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호모 사케르 2011년 08월 16일
작성자 김기석

호모 사케르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에서 벌어진 폭동 사건이 심상치 않다. 런던 인근에서 경찰에 의해 자행된 흑인 피격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지만 그 전개 양상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몇 해 전 프랑스에서 벌어진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의 봉기와 닮은 듯하지만 차이점 또한 뚜렷하다.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대한 분노가 폭력의 형태로 표출되었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구체적인 요구사항이나 정치적 동기가 없다는 점은 구별된다. 폭동이 진정되면서 이 사태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원인은 복잡하다. 복지에 대한 지나친 의존, 긴축 정책에 대한 불만,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사회적 소외감, 인종차별주의, 소비주의, 갱스터 랩과 문화 등등. 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분석들이다.

나는 이 사태를 보면서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를 떠올렸다. 이성과 합리성으로 구조화된 세상은 질서정연하지만, 그 사회는 인간의 또 다른 측면인 열정을 터부와 금기를 통해 억압하는 사회이다.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이들이 주로 여성인 까닭은 여성들이야말로 한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축제일이 되면 디오니소스 신봉자들은 터부와 금기의 선을 가볍게 넘어선다. 광기가 사람들을 사로잡으면서 기존의 의미는 해체되고 주변적인 것들이 복권된다. 광기는 급기야 난폭한 폭력으로 변하고 세상은 원시적인 혼돈에 빠져든다.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부른다.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광기, 그들을 원시적 혼돈으로 견인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희망이 차단되었다는 절망감,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막막함이 아니었을까? 어혈처럼 생명의 자연스런 흐름을 차단하는 그 절망감과 막막함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폭력이다. 쉽게 전이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폭력은 또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할 때가 많다. 그들은 앙갚음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감벤이 말하는 소위 '호모 사케르 Homo Sacer'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거룩한 인간'이지만, 실은 그들이 희생양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주 쉽게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고 폭력의 희생자들이 되곤 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호모 사케르들이야말로 신이 가장 깊이 관심하는 이들이라고 말한다. '거룩한 삶'은 성경에서 '고아, 과부, 나그네'로 지칭되는 호모 사케르들의 인권과 살 권리를 보장하는 것과 뗄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영국에서 벌어진 저 폭동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라는 단극체제에 편입된 모든 나라에 잠재된 위협이다. 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경찰력을 강화할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들에게 미래를 돌려주는 길을 찾기 위해 진력해야 한다.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는 자기별을 떠나오기 전 아침마다 화산의 분화구를 청소하고 어린 바오밥나무의 뿌리를 뽑아냈다. 화산이 폭발하지 않도록 지키는 일과 소행성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나무의 지나친 성장을 억제하는 일은 하루도 걸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스페인 내전이 벌어졌을 때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우나무노를 찾아간다. 젊은 작가를 맞이한 노대가는 절박한 목소리로 "난 절망적이오!" 하고 외친다. 그 땅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교회를 불태우고, 붉은 깃발과 주님의 깃발을 치켜들고 있는 현실이 그를 절망으로 몰아간다는 것이었다. 이념을 두고 싸우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아무 것도 믿지 않기 때문에 싸운다면서 그들은 모두 '데스페라도'라고 말한다. '데스페라도'는 계속해서 붙들고 있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뜻한다면서 우나무노는 그들은 아무 것도 안 믿기 때문에 거친 분노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스페인 기행>, 열린책들, 204쪽) 그렇다. 세계의 현실은 텅 빈 인간, 즉 데스페라도를 양산하고 있다. 

사람들의 품이 되어주던 공동체는 무너졌고, 종교는 종교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구현해야 할 인간적 목표조차 가물거린다. 먹고 사는 문제의 덫에 걸려 존재로서의 목표를 망각하게 되는 이 시대야말로 비극의 시대이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거짓말이나 저열한 행동을 하지 않고, 열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을 일러 '신사'(gentleman)라 했던 영국 정신이 무너지고 있는 것인가? 이번 사태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답은 달라질 것이다. 영국에서 벌어진 이번 사태는 지금 세계 질서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정표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지금이야말로 돌이켜야 할 때이다. 주변부로 내몰리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소외감이나 굴욕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자기 삶을 기획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위험한 곳으로 바뀔 것이다.멀쩡한 사람들을 마치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고, 연약한 이들의 가녀린 꿈조차 삼켜버리는 난폭한 자본주의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길은 과연 있을까?

거대한 제국 애굽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향해 탈주를 감행했던 출애굽 공동체처럼 광야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애굽의 끓는 가마솥과 같은 소비주의의 매력을 끊어버린 이들이 있다. 땅속을 헤집고 다니며 흙을 비옥하게 만드는 지렁이처럼 지금 세상 도처에서 희망을 만들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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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8-20 05:08)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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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덕(11 08-21 09:08)
하나님께서 가장 관심을 가지시는 계층의 아픔과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영적
둔감함을 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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