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2 2011년 01월 29일
작성자 김기석

요한복음 묵상2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와 형제간인 안드레였다.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말하였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게바’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말이다.)(1:40-42)

 

‘가장 친한 친구의 불행 속에는 기분 나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고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아주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공감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12:15)라고 권한다. 참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기뻐하는 사람은 질시의 대상이 되고, 우는 사람은 기피의 대상이 되는 게 현실이다. 교회가 오랫동안 가르쳐온 일곱 가지 죄의 뿌리 가운데 하나가 ‘인색’이다. 재물을 체면 없이 아끼는 것만이 인색이 아니다. 누군가의 장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못하는 마음의 조붓함도 인색이다.

 

세례자 요한은 그런 의미에서 인색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는 자기 곁을 지나가는 예수를 보며 제자들에게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 둘이 예수를 따라갔다. 자기에게 등을 돌리고 멀어지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요한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씁쓸하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때문에 예수를 질투하지 않는다. 그는 자아를 여읜 사람 곧 ‘나’로부터 해방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라갔던 안드레는 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형 시몬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 예수가 그에게 어떤 비밀스런 지혜를 전수해 준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전하는 매체로서 언어는 얼마나 부적절한가? 가장 적절한 표현을 찾았다 해도 여전히 표현되지 않는 뭔가가 남게 마련이다. 그래서 진리는 비언어적 매개를 통해 전달될 때가 많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표정, 음식을 먹거나 그릇을 씻는 모습, 사물을 바라보는 눈길이나 앉음새…그 하나하나가 그의 존재를 가리켜 보인다. 안드레는 자기 가슴에 어떤 신령한 불꽃이 타오름을 느꼈다. 진정한 만남은 이처럼 사건을 일으킨다. 그는 그 불꽃을 누군가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형 시몬을 예수에게 데려왔다. 만남과 체험과 새로운 초대의 이 아름다운 순환이 새로운 세상을 예비한다.

 

예수는 자기 앞에 온 시몬을 눈여겨보시고는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고 하셨다. 갈릴리의 거친 파도와 싸우며 그물을 던져 목숨을 부지해왔던 그 시골 촌부를 예수는 든든한 ‘바위’라 부른다. 예수는 시몬의 내면에 가능성으로만 잠재해있던 ‘바위’를 보고 그것을 호명함으로써 그를 새로운 세상의 초석으로 삼으신다. 예수는 모든 존재의 심층에 도사리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마중물이다. 오늘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이들의 가슴에서 무엇을 불러내고 있는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타자의 가슴에서 우리가 호명해낸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두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47)

 

돌로매의 아들인 바돌로매를 요한은 나다나엘이라 부른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니?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는 모두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는 저마다의 선물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다. 지금 내 눈에 못마땅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이고, 그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떤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일러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른다. 거짓이 없어 외로웠던 바돌로매, 자족적 참됨에 머물던 그가 진심을 알아주는 예수를 만나 하나님의 선물이 된 것이다. 옛 사람은 회사후소(회사후소)라 했다. 흰 바탕이 있어야 색을 입힐 수 있다는 말이다. 거짓이 없었기에 그는 진실 자체이신 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예수께서 일꾼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그래서 그들은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하시니, 그들이 그대로 하였다.(2:7-8)

 

‘갈릴리의 작은 마을 가나’ 하면 사람들은 즉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의 첫 번째 이적을 떠올린다. 하지만 내게는 전혀 다른 영상이 떠오른다. 자, 결혼식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들뜬 것은 신랑과 신부만이 아니다. 온 마을 사람들, 심지어는 개들까지도 들떴을 것이다. 결혼식 잔치의 기본 정조는 기쁨이다. 모처럼 마을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맛깔스런 음식과 술로 기분을 내고, 객쩍은 소리도 나누면서 서로의 하나 됨을 확인하는 자리이니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 요한은 예수가 그 잔치에 참여했다고 말한다. 마지막 순간에 등장하여 짠! 하고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한 말씀’ 하기 위해 초대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잔치의 일부로서 참여했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는 그 자리에서 예수는 어떤 표정을 짓고 계셨을까? 그 점잖지 못한 처신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계셨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어깨동무도 하고 춤도 추면서 한껏 기뻐하는 예수의 모습을 본다. 멋지지 않은가?

 

그러나 잔치가 무르익어 갈 무렵 문제가 생겼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다. 당혹감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는 주인의 처지를 눈치 챈 마리아는 아들 예수에게 그 사실을 넌지시 이른다. 예수는 잠깐 망설이지만 곧 그들의 곤경을 해결해 줄 방도를 찾으신다. 그는 일꾼들에게 물 항아리 여섯마다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신 후, 그 물을 떠다가 잔치 맡은 이에게 가져다주라 이르셨다. 잔치 맡은 이는 포도주 맛을 본 후 신랑을 불러 끝까지 좋은 포도주를 아끼지 않은 것을 치하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산마다 단 포도주가 흘러 나와서 모든 언덕에 흘러 넘칠 것”(암9:13b)이라던 예언자의 비전이 예수를 통해 실현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요한이 정작 이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예수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삶을 축제로 바꾸기 위해서라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오히려 예수가 있는 곳에서 삶은 축제로 변했다고 말해야 한다. ‘함’이 ‘있음’에 앞설 때 삶은 고역이 되고, ‘있음’이 ‘함’에 앞설 때 삶은 축제가 된다.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울 일이 아니다. 예수를 삶 속에 모시면 된다. 그러면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일쯤은 일도 아니다. 자, 이제는 예수와 더불어 노래하고 춤춰야 할 때이다. 아 잠깐. 시인 바이런은 이 놀라운 사건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 "물이 주인을 만나매/그 얼굴이 붉어졌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2:18-19)

 

성전, 그것은 유대교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 됨을 보장해주는 성채였다. '가름'에 기초한 정결법체제가 사람들을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됨을 모르지 않았지만, 성전은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금기의 공간이었다. 춘분이나 추분이 되면 해가 바로 앞에서 떠올라 등 뒤로 진다는 것을 알게 된 원주민들은 그곳이 바로 세상의 축, 혹은 우주의 배꼽이었다. 그곳을 일몰의 신인 샬림(Shalim)의 거주지라 하여 예루살렘이라 하였다. 고대로부터 신성한 땅으로 여겨졌던 그곳에 성전을 세웠다. 성전은 우주의 위계적 질서를 공간 속에 재현해놓은 구성물이었다. 이방인의 공간, 여인들의 공간, 남성들의 공간, 제사장의 공간인 성소, 그리고 지성소. 지성소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비의의 세계이고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성소에 드나들 수 있는 사제계급의 직위에는 이미 다른 이들이 넘볼 수 후광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후광은 온갖 비판을 차단하는 보호막이 된다. 불퉁거릴 수는 있을지언정 성전 체제 자체를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금기시되었기에 사제 계급은 마음껏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상인들과 결탁하여 제 배를 불려도, 성전세를 받아 호사를 누려도 누구 하나 대들 수 없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의례로 대체되면서 종교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이런 것을 일러 '카리스마의 루틴화 routinization of charisma'라 했다. 알짬은 쏙 빠지고 형식만 남는 것 말이다.

 

예수는 그런 성전체제를 부정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내쫓고 환전상의 상을 둘러엎었다. 이 가차 없는 예수의 폭력! 왜 내 몸에 소름이 돋는지 모르겠다. '본本'을 붙들지 않고 '말末'에 집착하는 종교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섬김, 나눔, 돌봄, 비움, 낮아짐을 버리고, 힘에 대한 선망에 빠진 오늘의 개신교회를 향해 들려오는 주님의 사자후를 듣는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표징을 보이라고?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했냐고? 배후가 누구냐고? 많이 듣던 소리다. 배후는 하나님이고, 자격은 사람의 아들이면 되는 것 아닐까?

목록편집삭제

정병철(11 03-09 02:03)
감사합니다. 목사님.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