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3 2011년 02월 18일
작성자 김기석

요한복음 묵상3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에, 많은 사람이 그가 행하시는 표징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시므로,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 그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증언도 필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2:23-25)

 

표징을 보고 믿더라도 믿으면 그만 아닌가? 그렇지 않다. 문제는 그런 믿음은 사람을 든든하게 세우거나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병들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예기치 않았던 표징을 본 사람의 흥분과 설렘을 모르지 않는다. 여름날 긴 장마에 지쳐 ‘이제는 제발’ 하는 심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먹구름 사이로 얼핏 드러나는 푸른 하늘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 푸른 하늘은 이내 구름에 가리우고 또다시 먹구름 아래서 살아야 할 일상이 남는다. 흥분과 들뜸, 그것은 간혹 힘겨운 일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삶에 대한 착시를 가져오기도 한다.

 

사람들이 본 것은 ‘예수라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가 한 일’이었다. 실체가 아니라 거죽에 집착하는 것이다. 바다와 파도가 둘이 아니고, 실체와 거죽이 둘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파도가 곧 바다라거나 거죽이 곧 실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예수가 한 일에 매혹되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를 향한 길에 접어드는 순간 등을 돌릴 가능성이 많다. 예수는 사람들의 흥분된 반응에 덩달아 흥분하지 않는다. 요한은 그 까닭을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도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오직 자신의 통찰에만 의지하는 정신의 독립군이다. 아아, 타자의 눈으로 나를 살피고, 그들의 평가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나는 얼마나 작은가! 우리 가슴에 하늘을 받칠만한 기둥 하나 우뚝 선다면, 내면을 밝히는 신령한 빛이 꺼지지 않는다면…….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3:3-5)

 

유대인들의 지도급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를 찾아왔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여 밤중에. 니고데모, 나 어찌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목마른 사람이다. 목이 마르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라는 샘가에 얼씬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동료들의 손가락질이나 조롱을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옷자락을 잡아당겼지만, 그래서 어둠을 장막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지만, 인력을 거스를 수밖에 없도록 하는 어떤 내적 끌림이 있었기에 그는 예수 앞에 나왔다. 예수는 피투성이가 된 그의 영혼을 보셨다. 그가 혼신의 힘으로 진리를 구하고 있음을 아셨다. 그에게 진리의 문제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였던 것이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다북쑥 우거진 것 같은 인생길을 헤쳐 나갈 칼 하나를 내리신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지만, 오호 애재라. 니고데모가 꿰뚫기에는 너무 낯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무지를 드러낸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비웃지 말자. 무지를 감추는 게 문제지 드러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배울 수 없다. 니고데모는 ‘다시’라는 말을 오해했다. 헬라어 ‘아노덴anothen’은 ‘다시’라는 뜻도 있지만 ‘처음부터’, ‘철저히’라는 뜻도 있다. 다시 난다는 말은 그러니까 철저한 변화 혹은 전복을 이르는 말이다. 변화는 언제 일어나는가? 자기 자신이 문제임을 자각할 때이다. 탓할 것이 남에게 있지 않고 내게 있음을 알 때 변화는 시작된다. 하지만 예수님이 ‘다시 난다’고 굳이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변화의 주체일 수 없음을 가리키고 있다. ‘다시 남’은 삶의 개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근원에 속하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시인 구상은 <말씀의 실상>에서 “영혼의 눈에 끼었던/무명의 백태가 벗겨지며/나를 에워싼 만유 일체가/말씀임을 깨닫습니다”라고 노래한다. ‘무명의 백태’가 벗겨지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의 말씀이더라는 것이다. 이 신령한 세계, 하나님의 거하시는 땅에 살면서도 우리가 지옥의 원주민처럼 사는 까닭을 알 것 같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에 갇힌 수인들인지도 모른다. 그림자를 실체로 알고 사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주님의 말씀이 떨어진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은 굳이 세례와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 두 단어는 공히 철저한 변화를 가리키는 일종의 환유換喩이니 말이다. 오독의 위험을 무릅쓰고 멋대로 이 구절을 씹어 맛을 본다. 노자는 가장 큰 덕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자리를 다투지 않고, 뭇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가기를 좋아하는 물을 닮았다 했다. 흐름에 순順하면서도 기어코 바다에 이르는 물처럼 그렇게 유장하게 흐르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에 이르고 싶다. 성령의 이미지는 불이다. 촛불을 본다. 주위를 아늑하게 만드는 부드러운 빛이다. 조그마한 바람에도 흔들리지만 이내 몸을 일으켜세운다. 하늘을 향한 그리움, 그 통절한 그리움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직립의 사람이다. 세상의 어떤 무게가 얹혀도 무너져 내리지 않는. 안타깝구나, 니고데모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분을 앞에 두고도 깨닫지 못하다니.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3:8)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는 바람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은 있다. 바람의 ‘있음’은 언제나 사물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드러난다. 바람과 만난 나뭇잎은 살랑거리며 설렘을 드러내고, 호수의 물은 바람의 부름에 물결로 응답하고, 바람을 탄 매는 높은 하늘을 유영하듯 난다. 성령으로 난 사람에게는 억지가 없다. 시끄럽지 않다.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사람들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거기 있어 생명을 일깨우는 사람, 그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란다. 아, 우리는 아직 멀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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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3-09 03:03)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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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09-27 08:09)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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