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더'의 길과 '덜'의 길 사이에서 2011년 08월 04일
작성자 김기석

‘더’의 길과 ‘덜’의 길 사이에서

 

서울과 강원도에 물난리가 나던 날, 곳곳에서 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흙에 묻힌 생떼같은 젊은이들의 억눌린 함성이 들려왔다. ‘왜 이런 일이?’ 말문이 막힐 뿐이다. 남의 아픔을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착한 사람들은 수해 현장으로 달려가 구슬땀을 흘렸고, 손익계산에 민감한 관료들과 정치인들은 발뺌하기에 분주했다. 어떤 이들은 정보 조작까지 시도했다 한다. 누구 하나 나서서 ‘내 책임’이라고, ‘내 부덕의 소치’라고 말하지 않았다. 원인은 늘 남에게서 찾거나 변덕 심한 자연에 돌렸다.

 

대통령은 예상치 못한 폭우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면서, 다음에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하라고 말했다. 기시감을 자아내는 그 너그러움과 상투적인 격려에 역정이 나는 것은 왜일까? 매끄러운 장어처럼 책임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4대강 사업 덕분에 홍수 피해가 대폭 줄어들었다며 엉너리를 친다. 침묵과 눈물이 필요한 순간에 자화자찬이라니. 왠지 서글퍼진다.

 

그런데 돌연 일본 보수파 정치인들의 입국을 둘러싸고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그쪽으로 쏠렸다. 참 절묘한 타이밍이다. 산사태와 물난리의 책임 공방은 소멸되었고, 덩달아 저축은행의 부실 책임 공방도 잦아들었다. 이재오 특임 장관은 독도를 지킨다며 달려가 군복으로 갈아입고 총을 들었다. 참 발 빠른 행보이다. 중앙신문들은 일제히 그의 사진을 지면에 올렸다. 그런데 아뿔사, 감동이 오지 않는다. 감동은커녕 불쾌한 느낌마저 든다. 독도는 그의 정치적 야망의 들러리로 동원된 것이 아닌가.

 

며칠 이런 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무거웠다.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으면서도 비가 되어 내리지 못하는 구름처럼. 사막이 떠오른 건 눅진눅진해진 마음을 내려놓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막이 없었더라면 투명함과 엄격함, 감탄하는 것에 대한 심미안을 갖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던 테오도르 모노의 동행이 되고 싶어졌다.

 

“사막은 또한 ‘생략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한 사람에게 하루 2.5ℓ의 물, 간소한 음식, 몇 권의 책, 몇 마디 말이면 족하다. 저녁은 전설, 이야기, 웃음 가득한 밤샘으로 이어진다. 나머지 시간은 명상과 정신 수양으로 보낸다. 두뇌는 오직 한 곳을 향하고, 드디어 우리는 하찮은 일, 쓸데없는 것들, 수다스러움에서 벗어난다.”(테오도르 모노, <사막의 순례자>, 현암사, 71-72쪽)

 

어쩌면 오늘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생략하는 법’인지도 모르겠다. 깃털을 세워 자기를 크게 보이려 하는 싸움닭처럼 우리는 자기 확장의 욕망에 시달린다. 욕망이 커질수록 존재는 가벼워진다. ‘더’의 길은 찾는 이가 많아 붐비지만 ‘덜’의 길은 늘 한산하다. 덜어낼 줄 몰라 삶이 무겁다. 어느 소설가는 인위적인 것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 유다 광야에 들었더니 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더라고 말했다. 삶에 필요한 것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언젠가 시리아의 광야 한 복판을 지나다가 차가 잠시 멈춘 사이 베두인의 천막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앉을 수 있는 의자 두 개와 옷가지 몇 벌, 그리고 조리용 그릇 몇 개가 전부였다. 그 남루한 살림살이 살림을 보는 순간 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아올랐다.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사는 삶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말을 잊은 채 그 천막을 돌아나오다가 자그마한 원을 이루며 놓여있는 돌덩이들을 보았다. 저게 뭐냐는 질문에 베두인족 사내는 목동들의 기도처라고 말했다.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신전이 거기에 있었다.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시인 김수우는 사하라 시편 가운데 하나인 <천막>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둥그렇게 바닥을 펴면 세상의 중심이 생긴다

네 개의 나무기둥을 세우면 지상의 축이 팽팽해진다

지붕을 펼쳐 얹으면 천막은 아침 신전이 된다”

 

참 간단하다. 군더더기 하나 없다. 그리고 고요하다. 강건한 사하라 주민들의 그을린 팔 안에서 세상은 그렇게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힘겹다고 울 것도 없고, 세상만사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절망할 것도 없다. 무례한 사람 때문에 속상해 할 것도 없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을 보며 비분강개할 것도 없다. 너무 쉽게 초월해 버려도 안 되지만, 우울한 현실에 붙들려 삶의 신비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먼저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나면 된다. 잠든 사람을 만나며 흔들어 깨우고, 지친 사람을 보면 부축해 일으키고, 외로운 사람을 보면 길벗도 되어주고, 강도짓을 하는 사람을 보면 야단도 쳐가며 그렇게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물론 시간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아침마다 신전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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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8-10 03:08)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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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식(11 08-23 10:08)
그런 삶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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