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6 2011년 07월 19일
작성자 김기석

요한복음 묵상 6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께, “랍비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셨다.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4:31-34)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을 “나는 ~이다”(I AM)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는 ~이다’는 거룩한 존재의 이름이다. 그런데 ‘나는 ~이다’이신 분이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가슴에 상처만 간직한 채 살아가는 여인, 이름도 존재감도 없는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하신 것은 그야말로 사건이다. 그 부탁은 동토와 같았던 여인의 가슴에 깊이 잠들어 있던 참 사람의 씨앗을 깨우는 봄바람이었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한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모멸감을 듬뿍 안겨주던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였더라면 차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혼을 달뜨게 만드는 봄기운을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봄 신명에 지핀 사람은 다른 이의 가슴에도 봄을 일깨운다. 여인과 마을 사람들을 갈라놓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은 일시에 무너졌다. 여인의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예수에게 나아왔다. 놀라운 변화이다.

 

그들이 우물가로 나아오기 전, 제자들은 당혹감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승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을 나누다니. 대체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그들의 의식은 여전히 남자/여자, 유대인/사마리아인의 가름줄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당혹감 억누르며 그들은 스승에게 음식을 권한다. 하지만 스승은 마치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이때 예수의 얼굴에는 하늘빛이 드리워있지 않았을까? 예수의 마음은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 깨어나고 있는 한 여인으로 인해 충만해졌던 것이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신뢰의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할 때, 목마름도 배고픔도 사라진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 놀라운 발언은 적절한 순간에 써먹으려고 예수가 정리해 둔 말이 아니다. 그 순간 그 언어가 그에게 온 것이다. 한 여인의 깨어남이라는 그 놀라운 사건과 음식을 잡수시라는 제자들의 둔감한 권고가 이렇게 단순하고도 강력한 말을 빚다니 놀라울 뿐이다. 몸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살지만 얼 사람은 보람을 먹어야 산다. 예수는 삶을 ‘소명’으로 이해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그리고 다양한 인간관계의 장이야말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해야하는 현장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지레 묻지 말자. 모든 순간에 적용될 수 있는 해답은 없다. 상황에 따라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알려주신다. 가끔 삶이 진부하고 무겁다고 느낄 때면 이런 기도를 올린다. ‘일용할 보람을 주소서.’ 그 보람은 하나님의 계획에 내 삶이 통합될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 뒤에 유대 사람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주랑이 다섯 있었다.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5:1-3)

 

어떤 명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루살렘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것이다.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오체투지로 가는 길은 아니라 해도 ‘시온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을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설렘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예수도 예루살렘에 가셨다. 그런데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성전이 아니라 아픔의 자리이다. 거절당한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이 모여 드는 올리브 나무의 집 베드자다 연못가이다. 사람들은 그곳을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이라고도 부른다. 다섯 개의 주랑 아래에는 많은 환자들, 눈 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있었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남루한 차림의 사람들이 있는 곳, 원망과 절망으로 인해 음산한 그 자리,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그곳을 예수는 제일 먼저 찾아가셨다. ‘제일 먼저’라고 적어놓고 보니 가슴이 시리다. 오늘의 교회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베드자다 혹은 베데스다는 우리가 맨 마지막에 찾아가는 곳 아니던가? 그것도 마지못해, 체면치레로 말이다. 얼핏 늦은 저녁 서울역 지하보도에서 잠을 청하는 노숙인들을 찾아나서는 예수의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이 그곳에 몰려 든 것은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을 때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 낫는다는 소문 때문이다.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묻지 말자.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도 말하지 말자. 사람들은 절박하다. 남의 절박함을 옳고 그름으로 재단하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곳에 있다. 행여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칠까 무서워 자리를 뜰 수도 없다. 곁에 있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들의 아픈 사정에 공감할 여유는 물론 없다. 그들은 잠재적인 경쟁자들이기 때문이다. 경직된 몸과 핏발 선 눈, 언제 욕설과 폭력이 그들을 휘저어 놓을지 모르는 현실이다.

 

그곳에 서른 여덟 해 동안 시름시름 앓던 사람이 있었다. 아름다웠던 젊은 날은 다 지나가고, 마음에 드리운 원망의 더께를 걷어낼 기분도 기운도 없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희망이 아니라 지옥의 연장이었다. 자기가 운명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 되리라는 기대조차 가질 수 없었다. 절망에 익숙해진 사람의 냉소와 무력감만이 그를 지배했다. 그렇다고 상처조차 없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시인 류근의 시 <상처적 체질>이 떠오른다. 그는 수많은 봄이 왔다 가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이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이름은 늘 있다”고 노래했다. 시의 화자는 말한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다친다/상처는 나의 체질/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상처의 날들이 계속되는 어느 날 그의 삶에도 봄이 왔다. 예수라는 봄바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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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8-10 11:08)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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