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종교가 문제다 2011년 04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종교가 문제다

--정진홍,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불행히도 우리는 종교가 ‘물음에 대한 해답’이기보다 아예 ‘물음 자체’가 되어 있는 현실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종교도 악의 실체라는 진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종교현실입니다.”(438쪽)

“종교사는 인간이 없으면 신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논거는 간단합니다. 신도(信徒)가 없으면 신(神)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은 있는데 신도는 없는 경우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신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박제된 신, 아니면 역사라는 기억 속에 다만 이름으로 남아있는 신일 것입니다.”(512-3쪽)

 

종교의 황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이 말씀은 언제 읽어도 우리 가슴을 뛰게 한다. 평화 없는 세상살이에 지칠 때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생의 이정표가 된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가 과연 '화평케 하는 자인가?'라고 되물을 때 갑자기 가슴은 답답해지고 호흡은 거칠어진다. 외부자의 눈에 비친 교회는 '평화'가 아니라 '불화'의 사도처럼 보인다. 얼마 전 우리는 뉴스를 통해 미국의 테리 존스 목사가 자기 교회 앞에서 9.11 테러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고 이슬람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서라며 꾸란을 태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무슬림들이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경전을 불태운다는 것은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타자'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선언인 셈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무고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이것이 테리 존스가 바라던 바일까? 그렇다면 그는 악마이고, 그렇지 않다면 어리석다.

 

나와는 신념 체제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편협함이야말로 세계 평화의 적이다. 자기 확신이 강한 종교인일수록 다른 언어와 다른 감수성 그리고 다른 문화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자기 집단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언어를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폭력을 가하는 퇴행적인 부족주의(tribalism)가 세상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눈을 안으로 돌려보아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지도력이 교체되는 시기에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대형교회의 분쟁 소식은 이제 사람들에게 충격보다는 실소를 자아내고 있는 형편이다. 돈과 권력의 배분을 둘러싼 분쟁으로 인해 악취가 진동한다. 생명의 향기가 아닌 악취가 나는 교회…기가 막히다. 30대의 젊은 청년 예수가 십자가를 진 것이 겨우 몇몇 종교 지도자들의 배부름을 위해서였다는 말인가? 한기총 회장 선거를 둘러싼 파행도 점입가경이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는 데, 도무지 지금의 기독교는 날개조차 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원로 종교학자인 정진홍 선생의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을 읽었다. 다양한 자리에서 강연한 원고를 묶어낸 이 책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가슴이 저려왔다. 노학자가 안타까움을 담아 드문드문 발설하는 말들이 마치 기독교를 애도하는 조종(弔鐘)소리처럼 들려왔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기독교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읽는 주체에게 그렇게 들렸다는 말이다.

 

'종교는 평화를 위해 기여한 적이 없다'.

'자기 신념의 순수성에 빠질수록 맹신에 빠진다.'

'자기 정화와 성찰의 힘이 없으면 광신에 이른다.'

 

상자 속의 코끼리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은 총 6부로 나눠져 있다. 제1부인 '종교의 생존 원리'는 다원화된 세계를 맞이한 종교들이 어떻게 정직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다른 종교와 대면하면서 스스로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당혹스럽게도 저자는 우리가 "'종교인'이기를 그만두고 '인간'이 되기 전에는 종교 간의 신뢰란 불가능"(147)하다고 단언한다. 이런 진술은 종교가 자기 논리의 절대성, 보편성 영구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입각한 것이다.

 

제2부인 '고백 공동체의 언어'는 낯선 세계와의 만남이 빚어내는 부득이한 혼란 속에서 종교가 인식의 한계와 정서적 불안을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겠는지를 묻는다. 이런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종교가 근본주의를 향해 질주하게 되면 종교간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종교라는 덮개를 제거한 후 종교가 지향했던 가치를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를 빚어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저자는 바로 이 물음과 씨름하고 있다.

 

제3부 '편의에 빙의된 의미'에서는 생명과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묻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은 죽음의 현실성과 더불어 진술되어야 하며, 죽음의 존재론은 생명의 존엄성과 더불어 기술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266) 저자는 죽음을 최소화하고 모든 생명의 공존을 도모하기 위해 종교가 해야 할 일 혹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제4부 '물음과 해답의 에콜로지'는 '우리는 물은 것만을 알 수 있다. 묻지 않은 것은 알 수 없다'는 전제하에 '물음'과 '해답'과 '상상력'의 상관관계를 논한다. 저자가 여기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일정한 양식의 반복 및 전승을 그 본연으로 지니고 있는 '틀 잡힌 몸짓'으로서의 '제의'(381)와 기억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이야기'의 역할이다.

 

제5부 '종교학 담론의 공간'은 종교학 담론이 제도화된 종교에 대한 논의를 넘어 어떻게 일상의 현실을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저자는 현금의 문화 정책이라는 것이 어떻게 기억을 박제하고 또 여과하는 권력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인문학 위기 담론을 유포하는 이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힘이 소진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닌지를 묻고 있다.

 

제6부인 '신의 고향은 어디인가?'에서 저자가 다루는 주제는 다양하지만 그래도 핵심은 역시 '크레도와 코기토'의 관계를 묻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종교학자답게 '종교의 언어'로 '종교의 현상'을 기술하는 일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면서, 종교현상이 빚어내는 다양한 모습을 그려내기 위한 새로운 언어가 절실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가 다룬 다양한 주제를 너무 간결하게 뭉뚱그리는 실례를 범했다. 상자 속에 든 코끼리는 보지 못하고 상자만 보는 생떽쥐베리의 어른을 닮은 탓이다. 책을 잠시 덮어두고 이 책 전체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책 제목이 그것을 절묘하게 요약해 놓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이야말로 오늘 위기에 처한 종교가 꼭 붙들어야 할 가치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그동안 제도화된 종교의 지도자들은 신자들의 '물음'을 통제하고, '현상'을 빚고, '의미'를 규범화함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을 강화해왔다. 그것이 인(因)이라면 오늘의 종교 현실은 그 과(果)이다.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다 하려면 이런 현실을 직시하면서 특정한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해체해야 한다. 그것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탈바꿈을 위한 몸부림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닫힘에의 거절인 동시에 새로운 열림에의 희구이니 말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방대한 논의의 결을 다 따라갈 힘도 능력도 평자에게는 없다. 그래서 이제는 저자가 제기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서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몇 가지 주제에 집중해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새로운 언어의 모색

저자는 종교가 "오늘날 인류의 삶과 문화 속에서 해답이 아니라 문제 자체가 되고 있다는 사실"(53)에 주목한다. 저자가 주로 주목하는 것은 기독교이다. 다른 문화와 오랫동안 접촉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성해온 기독교는 '나는 ~와 다르다'는 의식을 통해 자신을 구분해왔다. 그런데 그러한 구분은 '배타'와 '독선'으로 기울게 마련이고, 배타나 독선은 결국 타자에 대한 정죄와 저주를 넘어 타자의 소멸을 의도하는 데 이를 수도 있다. 타자를 승인한다는 것은 곧 자기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테러의 뿌리를 천착해 보면 종교와 자기 확장의 욕망이 뒤엉켜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은 이 때문이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 종교 간의 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동안 종교 간의 대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화는 겉돌 뿐이었다. 대화는 상호 변화를 목표로 한다. 진정한 대화는 다름을 승인하면서 자기자리를 벗어나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갈 용의가 있을 때 발생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자기는 변화되기를 거부하면서 상대방을 변화시키려는 의욕이 앞설 때 대화는 중단된다. 대화가 어려운 까닭을 저자는 종교언어의 본질에서 찾는다.

 

종교언어는 사물에 대한 인식을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자신의 고백을 발언(251쪽)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종교는 ‘고백’과 ‘인식’을 혼동한다. 저자는 “고백이 자기정직성을 준거로 하여 이루어지는 자기를 향한 발언이지, 타자의 인식을 당위적으로 규제하는 폭력일 수 없다는 사실”(42쪽)을 지적한다. 고백의 언어가 동어 반복과 ‘거리 지우기’를 시도하는 데 비해, 인식의 언어는 ‘거리 만들기’와 물음을 향한 개방성을 지향한다. 하지만 인식의 언어가 늘 물음에 대해 개방적인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인식내용을 ‘마지막 인식’으로 여기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고백의 언어와 인식의 언어가 더 이상 현실을 적확하게 드러내주지 못하는 게 사실이라면 대안은 없는가?

 

저자가 이 지점에서 주목하는 것은 ‘상상력’이다.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 “상상은 사유나 믿음에 귀속되지 않는 새롭거나 다른 경험을 서술하기 위한 개념적 언어”(630쪽)이다. 상상은 고백을 가능케 했던 본래 자리, 정직한 인식을 염원하게 했던 ‘물음의 순수성’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되돌려진 그 자리에서 필요한 것은 ‘새 언어’이다. 앞으로 종교의 과제가 있다면 고백과 인식을 가로지르는 새 언어를 찾는 일이다. 하비 콕스는 기독교의 역사는 신조의 역사가 아니라, 신앙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어쩌면 거룩과의 마주침을 통해 발생한 ‘이야기’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새로운 언어인지도 모르겠다. 맥락에서 조금 벗어나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한국교회는 저자가 기독교를 향해 던지는 고언(苦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배타와 독선을 버리고 그로 인해 초래될 자기상실을 경험하자는 것이 그 첫 번째이고, 고백의 언어를 인식의 언어와 더불어 발언하자는 것이 그 두 번째이며, 자신이 힘의 실체임을 비일상적인 언어로 수식하는 일을 삼가자는 것이 그 세 번째이며, 증오의 전승을 단절하자는 것이 그 네 번째입니다."(44)

 

생명과 죽음

이 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생명과 죽음에 대한 논의이다. 우리는 구제역으로 인해 수백만 마리의 가축들이 도축당하고, 자연재해와 테러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광경을 매일 목도하고 있다. 생때같은 젊은이들이 삶으로부터 퇴각하여 죽음의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삶과 죽음이 등을 맞대고 있는 쌍둥이임을 실감하는 나날이다. ‘살처분’이라는 살벌한 말은 우리 문명의 반생명성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기호이다. 한 생명의 소멸인 죽음은 남아있는 이들의 가슴에 슬픔과 고통을 남겨준다. 하지만 도처에 널린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담담하다. 현대문명은 대규모로 발생하는 죽음이라는 추문거리를 처리하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죽음은 숫자로 환원되어 추상화되고 고통은 금세 잊혀진다. 죽음을 빚는 현실에 대한 논의는 차단된다.

 

하지만 죽음과 직면하기를 꺼리는 것은 현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은 일상에 담을 수 없는,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미지의 현실이고 두려움”(288)이다.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죽음을 지연하거나, 어떤 시스템 속에 가두려 한다. “그것은 의료혜택과, 보험의 지급과, 고통을 완화하는 치료와, 확장된 노년의 보살핌과, 위생적인 주검처리와, 편리한 장례와, 법률적인 갈등 없는 죽음 이후와, 종교적으로 제각기 정형화된 사후(死後)의 세계를 약속하는 것 등으로 구체화”(292)된다. 죽음을 포장하기 위한 온갖 것이 다 마련되어 있는데, 정작 죽음 그 자체는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어떻게 해서든 죽지 않는 것만이 선이라고 여기는 반자연주의적인 욕망, 망자(亡者)를 아예 배제해 버린 살아있는 자만의 생활세계, ‘죽어버림’과 ‘죽여버림’의 난무, 죽음과 관련한 금기나 신비마저 간과하는 상상력의 고갈 등이 우리의 죽음문화를 이루고 있”다(333)고 말한다.

 

저자는 죽음관의 정립이야말로 오늘의 삶을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말한다. “죽음문화의 상실, 죽음관의 부재, 아니면 건강한 죽음이해의 소멸은 곧바로 생명에 대한 존엄의 상실, 생명에 대한 외경의 포기, 그리고 알게 모르게 자신에 대한 끝없는 자학으로 이어”(333)지기 때문이다. 무릇 참다운 삶을 살고자하는 사람이라면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관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자리에 설 때 삶은 완성을 향한 여정이 된다. 죽음 자체가 인생의 목표는 아니지만,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염두에 두고 살 때 우리는 오늘을 의미 있게 살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죽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의 죽음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예수의 삶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20세기의 독일 철학자인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초월자 앞에서 느끼는 ‘두려우면서도 황홀한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야말로 모든 종교 체험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날 ‘와et’는 더 이상 둘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지 못한다. 자본주의화한 오늘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신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황홀한 신비’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외경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구에 응하는 연성화된 하나님을 일러 하비 콕스는 ‘사용자 중심의 하나님’(user-friendly God)이라 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찬미하면서도 그 위에 드러난 적나라한 죽음은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죽음은 이미 예수를 통해 처리되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외경심’이 줄어들면 ‘황홀감’도 더불어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사족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족을 덧붙여야 하겠다. 저자의 글은 경어체로 서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편하게 읽히지 않는다. 상당히 집중하지 않으면 논지를 따라가기조차 어렵다. 한 문장 속에 여러 가지 개념어가 동시에 등장할 때가 많다. 각각의 개념어들은 서둘러 결론에 이르고자 하는 게으른 독자들에게 발걸음을 늦출 것을 요구하곤 한다. 나아가다가 멈추고, 멈추었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어쩌면 복잡한 문장은 저자가 스스로의 생각과 인식을 확장하면서 여러 가지 상황에 적합한 언어를 찾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저자의 발걸음은 더디지만 일단 도달한 자리에서 내리는 판단은 단호하다. 어떤 때는 결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신도가 없으면 신도 없다’는 말이나 ‘종교는 선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악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지닌다’는 말이 그러하다.

 

평생을 종교학 연구에 매진해 온 노(老) 학자의 발언을 경청하면서 많이 아팠다. 근본주의적 경향을 강화해가고 있는 오늘의 기독교가 나락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직한 인식’을 외면하고 ‘열린 상상력’을 차단하고 있는 교회는 자칫하면 ‘신의 무덤’이 될 수도 있다. 이제 한국의 종교, 특히 한국교회가 저자가 제기한 질문에 대답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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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6-05 01:06)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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