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4 2011년 04월 20일
작성자 김기석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이 추하고 다라운 세상을?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인간세계’를 뜻하는 말이지만, 그 세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어둠’이 아니던가? ‘어둠’의 다른 말은 ‘죄’이다. 죄란 우리가 저지르는 도덕적, 법적 위반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누가 죄인인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 자기가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지를 모르는 사람, 자기들에게 주어진 존엄한 삶으로부터 유리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아니, 죄인을 사랑하신다. 놀라운 은총이다. 그 사랑은 죄인들을 구원하고 영생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외아들까지 보내주시는 사랑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외아들’이라는 표현을 오해한다. 하나님이 둘도 아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주신 그 무한한 사랑에 감격하는 이들을 보면 다소 뜨악해진다. 아들 여럿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보내주셨다면 그 사랑을 적다 말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흔히 예수의 ‘유일성’을 말하기 위해 독생자 혹은 외아들이라는 말에 집착한다. 하지만 ‘외’라는 접두사로 번역된 이 단어(monos)는 ‘오직 하나’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가장 소중한’이라는 뜻도 있다. 진정한 사랑은 본래 유일한 것이 아니던가? 초록별 지구에 내려온 어린왕자는 어느 집 담장에 피어있는 수 천 송이의 장미꽃을 보며 충격을 받는다. 장미꽃은 우주 가운데 오직 자기 별에만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론적 충격으로부터 그를 건져준 것은 지혜로운 여우였다.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길들이다’라는 말을 가르친다. 어린왕자는 비로서 자기 별에 있는 장미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시간을 들여 물을 뿌려주고, 바람막이로 둘러주고, 벌레를 잡아준 것은 오직 그 꽃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참 쉽다. 아들을 믿으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의 방식은 바꾸지 않으면서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 아니, 믿는다고 믿는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헌금생활도 잘 하고, 더러 봉사활동에도 동참한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생명의 향기가 안 난다. 그렇다면 뭔가 잘못된 거다. 믿음이란 말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믿음이란 교리나 신조에 대한 승인 혹은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철저한 신뢰이고 사랑이다. 삶을 그분께 맡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용기이다. 아들을 믿는다는 말은 그와 친밀한 사귐 속에 있다는 말이고 궁극적으로는 일치를 지향한다는 말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분이 추구하는 바를 자기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성경은 인류의 첫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다고 말한다. 선악을 분별하게 되었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 오히려 그런 분별력이 없는 것이 문제 아닌가? 옳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꾼들이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려는 것은 도덕적 분별력의 확장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을 척도로 삼는 일의 위험성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옳다는 전제하에 타자를 바라본다. 그런 바라봄 혹은 판단이야말로 모든 폭력의 뿌리이다. 예수의 시선은 전복적이다. 가장 거룩한 척 하는 이들에게서 위선을 보고, 가장 천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서 거룩함을 본다. 사람들이 다른 이의 눈에서 ‘티끌’을 볼 때 예수는 그들의 가슴에 있는 ‘눈물’을 본다.

 

예수는 심판하러 오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존재 자체가 이미 세상에 대한 심판이다. 어둠은 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진짜 거룩한 사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자기 내면의 누추함이 폭로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고후11:14)한다는 사실이다. 성도들의 분별력이 필요하다.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너희야말로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한 말을 증언할 사람들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3:27-30)

 

살렘 근처에 있는 애논에는 물이 많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나와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성전 체제에 대한 부정이었다. 성전 체제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성전에 나와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성전은 이미 사람들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거룩한 장소도 고요함의 오아시스도 아니었다. 자기 이익에 발밭은 제사장들의 탐욕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가죽옷을 입은 예언자 세례자 요한, 그는 하늘을 향해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그가 내지르는 사자후는 로마 제국에 시달리고 성전 체제에 억눌렸던 사람들의 가슴을 막고 있던 울혈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런 스승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 영문 모를 불쾌감이 그들 내면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고, 그들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스승에게 말한다. 하지만 요한은 태연하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큰 믿음이다. 자기의 작음을 알고 다른 이의 큼을 아는 사람이기에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 가장 크다 했다. 아, 큰 정신이 그리운 시대이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에 이르렀다. 이 마을은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곳이며, 야곱의 우물이 거기에 있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피로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오정쯤이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다.(4:5-7)

 

성경의 이 대목을 읽다가 문득 읽기를 그만 두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예수가 유대인들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던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셨기 때문도, 그곳에 있다는 야곱의 우물 때문도 아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피로하셔서’ 이 한 마디 때문이었다. ‘아, 예수님도 우리처럼 지치기도 하셨구나’ 하는 이상한 안도감. 당연한 일을 두고 웬 호들갑인가 싶을 수도 있다. 뭐라 해도 좋다. 주님도 우리처럼 피곤을 느끼고, 가끔은 휴식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구절이 또 있다.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막11:12) 예수께서도 배고프셨다는 사실이 왜 그리도 위안이 되던지. 이런 구절 앞에서 내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교회가 오랫동안 관념화한 예수의 참 모습을 상상해 볼 여지를 주지 때문일 것이다. 김승희 시인은 <배꼽>이라는 시에서 “그대여, 당신이 누구든지 간에, 당신의 배꼽을 보여준다면, 나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노래했다. 우리는 배꼽 위에서 평등하다고도 말했다.

 

“그대여, 당신이 누구든지간에, 당신의 배꼽을 버리지만 않았다면은, 나 그대를 열렬히 용서하겠습니다, 봄이 되어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싹이 트는 것을 바라보거나 푸드득--- 새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습진처럼 나의 배꼽이 가려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상하지 않은가? 배꼽을 버리지만 않았다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니. 바로 이게 사람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초인이 아니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 그러나 우리와는 다른 참 사람이다. 나그네는 피곤하고, 때는 오정인데, 한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이야기를 나눌 벗들조차 없이. 정오의 햇살은 뜨겁지만, 여인의 얼굴은 어두웠을 것이다. 내면에 깃든 그림자 때문이다. 그 여인에게 예수께서 말을 건다. ‘물을 좀 줄 수 있겠소?’ 이 말 건넴이야말로 상처받은 영혼에게 건네는 예수의 수인사였다. 몸이 피로한 예수가 마음이 피로한 여인에게 말을 건넨다. 그들 사이에 파랑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그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4:13-15)

 

이상도 하지. 낯선 이 사나이의 음성에서 고향이 느껴지다니! 그가 건넨 말의 내용이 아니었다. 그의 음성에 실려오는 따뜻함과 순수함, 그것은 마치 긴 겨울 추위에 지친 이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봄바람인 듯싶었다. 낯선 사내의 말 건넴을 외면해 버릴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어떤 일렁임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기껏 한다는 말이 참 부질없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지만 마음이 열렸으니 그 다음은 흐름을 따라가면 될 일이다. 주거니 받거나 말을 나누다보니 누가 물을 청한 사람이고 누가 두레박을 들고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여인은 마침내 자기 앞에 서 있는 그 유대 사람에게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을 청한다.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그 샘물 말이다.

 

전방 부대의 군목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 생각난다. 최전방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을 방문한 후 산 중턱에 자리잡은 연대 교회로 돌아와 보니 군종병 둘이 마당가에서 땅을 파고 있었다. 뭘 하는 거냐는 물음에 그들은 득의의 미소를 띤 채 우물을 파는 거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아무리 파도 그곳은 물이 나올 만한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교회 청소를 하자면 계곡 아래에 있는 샘터까지 물지게를 지고 몇 번씩 오르내려야 했으니 그들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물이 나올 곳을 파야지. 넌지시 그곳은 물이 날 곳이 아니라고 일렀지만 그들은 두고 보시라면서 키 높이만큼 땅을 파들어갔다. 물론 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이 희희낙락이었다. 며칠 후 큰 비가 내리자 그 마른 샘에 물이 가득 찼고, 며칠이 지나 흙이 다 가라앉자 그들은 그 물을 퍼다가 교회 청소를 했다. 그 물이 다 떨어지자 군종병들은 다시 물지게를 지고 계곡을 내려갔다.

 

밖에서부터 유입되는 물은 곧 다시 마르게 마련이다.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라야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예수는 지금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도록 해주는 마술적인 한 잔의 물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 하나를 파주시려는 것이다. 여인이 그 깊은 뜻을 알아차린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물을 내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는 깨닫지 못하는 여인을 비난하지 않으신다. 깨달음은 쉽게 오지 않는다. 수도사들이 침묵하며 노동과 기도에 힘쓰는 것도, 스님들이 무문관에 들어가 몇 달씩 머무는 것도 한 소식 듣기 위함이지만 그 소식은 그렇게 쉽게 들려오지 않는다.

 

예수가 여인에게서 본 것은 무엇일까? 목마름이었다. 인간의 마을에 몸 붙여 살고 있지만 가슴 가득 헛헛함만 간직한 채 바장이는 메마른 삶, 그 불모의 삶을 예수가 어찌 알아차리지 못했겠는가. 그렇기에 예수는 자신의 목마름조차 잊으시고 여인의 가슴에 샘을 파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을 안 것일까? 성숙한 깨달음은 아니지만 여인은 그 낯선 유대 남자를 신뢰하고 그 물을 달라 하고 있다. 믿음의 단초가 이렇게 마련된 것이다. 믿음의 시작은 이렇게 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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