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평화가 길이다 2011년 09월 09일
작성자 김기석

평화가 길이다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데 몽환적인 표정을 짓고 앉아 있던 한 여성이 내게 물었다. “목사님, ‘그날’ 어디 계셨어요?”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어리둥절하고 있자 곁에 앉았던 분이 일깨워주었다. “9.11 때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제야 9.11 참사가 벌어진지 올해로 10년이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집에 있었을 걸요.” 싱거운 대답에 그 여성은 또다시 몽환적인 표정으로 돌아갔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그 여성에게 9월 11일은 ‘그날’이었던 것이다. 10주기라는 상징적인 날이 다가오자 ‘그날’의 공포가 환기되었던 모양이다.

21세기의 벽두에 자행된 그 사건은 인류의 가슴에 지우기 어려운 상처자국을 남겨놓았다. 참사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나 가족들 가운데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유에서 무 사이의 거리가 찰나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본 사람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드리운 심연을 보아버린 사람들의 삶이 여상할 수는 없는 일.

9.11 테러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불러왔고, 전쟁은 누구의 승리도 아닌 모두의 패배로 끝났다. 그 전쟁이 우리에게 준 교훈이 있다면 전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세계는 이전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 되었고, 평화를 향한 인류의 꿈은 이렇게 해서 또 다시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진보란 보듬어 안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란 말을 잊지 못한다. 인류의 역사의 억압이 사라지고 자유가 확대되는 과정이라 하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낯선 타자들을 이웃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로마의 평화라는 허구의 논리에 취해 지중해 세계가 숨을 죽이고 있던 그 때, 메시야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의 노래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였다. 하지만 이것은 온새미로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영광도 없다. 그렇기에 성도는 온 힘을 다하여 평화를 추구하여야 한다. 가르고, 담을 쌓고, 정죄하고, 독점하려는 마음이 있는 곳에 평화는 없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면 된다. 자비란 함께 아파하는 사랑이 아니던가. 무정한 마음이야말로 평화의 적이다. 죽임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세상에서 생명의 표징이 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숭고한 사명이다. 보드랍고 연약한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저항이다. 9.11은 인류에게 어느 길로 갈 것인가를 묻고 있다. 평화인가, 공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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