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무릎이 구부려지는 건 2011년 09월 09일
작성자 김기석

무릎이 구부러지는 건

 

오세훈 서울 시장이 기자회견을 하다가 돌아서서 눈물을 훔칠 때만 해도 그의 복잡한 심사를 헤아리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다가 그가 연단 옆으로 내려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는 순간 왈칵 짜증이 밀려왔다.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에 분주했다. 그 광경이 내 심상에 일으킨 불편한 감정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무상급식을 둘러싼 찬반 논란이야 얼마든지 좋다. 서있는 자리에 따라 세상은 달리 보이게 마련이니 말이다. 입장의 동일함이 전제되지 않는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처서가 지나며 아침저녁 바람이 서늘하다. 유난히 더위에 약한 이들도 설사 늦더위가 있다 한들 못 견디겠느냐며 여름을 이겨낸 스스로를 대견해 한다. 그러나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지인의 처서 소감은 사뭇 다르다. 그는 이제 풀의 기세가 한 풀 꺾일 때가 되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기후에 대한 느낌이 이러할진대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렇다면 오세훈 시장의 무릎 꿇음이 내게 일으킨 불편함은 서있는 자리가 피차 다르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똑같은 행위를 보면서도 그와 함께 눈시울을 붉힌 이도 있을 것이고, 혀를 차며 냉소를 날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붙든 것은 냉소도 비웃음도 아닌 불편함이었다는 게 문제다. 그건 어디에서 온 느낌일까? 차분히 톺아보기 위해 묻는다. 그는 누구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일까? 그가 무릎을 꿇고 사과하고 싶었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어느 것도 석연치 않았다. 그의 느닷없는 행동에서 핍진성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 사이엔가 과잉 주체가 된 것이다. 그의 무릎 꿇음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過猶不及)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무릎 꿇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발적인 무릎 꿇음이고, 다른 하나는 강요된 무릎 꿇음이다. 학생 시절, 선배들에게 매 맞는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무릎을 꿇으라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버티다가 더 얻어맞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한사코 무릎을 꿇지 않으려 했던 것은 그것을 주체에 대한 능멸로 여겼기 때문이다. 분쟁 지역에서 점령군들이 사람들을 무릎꿇려놓은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에 분노가 솟구쳤던 것도 그 때 느꼈던 굴욕감이 전이되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 겨울 공화국에서 살면서 저항의 기운을 주체할 수 없었던 이들은 캠퍼스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이런 노래를 불렀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 훌라

같이 죽고 같이 산다 훌라 훌라

무릎을 꿇고 사느니 보다 서서 죽기 원하노라

우리들은 정의파다”

조그마한 위협 앞에서도 무릎이 후둘거림을 느끼던 우리들이지만 ‘무릎을 꿇고 사느니 보다 서서 죽기 원하노라’라는 대목에 이르면 마음이 그렇게 비장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떤 억압에도 굴할 수 없는 인격의 핵심이 내게 있다는 일종의 자주 선언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 선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살아가면서 육신의 무릎은 꿇지 않았는지 몰라도 마음의 무릎은 수없이 꿇으며 살았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면서 우리를 길들이려는 세상을 향해, 적당히 저항의 몸짓을 해보이다가 이제는 할 만큼 했다는 자기 위안과 함께 황급히 현실에 투항할 때가 많았다. 길들여지는 것보다 더 슬픈 게 또 있을까.

하지만 자발적인 무릎 꿇음의 경우는 다르다. 옛날 선비들은 앉는 법과 공부에는 심오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을 수렴하여 의젓하고 반듯하게 앉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두 무릎을 땅에 붙이고 허리와 다리를 쭉 펴서 자세를 엄숙하게 하는 것을 ‘궤跪’라 하고, 두 무릎을 땅에 붙이고 엉덩이를 발바닥에 붙이고 앉는 것을 ‘좌坐’라 했는데, ‘좌’는 ‘위좌危坐’라고도 했다. 아마도 삼가는 마음과 태도를 가리키기 위해 ‘위’ 자를 보탰을 것이다.

옛 사람들은 부모님이나 스승이 보내신 편지나 글월을 읽을 때면 손을 씻은 후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다. 그 정성스런 마음이야말로 ‘경敬’이 아니겠는가. 앉음새만 보아도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다는 말이 결코 빈 말이 아니다.

몇 해 전 잘츠부르크에 갔을 때의 일이다. 동산 위에 있던 카푸친 수도회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다가 가파른 계단 옆에 있는 작은 예배당을 보았다. 잠시 기도를 올리고 싶어 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그런데 조금 열린 문틈으로 나는 예상치 못한 장면을 보았다. 검은 수도복을 입은 수도자가 장궤 자세로 제대 앞에 앉아 고요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경건해 보이던지, 그 고요함을 깨고 싶지 않아 조용히 문을 닫고 돌아 나왔다. 그러나 그 광경은 지금도 내 마음의 오아시스처럼 남아있다.

사람이 사람 되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을 대상을 잘 알고 살아야 한다. 예수의 힘은 그가 아버지라 불렀던 하나님께 무릎을 꿇은 데서 나온다. 한 분에게 무릎을 꿇었기에 그는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고아처럼 남겨질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 멋지지 않은가?

무릎 꿇음의 대상을 잘못 선택할 때 우리 삶은 비루해진다. 누구에게 굴욕감을 주고 또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 무릎 꿇기를 강요하는 이들은 영혼을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다. 두려움 때문에 저항조차 포기한 채 스스로 무릎을 꿇는 이들은 영혼을 도둑질 당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굴복해서도 아니고, 경외감에서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짐짓 무릎을 꿇는 이들은 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일까? 가끔 종교인들이 죄를 참회한다고 집단적으로 무릎을 꿇고 참회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진정한 무릎 꿇음이라면 카메라 앞에서 짐짓 해 보이는 것이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이래저래 불편한 마음을 뒤로 하고 반칠환 시인의 <때 1>이라는 시를 읊조려 본다. 내가 길게 말한 것을 시인은 이렇게 심플하게 말한다.

무릎이 구부러지는 건

세상의 아름다운 걸 보았을 때

굽히며 경배하라는 것이고,

세상의 올곧지 못함을 보았을 때

솟구쳐 일어나라는 뜻이다

 

때를 가리지 못함이 무릇 몇 번이던가

마치 하나님 말씀에나 접한 듯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다. 때를 가릴 줄만 알아도 철든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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