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5 2011년 05월 28일
작성자 김기석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바로 말하였다.”(4:16-18)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흔히 결혼에 비유되곤 했다. 성경에서 호세아는 오쟁이 진 남편의 대명사이다. 그의 아내 고멜은 결혼 생활에 성실하지 않았다. 고멜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없이 들뜬 영혼이었다. 물결치는 대로 흔들리는 부평초, 그것이 고멜이었다. 얼굴에는 색기가 가득하고, 젖가슴에는 음행의 자취가 남아 쇠붙이가 자석에 끌리듯 달콤한 말로 호리는 정부들을 따라 가기에 바빴다. 하지만 고멜이 따로 있던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고멜이고 우리 자신이 고멜인 것을. 우상숭배란 인간의 예배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절대자처럼 섬기는 것이다. 적나라하게 말하자. 돈, 학벌, 명예, 권력, 쾌락, 이념, 종교. 그렇다. 종교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시간 여행자인 우리는 어쩌면 타고난 우상숭배자들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의 대용물을 찾는다. 찾을 뿐만 아니라 숭배한다.

여인은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말에 '없다'고 대답한다. 남편 다섯이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그 마음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없고, 그 헛헛함을 채워주지 못하는데.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고멜의 참 남편은 아니다. 해질녘의 서해를 바라보듯 쓸쓸한 마음의 풍경 속에서 그는 갈매기처럼 그저 스쳐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여인은 놀랐다. 자기도 몰랐던 자기 마음의 풍경을 이렇게도 세밀하게 꿰뚫어보는 사람이 있다니. 게다가 그의 어조에는 비웃음이나 책망기조차 없지 않은가. 이 낯선 사내는 왠지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인은 눅진눅진한 자기 마음에 한 줄기 신령한 빛이 깃들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데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달아나지 않는다.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19-20)

세상 사람이 뭐라 하든 여인도 보는 사람이다. 여자라고 해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해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보는 세상이 현실에 가깝다지 않던가. 여인은 그 낯선 사내를 '예언자'라 부른다. 하나님의 정념에 사로잡힌 사람, 하나님의 눈으로 인간의 삶과 역사를 주석하는 사람, 때로는 송곳의 언어로 사람들의 심령을 꿰뚫고, 때로는 망치의 언어로 종교적 위선과 폭력적 삶의 방식을 박살내고, 때로는 태풍의 언어로 풍요와 번영의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세차게 흔들어 깨우고, 때로는 미풍의 언어로 상처 입은 사람들과 연약한 이들을 감싸 안는 사람 말이다.

 

여인에게는 이 낯선 사내를 표현할 다른 말이 없었다. '그래, 이 사람은 예언자구나.' 그래서 묻는다. 예배는 어디에서 드리는 것이 옳습니까? 여기입니까? 저기입니까? 답을 알고 있다고 하여 여인을 비웃지 말라. 왜 이런 질문이 떠올랐을까? 모른다. 여인은 사람들의 설왕설래를 잘 알고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다는 사람도 있고,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다는 사람도 있다.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이 질문이 중요하다.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묻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기 위해 진력을 다한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4:23-24)

 

여인의 질문 덕에 우리는 진정한 예배에 대해 배운다. 두 가지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과,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이다. 예배의 진정성은 장소 규정성과는 무관하다. 타락은 시간의 공간화이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야 하는 것은 지금 여기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시간을 공간으로 번역하곤 한다. 그 마음의 이면에 있는 것은 소유욕이다. 하나님 체험을 교리나 신조 속에 박제하여 소유함으로 구원을 확보하고 싶은 것이다. 큰 교회를 짓고, 장엄한 의례를 집행하거나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하나님 안에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성경에서 성령은 창조의 힘이고, 만물을 새롭게 하는 새로움의 근원이고,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변화의 기운이다. 진리의 성령과 하나 됨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변화를 향해 자기를 개방하지 않는다면 예배는 이미 예배가 아니다. 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영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함께 느끼고,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기뻐한다. 오늘 우리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이 근심하고 있는데도 우리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우리는 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다. 영으로 예배하는 이들은 악마적 세력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면서도 낙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의 우회가 필요하다. 진리라는 단어는 아름답지만 추상적이다. 빌라도는 진리의 구현인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인가?' 물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 탓이다.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다. 나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뜻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바치는 것이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 그런데 그 예배의 시간은 예배를 위해 구별된 시간이 아니다. 우리 일상의 모든 시간이 바로 그 때이다. 바울도 로마 교인들에게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롬12:1)라고 말했다. 이 땅 도처에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는 많지만 과연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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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6-15 10:06)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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