.

‘주여, 이 땅의 영예로운 통치자여!

당신의 수난에 의해 참된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이 어느 때에도 최적의 시기에도

찬미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시옵소서’

라이프찌히 거리를 걸으며 나는 새삼스럽게 길을 묻고 있다.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 길을 걷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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