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타자를 상상하다 2011년 01월 29일
작성자 김기석

타자를 상상하다

 

1. 인간, 시간 여행자

낙원에서 추방된 후 태어난 최초의 인간 가인은 형제 살해자가 되었다. 그룹과 빙빙 도는 불칼이 지키고 있는 에덴으로의 복귀는 고망한 노릇이 되었고, 가인은 동쪽으로 이주하여 '놋' 땅에서 살게 되었다. '놋'은 '유리하다, 방황하다'라는 뜻이라 한다. 하나님 앞을 떠난 인류, 형제간의 갈등 속에서 살아갈 인간의 어두운 운명을 암시하는 지명이다. 에덴 이후 인간의 내적 운명을 규정짓고 있는 것은 '불안'이다. 시간 여행자인 인간은 '불안'이라는 실존적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유한함과 삶의 불확실성, 삶의 무의미성에 대해 순간순간 자각하며 산다는 것은 참 잔혹한 일이다.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의미'이다. '의미'는 '불안'의 해독제이다.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 의미는 객관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구성해가는 것인가? 집 없는 이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는 엠마우스 운동을 시작했던 피에르 신부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피에르 신부는 엠마우스 운동 초창기에 있었던 일화를 들려준다. 삶의 극한에 몰렸던 조르주라는 사나이가 자살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간 피에르는 그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후, 그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한다. 기왕 죽기로 했으니 죽기 전에 내 일을 좀 도와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조르주는 이 낯선 요청을 받아들였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조르주에게 필요했던 것은 '삶의 방편'이 아니라 '삶의 이유'였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희망의 인문학'이 유행하는 것도 비슷한 상황을 반영해주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보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죽음의 집의 기록>>을 썼다. 그곳에서 그는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극단적인 굶주림, 굴욕감, 격절감, 두려움 등의 정서는 불편하기는 하지만 견딜만 하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유형살이의 가장 큰 고통은 단 한 순간도 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홀로 있음'은 결국 '성찰적 거리'를 확보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참혹한 형벌은 '아주 전적으로 쓸모없고 무의미한 성격의 노동을 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의미 없음'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던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이 전해주는 이야기와 유사하다. 그에게 인간을 살게 하는 힘은 '의미에의 의지'이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말도 같은 맥락을 가리키고 있다.

 

2. 사람됨을 구성하는 두 가지 질문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람들의 불안감은 여전히 가시질 않고 있다. 오히려 행복은 카프카의 성城처럼 아무리 다가서려 해도 여전히 저만치 떨어져 있다.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늘어나고, 자기를 잊기 위해 술과 마약에 의존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의미를 구성하는 능력'이 퇴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마틴 부버의 구분대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 삶은 '나와 너'의 관계보다는 '나와 그것'의 관계 위에 세워지고 있다. '그것' 세상에서 개인은 외롭다. '그것' 세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삶의 근본을 성찰해야 한다.

 

성경은 인간의 이중적 책임을 강조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나님이 그 남자에게 물으셨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는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구나' 하는 책망이다. 인간이 있어야 할 곳, 그곳은 하나님 앞이다. '앞'은 물론 '관계'를 이르는 말이다. 함석헌 선생은 영성이란 '전체의 뜻에 수정된 마음'이라 했다. 유한하고 개별적인 자아를 넘어 자꾸만 '전체'이신 하나님의 뜻을 조회하고 그 뜻에 맞추어 자신을 조율해 갈 때 인간은 인간답다.

 

에덴 이후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지신 질문은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였다. 이 질문도 역시 책망이다. 하지만 가인은 짐짓 모른 체 하며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꾸한다. 우리는 가인의 이 퉁명스러운 응답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인간의 인간됨은 '너'의 필요에 응답하고, '너'와 연루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실현된다. 누군가의 물질적 필요는 우리의 영적인 과제이다. 러시아 철학자인 미하일 바흐친은 말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교류한다는 뜻이다.……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내면의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그는 전적으로 항상 주변 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의 눈을 보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다."

 

야훼 하나님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실존적 과제를 이렇게 제시하셨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기19:1) '거룩'이라는 말처럼 오용되기 쉬운 말이 없다. 이스라엘의 정결체제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은 '거룩'이라는 척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정결/부정, 남자/여자, 유대인/이방인……. '거룩'이 가름으로 기능할 때 그 척도를 지니고 있는 자는 권력자가 된다. 하지만 레위기의 성결법전을 읽다보면 '거룩'이 '가름'만이 아니라 '부둥켜안음'도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도 거룩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성결법전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지시한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두고, 상거래를 할 때 부당한 저울을 사용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품삯을 떼먹지 않고, 7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자칫하면 공동체에서 살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배제되기 쉬운 이들을 배려하는 것이 거룩이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

 

3. 과학, 예술, 종교와 철학

종교학은 인간을 동물과 구별해주는 몇 가지 요소에 주목한다. 그림을 그리고(예술), 도구를 제작하고(과학), 무덤을 만드는 것(종교와 철학)이 그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물론 수렵채취 시대의 사냥 의식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인간의 추상적 사고가 시작됐음을 암시해준다. 동물들도 도구를 이용하기는 하지만 자기 의도에 맞게 도구를 제작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무덤을 만드는 것이 시신의 훼손을 막고자 하는 것이라면 고대인들이 자기의 죽음을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술과 과학과 종교는 인간의 인간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답다'는 말은 일부 체언 밑에 붙어서, 그 체언이 지니는 성질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의 형용사를 만드는 말이다. '임금답다', '아버지답다', '목사답다'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임금, 아버지, 목사'라는 존재들에 대한 기대치를 표현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체언의 성질이나 특성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다. 인문학(liberal arts)이란 그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그 특성을 탐구하는 일체의 노력, 즉 인간에 대한 사유, 표현, 실천의 종합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다양한 욕구에 주목한다. 인간이 이루어내는 삶의 궤적은 결국 욕구의 성취와 좌절이 빚어내는 무늬이기 때문이다. 매슬로우가 인간의 욕구를 다섯 가지(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로 구분해 놓은 것도 사실은 '인간답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철학이나 종교는 인간이 자아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차원'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나' 세상을 넘어 '우리' 세상으로, 더 나아가 '우주'로 사유의 경계를 확장해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블레즈 파스칼의 말이 지시하는 바도 마찬가지 차원일 것이다. 생각을 통해 자꾸만 다른 차원에 접속하면 일상적 현실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마련이다. 다른 차원에 접속하지 못할 때 삶의 근본적 변화는 불가능해지고 힘겨운 적응만 남는다.

 

4. 타자에 대한 상상력

그런데 문제는 인생은 모호하고 따라서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정답이 없다는 사실이다.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종교는 'the Way'를 가리키지만, 삶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관념적 진실도 삶의 현실 앞에서는 힘을 잃을 때가 많다. 구체적 삶은 우리의 인식 세계를 매끄럽게 빠져나가곤 한다. 그렇기에 어느 철학자는 '진리眞理'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피하면서 '일리一理의 해석학'을 내놓는다. 답 없는 삶을 살고, 길 없는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시인 김승희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2>에서 '당연'과 '물론'이 지배하는 세계에 사는 힘겨움을 보여준다. '당연'의 세계에서 홀로 당연하지 못하기에 그에게 세계는 항상 낯설다. 세상은 사람들을 당연의 세계, 물론의 세계에 길들이려 한다. 하지만 길들여지지 않는 이들이 있다. 시인은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물론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하고 노래한다.

 

우리 곁에는 당연과 물론의 세상에 길들여진 이들도 있지만, 도무지 길들여지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때 사람들은 '우리'와 '그들'을 가르고는 문제는 늘 '그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인류 역사는 어쩌면 '그들'에 대한 폭력으로 점철되어 왔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인류가 인류에게 저질러온 수많은 폭력, 과오, 실패, 지배의 역사 위에 서있다. 가름과 배제를 지배원리로 삼는 문명은 실은 야만이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가름을 넘어, 낯선 타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것을 일러 교양이라 한다.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있는 재일동포 학자 서경식은 교양을 책임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이라 정의한다.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교양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폭탄공격을 당하는 쪽의 고뇌와 아픔을 상상하는 힘은 전쟁에 저항하고 평화를 쌓기 위한 기초적 능력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라는 책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감적이며 이타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적 배려의 가장 성숙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는 공감을 배우고 익히는 데 '놀이'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놀이를 통해 "우리 자신을 다른 페르소나, 다른 역할, 다른 상황에 대입하여 상상력을 펼치고 저 사람이라면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려 한다"는 것이다. 인문학자들은 이처럼 인간의 인간됨은 타자와의 관계맺기 방식을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5. 영성과 인문학의 상호수혈

교회가 추문거리가 되어버린 우리 현실을 돌아본다. 개신교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배타성'이라 한다. 이웃 사랑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받아들이는 기독교가 배타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다른' 이들의 세계를 향해 '화육'하기보다는 그들을 동화시키려는 것이 주류 기독교의 지향이다.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가차 없이 '지옥'을 선고한다. 교회는 점점 갑각류를 닮아간다. 경계선을 가로지르며 소통의 길을 열고, 인류와 생명세계의 궁극적 하나 됨을 지향해야 교회가 오히려 소통을 지체시키는 권부 구실을 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히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인간이 노정하고 있는 삶의 다양한 무늬를 되짚어보고, 사람의 모듬살이가 빚어내는 풍경을 성찰하며, 소통과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인문학자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배우려 하지 않고, 성찰하려 하지 않는 것이 한국 교회의 문제이다. 다른 삶을 꿈꾸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진실은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제기하고, 널리 만연된 경건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인문학은 교회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동지이다. 수전 손택은 "문학은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고, 발휘하도록 해줄 수 있다"(<<타인의 고통>>, 208쪽)고 말한다.

 

절망을 거치지 않은 희망이 위태롭고, 어둠을 모르는 빛이 공포이듯이, 치열한 질문과 회의를 통과하지 않고 제시되는 정답은 오히려 우리 삶을 질식시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공감일 때가 많다.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즈 빌닷 소발의 실패는 공감의 언어를 사용해야 할 자리에 자기 나름의 정답을 들이댄 것이다. 욥의 불행을 아파하며 칠일 밤낮을 함께 앉아 있었을 때 그들은 우정의 사람이었지만, 자기들의 신학을 가지고 욥의 삶을 재단했을 때 그들의 말과 행동은 폭력이 되었다. 시간 여행자인 인간의 삶은 불확실성 속에서 흔들리지만, 지금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 때 우리는 그 손을 마주잡아주는 더 큰 손을 만나게 된다.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에고'로 회귀하려는 이들의 눈과 귀를 '다른 세계', '더 큰 세계'를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신앙의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비사회'는 욕망을 극대화하고, 불만족을 일깨움으로써 사람들을 확고히 사로잡아 버린다. '소비사회'는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 '다른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한다. 축복이라는 미명 하에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종교적 두려움을 주입해 사람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종교는 번성하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 자기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자의 시선'이다. 인문학은 그런 의미에서 신학의 좋은 파트너이다.

 

목록편집삭제

정병철(11 02-06 09:02)
감사합니다 목사님^^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