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의 길은 땅의 길과 이어져 있다 2011년 01월 12일
작성자 김기석

하늘의 길은 땅의 길과 이어져 있다

 

손석춘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저물녘, 눈을 이고 선 산봉우리들을 멀리서 바라보면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그러다가 잿빛 도시에 눈길을 돌리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 속에서 복닥거리며 살아가는 장삼이사들의 애환이 가슴에 스며들기 때문일까요? 올해는 유난히 소한 추위가 매섭습니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제트 기류가 형성되어 이상 한파가 지속된다지요? 미국에서는 찌르레기를 비롯한 새떼가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강에는 죽은 물고기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게 묵시문학적인 전조가 아닌가 두려워합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일은 과거에도 있었다면서 그런 현상을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 위해 진력하지만, 사람들의 두려움은 줄어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유동하는 공포'가 말 그대로 우리 사이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새와 물고기의 떼죽음보다 더 묵시문학적인 징조로 보이는 것은 지금 이 산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짐승들의 떼죽음입니다. 병들어 죽는 것보다 인간들에 의해 '살처분'되는 짐승들을 보면서 저는 우리 문명의 본모습을 본 것 같아 오싹해졌습니다. '살처분'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 문명의 폭력성과 반생명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어떤 생명도 처분의 대상인 세상은 얼마나 끔찍합니까? 사람들은 구제역으로 인해 죽음에 내몰린 가축들과, 자식처럼 기른 짐승들을 사지로 보내며 하늘만 바라보는 축산농민들의 아픔을 보며 혀를 찹니다. 그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고기를 맛있게 먹어댑니다. 그 시간 무고한 생명들을 처분하는 일을 맡을 수밖에 없는 이들의 가슴에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어둠이 깃들고 있습니다. 산 짐승들에게 죽음의 약을 투입하면서 수의사들은 동물을 살리려고 선택했던 길이 오히려 동물을 집단적으로 죽이는 일에 사용됨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무고하게 죽어가는 동물들의 눈망울이 떠올라 밥을 넘기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기도 합니다. 살처분된 소의 근육이 이완되면서 태어난 송아지, 그 눈도 뜨지 못한 생명에 독극물을 투여하면서 억눌린 한숨을 토해내는 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지난 일년, 교회의 환경실천의 일환으로 육식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반생명적인 문화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여러 가지로 불편한 게 많았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외식을 해야 할 때마다 선택의 가능성이 제한되었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되어 그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육식 금지를 해제할까 생각하던 참인데, 이런 참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귀에 쟁쟁하게 울려오는 소리 때문에 참 괴롭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이 던진 질문입니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창4:10-11). 너무 과민한 반응이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자꾸만 들려오니 어쩝니까? 저 아스라한 죽음의 심연으로 내몰리는 가축들을 보다가 모든 생명은 살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자각한 후 생명 경외의 외길을 걸었던 앨버트 슈바이처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모든 것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죽은 채 길 위에 놓여 있는 벌레는

한때 생명체였고,

우리들처럼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을 것이고,

태양 아래서 즐거워하고,

공포와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썩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곧 맞부딪치게 될

우리들의 모습이다.

 

눈이 부시도록 청명한 겨울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저 짐승들의 운명이 미구에 닥쳐올 우리 운명의 전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슈바이처가 연주한 바하의 오르간 곡 "The Prelude & Fugue in E minor"를 들으면서 장엄하다는 느낌보다는 비장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제 마음의 풍경이 음악에 투사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손 선생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종교의 본령일진대 오늘 한국의 기독교는 그 길에서 한 걸음쯤 비껴선 자리에 서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싸잡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쩌면 생명 평화의 길을 향해 꾸준히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이들을 낙심시키는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다만 교계의 전반적 상황이 그렇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의 컬럼을 읽다가 피식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낯선 이들에게 목사로 소개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게 되더라고 고백했습니다. 더 말하지 않아도 그 심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더군요. 목사인 게 죄송한 시대입니다.

 

이런 지레 엎드림을 통해 어벌쩡하게 저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다르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임을 직시하고픈 것입니다. 하지만 아프고 서럽습니다. 저는 예수라는 존재는 인류라는 나무가 피워낸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꽃의 길을 가겠다는 이들이 이루어낸 삶의 모습이 너무 참담하기 때문입니다.

 

김교신 선생님이 <성서조선> 1942년 3월호에 썼던 글 '조와弔蛙'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곳, 가느다란 폭포 밑에 형성된 작은 담潭 옆에 있는 평평한 바위가 선생의 기도터였다고 합니다. 기도를 올리다보면 개구리 몇 마리가 엉금엉금 기어오곤 했는데, 늦은 가을이 되어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하면서 개구리의 기둥이 완만하여지더니, 마침내 두꺼운 얼음이 언 후에는 기도와 찬송 소리가 들려도 개구리 친구들은 기척조차 없었습니다. 그렇게 격조한 시간이 지난 후 이듬해 봄, 봄비가 쏟아지던 새벽에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여 허리를 굽혀 담 속을 굽어보았는데 그만 개구리 사체 몇 마리가 둥둥 떠 있었습니다. 지난겨울의 혹독한 추위로 인해 담의 밑바닥까지 얼어붙어 전멸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선생은 개구리 사체를 모아 땅에 묻어주고는 혹시나 싶어 담 속을 들여다보니 저 밑바닥에서 개구리 몇 마리가 기어 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야기 끝에 김교신 선생은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영탄으로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아, 전멸全滅을 면했나 보다!"

 

일제의 관헌은 이 불순한 글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지 <성서조선>을 폐간시켜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혹한의 겨울을 지나면서도 기어코 살아남은 저 끈질긴 생명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시대야말로 이런 희망이라도 붙들어야 할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양성우 시인이 말했던 '겨울공화국'은 지금도 여전히 변형된 모습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생명을 죽이고, 희망을 질식시키는 일들이 지금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시대가 또 있었는가 싶을 정도입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 선생님은 대구에서 만난 어느 60대 택시노동자와의 대화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60년을 살아온 그가 오죽했으면 '죽지 못해 산다'고 했을까 생각하니, 오달지진 못해도 그런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나의 삶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내가 이런 평안을 누려도 되나 하는 염려는 몸으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묘한 열등감으로 치환되곤 합니다. 그는 우리 시대를 '돈이 돈을 버는 시대'라고 요약했다지요? 선생님은 그것을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라 하셨습니다. 인간의 건강한 노동이나 창의성 혹은 멋진 교환이 아니라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은 노동의 소외는 물론이고 인간 소외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땅에 가깝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의 진동과 인심의 풍향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하는 이들이라 하겠습니다. 남미에서 시작된 해방신학은 그런 것을 가리켜 '가난한 이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표현 역시 관념적이지만 그래도 사태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도처에서 들려오지만, 그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가슴에 아무런 울림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는 체념이거나, '나만 아니면 돼!' 하는 극단의 이기심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말을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키기에는 너무 여린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말에도 아픔을 느끼시니 이 험난한 세상의 협곡을 지나면서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어디에 희망을 두고 계신가요?"라는 질문은 차라리 하지 않으시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랬더라면 또 다른 번민과 분노에 시달리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그 택시 노동자가 했던 대답, 오직 하나 뿐인 그의 희망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었다지요? 이야기를 읽으면서 왠지 반전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이런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천국'을 말하면서도 그의 입술에 그려졌던 '허탈한 미소'는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자기가 누릴 정당한 몫을 박탈당한 자가 붙드는 신기루 같은 걸까요? 어차피 이승에서 누릴 내 몫은 없으니 저 세상에서라도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슬픈 자기 다짐인가요? 선생님은 "그게 오직 하나의 희망이어도 좋은 걸까?"를 물으셨습니다. 물론 그래선 안 됩니다. 그것은 바르지도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이 이분법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오해될 소지가 없지 않습니다. 하늘/땅, 영/육, 선/악, 미/추, 빛/어둠, 성/속을 가르는 것은 사유의 편의를 위해 택한 일종의 관습적인 신앙 언어였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하나를 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모호한 게 인생인데 그런 가름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이 둘은 가를 수 없을 만큼 가까이 부둥켜 안고 있는 짝개념입니다. 지향해야 할 방향은 있지만 다른 하나를 완전히 배제하려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분법적 언어에 기대는 것은 현실을 단순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이 되면 '그들'은 곧 악이 되는 것이지요. 그들을 악으로, 추함으로, 어둠으로, 속됨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들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원수가 됩니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나찌가 유대인을 박멸하기 위해 '언어규칙'을 바꿨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학살을 처방하는 암호는 '최종 해결책' 혹은 '특별취급'이었고, 이송과 관련해서는 '재정착'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 일 수행하기를 꺼리던 이들도 언어규칙을 바꾸어주자 별다른 저항 없이 자기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최종 해결책'이라는 말은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는 가책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는 방패였습니다. 살리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말이 때로는 죽이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종교적 언어의 오용입니다. 가장 거룩한 것은 자칫 폭력과 결합되기 쉽습니다. 내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할 때 나의 외부에 있는 이들은 오류에 빠진 이들이 되고,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순간 그들은 제거해야 할 적이 됩니다. 십자군 전쟁과 마녀 사냥, 그리고 유럽 사회를 어지럽혔던 종교 전쟁은 그렇게 벌어진 것입니다. 지난 세밑에도 이라크와 이집트에 있는 기독교회에 폭탄테러가 일어났습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저지른 일 같습니다. 하지만 위험한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근본주의는 다 위험합니다. 근본주의는 성찰과 질문을 거절합니다.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이다'라는 말은 그들에게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변형되곤 합니다. 이성적 사유는 믿음 없음의 징표일 뿐입니다. '믿음'은 삶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처방이 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수난>>에 나오는 포르투나스 선장은 사람을 경멸하는 사제를 일러 '걸신들린 인간'이라면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그는 약방을 열어 놓고 그걸 '교회'라고 부르면서 신을 무게로 달아 팔고 있어. 무슨 병이든 다 고친다고 하지만 순 돌팔이지. '그래, 무슨 일로 왔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좋아! 그리스도 3그램을 가져가게. 돈은 3피아스터야.' '도둑질을 했습니다.' '좋아, 좋아! 그리스도 4그램을 처방하지. 4피아스터만 내게. 그리고 자넨 왜 왔나?'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저런, 가여운 친구. 병이 아주 심각하군.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리스도 15그램을 복용하게. 돈이 좀 많이 들겠지만 말이야.' '조금 안 깎아 줍니까?' '안 돼. 15피아스터야. 돈을 내게. 그러지 않으면 지옥 밑바닥으로 직행이라네.' 사제는 자기 가게에 있는 성상들을 보여 주며 활활 타오르는 불길과 쇠스랑과 마귀들이 들뜷는 지옥 얘기를 하지. 그러면 손님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내고 말아……"(<<수난 1>>, 열린책들, 37쪽)

 

경건한 분들은 이 대목을 들으며 길길이 뜁니다. 저는 다만 입을 막을 뿐입니다.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린 대심문관의 세계가 아닐까요? 문학은 허구이지만 실제보다 더 실제다운 허구입니다.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하고, 땅에서 빚어진 갈등은 땅에서 풀어야 합니다. 불의한 현실을 이길 힘이 없을 때, 갈등을 해결할만한 지혜와 근기가 부족할 때 사람들은 일쑤 그 문제를 하늘로 넘겨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 일컫습니다. 예수는 우리 죄책을 사해주는 알리바이로 전락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경배의 대상으로 바꿈으로써 그를 따라야 하는 고단한 삶으로부터 도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본회퍼 목사의 표현을 빌자면 '값싼 은혜'에 탐닉합니다. 진리의 순교자인 본회퍼 목사 앞에 종아리를 걷고 매를 청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값싼 은혜란 싸구려 상품이요, 떨이로 팔아버린 사죄요, 떨이로 팔아버린 성례전이다. 값싼 은혜란 교회의 창고에 무진장 쌓여 있어서 언제나 손쉽게 무제한으로 제공될 수 있는 것과 같다."(<<나를 따르라>>, 기독교서회, 2010, 33쪽)

"값싼 은혜란 참회가 없는 사죄요, 교회의 치리가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적인 참회가 없는 사죄다. 값싼 은혜란 뒤따름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가 없는 은혜요, 인간이 되시고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다."(앞의 책, 35쪽)

 

손석춘 선생님,

선생님은 제게 한국교회가 전태일의 정신을 버린 것이 아닌지를 물으셨습니다. 작년 11월 우리 교회 청년들은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함께 읽었습니다. 몇몇 청년에게 그 책을 읽으며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고 물었습니다. 88만원 세대라는 씁쓸한 별칭으로 불리우는 청년들은 전태일의 시대와 우리 시대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사회 구조의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기에는 자신들이 너무 무기력하고 왜소해졌다고 말했습니다. 먹고사는 일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버린 시대에 살면서 불온함의 특권조차 반납한 젊은이들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전태일이 던진 불꽃 속에서 태어난 것이 민중신학입니다. 예수라는 존재를 '사건'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그것은 세계 신학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신학이었습니다.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도 비슷한 맥락에서 나왔다고 해야겠지요. 하지만 민중신학의 담론은 신학계의 주류담론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와 그 위에서 형성된 우리 욕망에 의문부호를 붙였기 때문일 겁니다. 민중신학의 불꽃이 사위게 된 것은 정치적 억압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부풀려진 욕망을 내파할 힘을 축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선생님은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언론이 지금처럼 변질된 까닭을 명백하게 밝히셨습니다. 오월 학살 이후 신군부는 '당근과 채찍'으로 언론 통제에 나섰다고 하셨지요? 당근은 박봉에 시달리고 있던 기자들의 월급을 대폭 올려주고 각종 특혜를 누리도록 해주는 것이었고, 채찍은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내쫓는 것이었습니다. 잃을 것이 없었기에 정론직필을 지향하던 기자들이 일단 잃을 것이 생기게 되자 저항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이리도 기독교회가 변질되어간 과정과 똑같은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멀리 거슬러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최근 수십 년만 돌아보아도 사태의 추이는 동일합니다. 대형교회들이 등장하면서 목회자들의 관심은 급격하게 교회 성장에 집중되었습니다. 다소 과격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교회는 악령에 들려 비탈길을 내리달리던 돼지 떼 신세가 된 것 같습니다. 제동장치는 없습니다. 영혼구원이라는 명분 이면에는 자기 확장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급격하게 성장한 교회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늘어나면서부터 교회는 예수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저 멀어진 게 아닙니다. 교회성장이라는 '주입된 욕망'이 지배하는 동안 예수는 침묵을 강요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적극적 사고방식이 복음으로 오인되고, 덧거친 세상에서 상처입고 지친 영혼을 위로한다며 교회가 부드럽게 변하는 동안 예언자적 통찰과 외침은 점점 잦아들게 되었습니다. 돈과 사람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목회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월적 시선을 버리고 체제 내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노정하고 있는 문제의 뿌리에는 교회가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교회의 상징이 더 이상 '말구유', '수건과 대야'가 아닐 때 교회는 예수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번영의 복음으로 성장한 교회는 이제 돌이켜 '비움'이라는 가치를 굳게 붙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민중신학이 "서재에서 나온 사변이 아니고, 한국의 정치현장에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이후의 신학이 이 명제를 잃어버려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셨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왠지 변명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정치현장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잘 띄지 않을지 몰라도 역사가 빚어낸 고통의 자리에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미군기지로, 대추리로, 용산 참사 현장으로, 생존을 걸고 싸우는 노동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들 곁에 머물고, 평화를 희구하는 촛불을 밝히고, 함께 눈물의 밥을 삼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헌신은 안팎으로 위협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주류 기독교는 그들을 '좌파'로 몰고, 사법기관은 구속과 벌금으로 길들이려 합니다. 그들이 내는 소리는 다섯 가지 소리에 귀먹은 이들의 귓가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이전에는 민주화를 지향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사람들을 하나로 엮어주었지만, 이제는 저마다 삶의 전장에서 살아남는 일에 몰두하는 세상이 되어버렸기에 사람들은 외로운 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의미'가 삶의 돌쩌귀이던 시절은 슬프지만 지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더 성찰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현장을 떠나지 않으면서,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성서의 알짬과 버무릴 수 있는 실력과 영성을 갖춰야 합니다. 현실 기독교를 지탱하고 있던 기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것은 분명 절망의 조짐이지만, 역설적으로 희망의 조짐이기도 합니다. 도의 움직임은 돌이키는 것이라지요? '본'을 버리고 '말'을 붙잡는 시대의 모순이 극대화되면 '본'에 대한 그리움 또한 깊어가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역사의 흐름이 아닐까요?

 

손석춘 선생님,

이제 선생님이 지난 번 편지에서 제기하셨던 물음에 답해야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민중에게 천국은, 하나님 나라는 어떤 의미일까"를 물으셨습니다. 참 중요하고도 민감한 질문입니다. '천국에 갈 희망 하나'로 살아가는 이들의 마른 가슴이 떠올라 씁쓸합니다. '오죽하면…'이란 생각이 들다가도 그 무기력함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내세로서의 천국을 희구하는 이들이 거의 일관되게 물질적 축복을 구하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가끔 신심 깊은 이들에게 질문을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현세적 복과 죽은 후에 누릴 천국에서의 복락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요? 이런 질문이 떠오른 것은 현세에서 누리는 풍요로움을 신앙의 진실함으로 치환하는 어떤 경향성 때문입니다. 이 경우 우리 사회의 그늘진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은 이미 믿음에 실패한 사람으로 규정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은 이중적 소외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천당에 가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또 우리를 그곳으로 초대하는 하나님 나라에는 꼭 들어가고 싶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신 예수님의 일성은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5)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공간적 실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어떤 현실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어떤 공간적 실체로 인식하게 된 까닭은 '나라'라는 상징어 속에 담긴 영토의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거기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던 마태가 그것을 '하늘'로 바꾼 것도 큰 요인 가운데 하나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하필이면 오해의 소지가 많은 '나라'라는 용어를 선택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유대 민중들이 처해 있던 상황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삶의 자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그리스 로마 문명권이 충돌하는 곳이었습니다. 제국의 흥망성쇠에 따라 그들의 운명은 요동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고 있던 로마의 지배는 민중들의 삶을 거덜내고 말았습니다. 가혹한 세금과 노역으로 말미암아 생존 그 자체가 문제인 상황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 나왔겠습니까? 노예가 되면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갈릴리 민중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제국의 지배를 전복하는 새로운 역사의 꿈이었습니다. 백향목처럼 우람한 이들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아니라, 씨가 뿌려진 곳 어디에서나 기어코 살아나는 겨자풀처럼 끈질긴 이들이 주인 노릇하는 새 세상의 꿈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라는 표상 속에 담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어 무너졌던 공의가 회복된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중심축으로 삼고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라는 기원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라는 기원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는 '먹을 양식'과 '빚의 탕감'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원은 1세기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비참한 삶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운동의 특색 가운데 하나가 식탁공동체였던 것도, 광야의 급식 이적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던 것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나그네를 집에 초대해 빵을 함께 나눌 때 눈이 열렸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겁니다. '죄의 용서'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뜻은 '빚의 탕감'입니다.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과중한 세금이나 이자 혹은 지대로 말미암아 빚에 몰릴 수밖에 없었고, 그 빚은 결국 자유민들을 날품팔이 노동자나 노예로 전락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비인간화의 과정을 깊이 통찰하셨기에 빚의 탕감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행위임을 일깨우셨던 것입니다. 이웃의 빚을 탕감한다는 것은 그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틴 부버의 표현대로 '나와 그것'의 관계로 구성된 세상을 뒤집어 '나와 너'의 관계로 구성된 새로운 세상을 꿈꾸셨습니다. 폭력과 지배를 밑절미로 하는 제국의 질서를 탈영토화하고, 우정과 돌봄과 섬김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를 재영토화하는 것이야말로 예수의 꿈이었습니다. 그 꿈이 허망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죽어서 가는 천국은 믿지 않느냐?'고 부르대며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보이는 듯합니다. 나는 죽음 이후에 더 온전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생명에 포섭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사로가 그랬듯이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기대 중에 기다립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두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하늘의 길은 땅의 길과 이어져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죽어서도 그 나라 백성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산다는 것은 결국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노동자들이 언제든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인식되지 않는 세상, 말 못하는 짐승들의 생명이라 하여 함부로 처분해버리지 않는 세상, 전쟁과 테러의 공포 속에서 숨죽이며 사는 이가 없는 세상, 인생의 낙오자가 되어 길거리를 떠도는 이들이 없는 세상,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지구 생태계를 거덜내지 않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믿는 자답게 산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대구에서 만나셨던 60대의 택시 노동자가 부디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내실도 없는 이가 언죽번죽 말만 앞세운 것 같아 영 마음이 개운치를 않습니다. 언제쯤 되어야 제 글이 가벼우면서도 정곡을 찌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인내하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직을 내려놓으셨다는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했습니다. 선생님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집니다. 가시는 길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