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인문학, 교회와 사회를 매개하다 2011년 08월 13일
작성자 김기석

인문학, 교회와 사회를 매개하다

 

불안의 해독제

북유럽의 복지국가라는 노르웨이 참사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영국 런던의 북부인 토트넘에서 벌어진 폭동이 또 다른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그 사건들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한쪽에서는 과잉복지를 지향하던 사회의 예견된 몰락이라는 해석을 내놓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부자 감세에 따른 정부의 재정 감축과 그로 인한 공공 서비스의 축소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유럽에서 벌어진 사태를 어떻게든 자기들의 정파 이익에 맞게 해석하려는 의도가 엿보여 불편하다. 다양하고도 복잡한 사회 불안 요인에 기름을 부은 것은 갱스터랩이나 전자오락에 심취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무분별함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게다가 미국 발 경제 위기가 지구 전체를 긴장시키고 있고, 급격한 기후 변화가 초래하는 재해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

 

에덴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보편적 운명은 '불안'이다. 어느 시대이든 힘들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불확실성과 무의미성에 대해 순간순간 자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참 잔혹한 일이다. 한순간도 자기를 잊을 수 없는 곳이 지옥이라면 우리는 지금 지옥의 문턱에 서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절망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누구도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해답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해도 모두가 받아들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불안이 인간의 보편적 운명이라면 불안이라는 삶의 조건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삶을 구성해 나가야 한다. '불안'의 해독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의미'이다. 삶이 의미 있다고 느낄 때 사람은 존재의 충만함을 경험한다. 충만함은 결핍의 부재이기에 불안이 깃들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보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죽음의 집의 기록>>을 썼다. 그곳에서 그는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극단적인 굶주림, 굴욕감, 격절감, 두려움 등의 정서는 불편하기는 하지만 견딜 만하더라는 것이다. 유형살이의 가장 큰 고통은 단 한 순간도 홀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홀로 있음'은 '성찰적 거리'를 확보한다는 의미일 것이고, 그 성찰적 거리는 주체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이다. 주체의 소멸은 곧 의미의 소멸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참혹한 형벌은 '아주 전적으로 쓸모없고 무의미한 성격의 노동을 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의미 없음'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던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이 전해주는 이야기와 유사하다. 그에게 인간을 살게 하는 힘은 '의미에의 의지'이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말도 같은 맥락을 가리키고 있다.

 

인간다움에 대한 물음

예술과 과학과 종교는 인간의 인간됨, 즉 인간다움에 대한 물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답다'는 말은 일부 체언 밑에 붙어서, 그 체언이 지니는 성질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의 형용사를 만드는 말이다. '임금답다', '아버지답다', '목사답다'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임금, 아버지, 목사'라는 존재들에 대한 기대치를 표현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체언의 성질이나 특성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다. 인문학(liberal arts)이란 그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그 특성을 탐구하는 일체의 노력, 즉 인간에 대한 사유, 표현, 실천의 종합이다.

인문학은 인간됨의 술어인 '~다움'을 파악하기 위해 인간의 다양한 욕구에 주목한다. 인간이 이루어내는 삶의 궤적은 결국 욕구의 성취와 좌절이 빚어내는 무늬이기 때문이다. 매슬로우가 인간의 욕구를 다섯 가지(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로 구분해 놓은 것도 사실은 '인간답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예술과 철학과 종교는 인간이 자아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차원'을 지향하는 존재임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나' 세상을 넘어 '우리' 세상으로, 더 나아가 '우주'로 사유의 경계를 확장해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블레즈 파스칼의 말이 지시하는 바도 마찬가지 차원일 것이다. 생각을 통해 자꾸만 다른 차원에 접속하면 일상적 현실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마련이다. 다른 차원에 접속하지 못할 때 삶의 근본적 변화는 불가능해지고 힘겨운 적응만 남는다.

 

'신에 대한 말'(God-talk)인 신학도 인간의 인간다움을 묻는다. 신에 대한 물음은 인간에 대한 물음과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이것을 '신학은 인간학'이라는 말로 정식화했다. 신학과 인문학은 인간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접점이 있다. 신학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인문학은 문제적 인물인 인간 자신과 그들의 모듬살이가 빚어내는 삶의 풍경을 다룬다. 질문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답도 달라진다. 신학은 인문학이 제기하는 질문들에 성실하게 답하려 할 때 풍요로워진다. 모든 상황에 맞는 답을 이미 갖고 있다는 오만이 오히려 현실로부터 신학을 멀어지게 만든다.

 

이탈리아의 화학자이면서 작가였던 프리모 레비가 나찌의 수용소에서 경험했던 것을 증언한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이 떠오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가 소멸해버리는 현장, 누구도 주체로 서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연옥, 인간의 존엄성이 유린되는 그 현장에서 프리모 레비가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친 이유는 한 가지였다. 기어코 살아나가 그 참상의 증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갖은 수모를 다 겪고 죽음이 목전에 당도하는 순간에도 그에게는 한 가지 능력이 남아 있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엄을 깨뜨릴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이외에는 없다는 신념이 그를 지켜 주었다. 그 깨달음을 그에게 준 것은 동료 수인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58쪽)

 

인문학과의 즐거운 만남

외람되지만 어떤 신학적 언설도 이 구절처럼 우리 가슴을 흔들지 못한다. 최고의 이야기꾼이었던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법을 모른다. 이야기를 통해 진실을 전달하는 능력이 너무 부족하다. 인문학의 성과에 귀를 기울일 때 신학의 언어는 확장될 수 있다. 신학은 자기 완결성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언설 체제 속에 들어오지 않는 타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자폐적인 담론 속에 갇혀 타자를 상상하지 못한다. 타자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다. 지금 한국교회의 위기는 신학의 위기이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신학이 제시하는 답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플라톤이 <국가 정체>에서 들려주는 동굴에 묶인 채 그림자를 현실인양 생각하며 살아가는 수인들은 바로 우리들의 초상이다.

 

인문학과의 소통을 통해 내가 꿈꾸는 것은 신학의 지평 확장이다. 또 신학을 담아내는 언어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어휘가 늘어나면 사유의 능력도 커진다. 신학이 '홀로' 자족하는 길을 선택하는 순간 고립은 심화될 것이고, 현실로부터 점점 멀어질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과 '더불어' 가는 길을 택할 때 신학은 오히려 중심이신 하나님께 이르는 다양한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시를 즐겨 읽는다. 플라톤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질서에 복종하지 않는 시인들을 철학자들이 다스리는 공화국에서 추방하자고 말했지만, 시인들은 언어의 올가미로 스러져가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해 보여준다. 시는 논리나 이성이 아니라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가르쳐준다. 예수님의 말씀도 시이다. 그는 늘 놀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그 세상 속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을 예민하게 포착하곤 했다.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은 <사람의 아들 예수>에서 그리스 시인 루마누스의 입을 빌어 예수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눈을 대신해 보았고 우리 귀를 대신해 들었으며 우리가 말로 못 하는 말을 그는 입술로 했습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그는 손가락으로 만졌습니다. 그의 심장 속에서는 이루 셀 수 없는 노래하는 새가 날아 북으로도 남으로도 갔고, 언덕의 조그마한 꽃들은 하늘을 향해 가는 그의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시인 예수>에서 정호승은 '그는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이라는 말로 지브란의 마음에 공명한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진리의 실현으로 본다. 그리스어로 진리는 '알레테이아', 즉 '비은폐성'을 뜻한다. 레테(망각)의 강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들을 호명해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시는 드러난 것과 감추어진 것 사이에서 의미를 지어낸다.

 

나는 소설도 즐겨 읽는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소설은 삶의 복잡성을 다양한 장치를 통해 보여준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와 무관한 타자들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우리 모두의 분신이다. 그 인물들은 우리가 차마 마주하지 않으려 하는 비루한 욕망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소설 읽기를 통해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숨겨진 얼굴들을 보게 된다. 소설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줄 수 있다.

 

신학교에서 '종교와 문학'을 가르칠 때 나는 학생들에게 상상력을 마음껏 활용해 볼 것을 요구했다. 예컨대 이삭을 번제로 바치러 가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생략된 부분을 채워보라는 과제를 내주기도 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집을 떠나 사흘 째 되는 날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을 멀리서 바라보았다고 말한다. 고도로 압축된 채 접혀 있는 그 사흘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보는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성경과 마음으로 만나는 체험을 했다 한다. 사울의 첩이었던 리스바 이야기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이야기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찾아보라는 과제도 내주었다. 형 에서로 변장하여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해 팔에 염소 털을 두른 야곱 이야기와 동물 희생제의를 연결시켜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치유 이야기는 늘 감동적이다. 그러나 성경은 치유 이후에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 후일담을 창작해 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 훈련의 과정이 학생들의 성경 읽기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서를 보는 그들의 눈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성경은 닫힌 텍스트가 아니라 열린 텍스트가 되었던 것이다.

 

성서 해석의 길이 막힐 때면 나는 일쑤 그림책을 꺼내놓고 들여다본다. 중세 이전과 이후, 르네상스 시대와 근세,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화가들의 상상력은 똑같은 소재를 다양하게 변주하곤 했다. 화폭 속에 담긴 서사를 읽어가는 과정을 통해 나는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과 시대정신을 읽는다. 그림은 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가 된다. 색채와 형태 속에 담긴 화가의 꿈과 이야기에 접속되는 순간, 감상자와 화가 사이의 실존적 거리는 사라지고 만다. 화가들의 상상력은 우리를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종교화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교회와 세상 사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목회자의 인식 지평을 확장하는 일에도 기여하지만, 성도들과의 친밀한 만남을 위한 좋은 접점이 되기도 한다. 성도들이 나름대로의 전문성을 가지고 일하고 있는 일터는 신앙생활과 무관한 곳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 화육되어야 할 현장이기도 하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교인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신앙을 삶으로 번역하는 일에 능동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정치, 경제, 문화, 기술 등 우리 삶을 내적으로 혹은 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각각의 영역이 신앙적 세계관과 만날 지향점을 분명히 찾을 때, 그리고 신앙이 그들 영역과 만나 구체성을 갖게 될 때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을 단순히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충만한 삶의 가능성에 대한 낭비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인간을 '죄인'이라는 말 속에 가둘 때 우리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위선의 가능성은 증폭되게 마련이다. 인문학은 신학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인간 존재의 복잡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인문학에 대한 담론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성도들조차 인문학 강좌에 달려간다. 그것은 교회에서 통용되는 담론이 그들의 영적 헛헛함에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신앙의 언어가 오로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통용된다면, 그래서 교회 바깥의 사람들의 가슴에 어떤 공명도 일으킬 수 없다면 종교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모든 학문의 왕을 자임했던 신학은 이제 겸손히 인문학으로부터 그 발랄하고 참신한 언어를 수혈 받을 필요가 있다. 인문학은 교회와 세계 사이를 매개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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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8-20 05:08)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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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덕(11 08-21 09:08)
요즘 리영희 교수님의 "대화"를 읽고 있습니다. 그는 무신론자였지만 보통사람들을
사랑했기에 독재정권하에서도 붓을 꺽지 않은 참 용기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사회적약자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그들과 함께 아파했던 예수님의 일면을 보는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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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남(11 08-26 09:08)
인문학적인 신앙생활을하고싶은 저에게 참 와닿는 글이였습니다
,예술은 진리의실현, 바로 그런 작업을하는 저 에게 참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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