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존 스튜어트 밀, 당신이 틀렸소 2011년 03월 17일
작성자 김기석

존 스튜어트 밀, 당신이 틀렸소

-게리 하우겐의 <<정의를 위한 용기>>

 

"친절만 몸에 밴 목회자들은 반복되는 일상에 빠져 매너리즘에 시달리고, 성경에 나오는 혁신적인 드라마나 모험, 갈급한 열정, 찬란한 능력 등은 먼 나라 이야기만 같다. 재능과 열정이 넘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정장은 차려입었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는 기분이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모험을 위해 배가 바다로 출항하는데, 우리는 승선하지 못하고 고요한 해변에 남아 있다."(29)

 

젊은 시절 신앙은 결단이고 모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명치 끝이 뻐근해지면서 어떤 비장함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빛이 바랜 그 말은 더 이상 내적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새로운 삶을 향한 인간의 투쟁이 성사聖事라면, 일상은 너무 진부해지고 말았다. 모리셔스 섬에 살던 도도새는 천적이 없어 날 필요가 없었고, 날개가 퇴화되면서 멸종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다. 너무 쉽게 세상에 투항하여 부정의 능력을 잃어버린 오늘의 기독교를 생각하면서 도도새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 과민한 반응일까? 섬 주민들이 주는 로터스 열매를 먹고 귀향을 잊어버렸던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처럼 어쩌면 우리는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짐짓 외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에 담긴 혁명적 메시지와 전복적 상상력은 날개 잘린 모습으로 교리와 신조와 전례 속에 갇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메시지를 찾아내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조리해 낼 줄 아는 이들을 추종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성경으로부터 아득히 멀어진다. 겨울 궁전의 따뜻한 난롯가에서 여후디로 하여금 예레미야의 예언을 낭독하게 하고는, 읽은 부분을 서기관의 칼로 잘라 내 난로에 던져 넣었던 여호야김 왕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고백과 삶의 분열

사설이 길어진 까닭은 게리 하우겐의 <<정의를 위한 용기>>가 준 충격 때문이다. 책 날개에 소개된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인권 단체인 국제정의 선교회(International Justice Mission)의 대표인 그는 하버드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했다. 미국 법무부에서 일하면서 출세의 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은 1994년에 UN의 르완다 대량학살 수사팀을 지휘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으면서 변곡점을 맞이한다. 변호사, 검찰, 경찰, 법의학 전문가들로 조직된 국제 팀을 이끌면서 그는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불의와 권력 남용에 저항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처음에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을 주변에서 찾았지만 결국 그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임을 자각한다. 1997년, 그는 마침내 "제3세계의 폭력적 착취, 노예 제도 그리고 압제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국제정의 선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안락한 삶의 자리에서 벗어나 광야로 나선 것이다.

게리 하우겐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인용함으로 책을 시작한다. 밀은 말이 무의미해지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런 현상에 대한 가장 좋은 본보기로 그리스도인을 내세웠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는 믿지 않는 가장 경이로운 사실을 말할 줄 아는 놀라운 능력을 소유한 것 같다고 했다"(11)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기독교인들은 온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랑, 화해, 용서, 은총, 나눔, 섬김, 돌봄…. 기독교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그 단어들은 현실 속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밀의 진단이다.

 

안전띠를 풀고 나아간 자리

"[그리스도인이] 이런 사실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들은 정말로 믿는다. 하지만 구체적인 토론 없이 늘 듣기 좋은 소리로만 믿을 뿐이다.…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습관적으로 존경을 표한다.…[그러나] 정작 행동이 필요할 때는 남을 찾는다. A씨나 B씨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려면 얼마나 더 멀리 가야 하는지 알려 주려는 것이다."(15)

 

아픈 지적이다. 이런 지적을 받을 때는 방어적이 되거나 자조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게리 하우겐은 그 속에서 오히려 역설적 희망을 본다.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행동한다면, 내 인생은 더 이상 움츠러들거나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12) 그는 남의 도움이나 필요로 하는 약한 사람이 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모할 정도로 행동에 돌입하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안전한 데까지, 내가 관리할 수 있는 데까지, 위험을 통제할 수 있는 데까지, 나의 특정 능력이 허락하는 데까지다."(15) 그를 일으켜 세워 세상의 불의와 싸우는 투사로 만든 것은 어린 시절의 한 추억이다. 열 살 무렵 그는 가족들과 더불어 레이니어 산에 갔다가 위험을 경고하는 표지판 앞에서 홀로 돌아선 기억이 있다. 아버지와 두 형이 산에 올라간 사이 관광 안내소 주변에서 시간을 보냈던 그 씁쓸한 패배의 기억이 그를 '모험적인 삶'으로 견인했던 것이다. '내가 관광 안내소에 주저앉은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이 없었더라면 그는 삶의 안전띠를 맨 채 여생을 보냈을 수도 있다.

 

안전띠를 풀고 현장으로 나갔을 때 그는 상처투성이 인류와 만났고, 문명의 뒤안길에서 숨죽이고 있는 억압받는 자들의 눌함訥喊을 들었다. 어떤 절박함이 그를 몰아갔다. 먼 곳으로 팔려가 매매춘 관광객과 외국인 소아 성애자에게 강간과 학대를 당하는 수많은 캄보디아 여자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자신의 무력감에 전율할 때 그는 하나님께 더욱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가여운 소녀들을 풀어 주시고 피해자들에게 최상의 후속 조치를 제공하시며, 범인을 응징하시고, 역겨운 사업을 망하게 하시고, 캄보디아 정부가 이런 일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시고 미국 정부가 그 비용을 지불하도록"(21) 일하셨다. 이것은 안전띠를 푼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역동성이다. 강도 만난 이웃을 돕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강도가 출몰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포기할 수 없는 선교적 과제가 아니던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

삶의 무게에 짓눌려 납작해진 기독교인들, 내면의 불꽃은 꺼지고 잿더미로만 남은 사람들에게 게리 하우겐이 열어 보이는 세계는 낯선 세계이고 위험으로 가득 찬 세계이다. 하지만 그 길이야말로 하나님과 만나는 길이었다. 승산이 없는 싸움인 줄 알기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리 하우겐은 이런 신앙적 전환을 "구원받은 사람에서 구원하는 사람으로"라는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구원받은'이라는 말이 신앙의 수동성을 의미한다면 '구원하는'이라는 말은 신앙의 능동성을 가리킨다. 신앙은 수동성은 능동적 실천을 통해 그 바름을 입증한다. 구원의 수동성만을 주입받아온 이들에게 '구원하는'이라는 표현이 적잖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런 표현에 매달려 본질을 놓칠 때가 많다. 그들은 주일마다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지만, 자신을 구원의 길로 부르신 분의 뜻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구원받음은 정태적인 어떤 가치가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신적 광휘이다. 게리 하우겐은 이것을 구원받는 것 자체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면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실행하시기 위해 꼭 필요한 수단"(31)이라고 말한다. 구원을 체험한 이들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게리 하우겐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구하라는 영예로운 소명을 저버리고 사소한데 만족하는 까닭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세상을 구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 문제의 크기에 압도당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절망감, 그리고 어두운 세상에 맞서는 일에 따르기 마련인 두려움이 그것이다. 이 셋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두려움일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내적인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게리 하우겐은 낙관론자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에서 벗어나 믿음의 최전선에서 하나님의 열정과 능력을 경험하기 원한다"(40)고 말한다. 무지와 절망과 두려움에 짓눌려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인간 속에는 자기 초월에의 갈망이 있다. 하지만 자기 초월이라는 비의의 세계는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알을 깨는 아픔이 필요하다. 게리 하우겐은 정의 사역이야말로 하찮고 사소한 두려움의 세계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하나님의 열쇠라고 말한다. 겁 많은 자의 용기로 정의 사역에 동참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수비만 하는 교회, 개인의 경건과 의로운 삶에만 치중하는 교회는 약해지게 마련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위해서는 공격을 잘 해야 한다. 교회의 공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성경이 명하는 대로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정의 사역'이라는 교회 본연의 사명을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십자가 네온사인은 꺼지지 않고, 영성이라는 말이 범람하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이 어둠인 것은 정의를 요구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싸우는 투사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불의에 가담하는 이들은 정의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재빨리 '좌파'라는 딱지를 붙인다. 성경의 세계를 한 획으로 가로지르는 정의의 요구는 한국교회에서 가뭇없이 스러지고 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수십만 권이 팔려나가는 현실 속에서 왜 교회는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강자의 폭력에 저항하라

정의란 무엇인가? 게리 하우겐은 정의를 잘 행하기 위해서는 불의에 대해 잘 규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불의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권력 남용이다. 즉 "강자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약자에게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빼앗는 행위"이다. 하나님이 모두에게 허락하신 것은 무엇인가? "생명과 자유, 존엄성 그리고 그 사람의 사랑과 노동에서 비롯된 소출"(49)이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은 대개 강자들이다. 세상에 만연한 고통의 대부분은 강자들의 의도적인 강압과 학대에서 비롯된다. 이런 세상에서 불의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천둥처럼 들려온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구조적인 불의로 말미암아 학대받는 이들에게 음식이나 거처, 교육이나 의약품만 제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고통의 증상만을 치료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록 스타인 보노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구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라고 말했다. 적확한 말이다. 부정의의 현실을 온존시키는 매커니즘은 폭력이다. 폭력이야말로 가난한 이들이 겪는 수많은 문제의 배후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폭력은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의도적이다. 국제정의선교회가 집중하고 있는 성매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다. 가해자들은 가난하고 무력하다는 이유 하나로 어린이들과 여성들을 짐승 취급했고 또 폭력을 휘둘렀다. 폭력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람들이 폭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성매매의 현장이나 노예 노동의 현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몸에 새겨진 폭력의 기억 때문이다. 폭력은 또한 피해자의 내면에 심각한 상처를 남긴다. 배신감, 수치감, 굴욕감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게리 하우겐은 실체를 알면 폭력을 근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의 사역에 투신했던 오랜 경험을 근거로 해서 그는 폭력을 가하는 이들이 결코 용감하지 않다고 말한다. 관건은 피해를 입은 이들이 진실을 말할 용기를 내는 것이다. 그들에게 든든한 후원자들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 곁에 다가서는 사람들, 그들 편에 가담하는 사람들 말이다. 오늘의 교회는 어떤가? 게리 하우겐은 "기독교 단체가 불의 문제에 1달러를 투자한다고 치면, 가난 극복이나 긍휼 사역, 복음 전도와 제자도 프로그램 등에는 약 100달러를 투자한다"(61)고 말한다. 미국의 통계이지만 우리의 경우와 별반 다를 바 없겠다. 정의를 구하고 학대받는 자를 도우라는 성경의 긴급한 명령에 따르기 위해서는 정의 사역에 대한 투자가 확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새로워지는 길이고 변화된 그리스도인을 낳는 길이다.

 

"믿는다는 말이나 믿는다는 확신만으로는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행동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 것"(78-79)이라는 달라스 윌라드의 말이나, "악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은 단 한 가지다.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에드먼드 버크의 말은 정의 사역에 참여하는 이들이 금과옥조로 여겨야 할 잠언이다. 용납할 수 없는 세상사에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사를 바로 잡기 위해 투신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의 불길이 아랍과 북아프리카에 번지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 불의와 억압에 항의하면서 모두가 사람 대접받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투신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은 지금부터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세상이다. 정의를 위한 싸움의 길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 얼마나 큰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속의 의구심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삶으로 본이 된 사람들

게리 하우겐은 어둠에 맞서 떨쳐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벨기에의 레오폴드 국왕의 식민 정책으로 말미암아 고무 농사를 비롯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던 콩고인들의 겪는 가혹 행위와 대학살 사태를 기록한 보고서를 남긴 윌리엄 셰퍼드(William Sheppard), 샌프란시스코의 폭력적인 매춘 사업에 맞서 싸워 마침내 소녀들을 구하고 '황인종 노예무역'을 종식시켰던 도날디나 카메론(D0naldina Cameron), 폴란드 유대인 거주지역에 있던 아동들을 나찌의 학살로부터 구출해낸 이레나 센들로나(Irena Sendlerona) 이야기는 변화된 한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징들이다.

 

게리 하우겐은 옳은 일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는 인간의 영혼 깊숙한 곳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라는 선물을 굳게 붙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동은 줄이고 묵상과 기도는 늘려야 한다. 그 다음에는 성경의 약속을 믿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모든 소유는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것들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면서 사용해야 할 것들"(107)이니 말이다. <<정의를 위한 용기>>는 우리를 선택 앞에 세운다. 안전을 택할 것인가, 용기를 택할 것인가?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안전한 삶의 자리를 떠나 더 나은 세계를 향하는 데 있지 않던가. 진실을 말하는 것, 궁핍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학대받는 사람들 편에 서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허위가 아니겠는가. 그 위험한 일에 동참할 때 신앙의 신비에 눈을 뜨게 된다.

 

<<정의를 위한 용기>>라는 이 작은 책은 오랫동안 우리가 오랫동안 소홀히 다뤄왔던 '정의'의 문제야말로 교회 회복의 돌쩌귀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 책을 덮으며 떠오른 것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백이었다. 성자들의 전설을 듣고 자랐지만 그는 마음의 헛헛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성자들이 너무 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 앞에서 자꾸 머리만 조아리며 설설 길 뿐이었다. "내 몸속에서는 크레타의 피가 끓어올랐다. 크레타의 피를 확실히 염두에 두지는 않았지만, 나는 참된 인간이란 아무리 곤경에 처했어도 신의 앞에서까지도 저항하고, 투쟁하고,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단정을 내렸다."(<<영혼의 자서전 1>>, 열린책들, 99쪽) 불의와 폭력의 현실 보고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가난하고 연약한 인류에게 다가서기가 망설여진다면,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과연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이 책을 읽는 이들이 부디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이 참이 아님을 삶으로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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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4-11 06:04)
목사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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