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요한복음 묵상1 2010년 11월 30일
작성자 김기석

요한복음 묵상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자,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1:1-5)

 

아련한 그리움으로 과거를 돌아보면서 때로는 후회도 하고, 터무니없는 자부심으로 우쭐거리기도 하고, 절치부심하기도 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뿐이리라. 우리의 정체성의 뿌리가 과거에 맞닿아 있기에 우리는 과거를 돌아본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가다보면 저 아득한 우주의 어둠처럼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기억의 소실점도 있게 마련이다. 탄생 이전의 기억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래서인가? 토마스 만은 말한다. “길이를 알 수 없는 시간 여행을 떠나면서 깊이를 가늠해 주는 추를 매단 실타래를 풀고 또 풀어봐도, 만물의 시원은 다림추 앞에서 번번이 더 깊은 곳으로 도망쳐버린다.”(<<요셉과 그 형제들>>1권, 22쪽) 아무리 노력해도 당도할 수 없는 뿌리 시간을 일러 성경은 ‘태초’라 한다. 태초는 그러니까 시간의 시작이라기보다는 우리 정체성의 시원이다.

 

요한은 그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한다. 과거형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사실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 말씀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런데 요한은 말을 바꿔 그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말한다. 참 어렵다. 하지만 어려울 것 없다. 관념적으로 생각하면 어렵지만 이미지의 언어로 생각하면 어렵지 않다. 파도가 바다의 일부이지만 그 자체가 이미 바다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과 구별될 수 없는 하나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 말씀은 숨이 깃든 말(말숨)이다. 숨이 깃든 말씀이 발화되는 순간 사건이 일어난다. 빛과 어둠이 나뉘고, 땅과 푸른 하늘이 나뉜다. 푸른 움이 돋아나고, 해와 달과 별이 조화롭게 나타난다. 각종 생물과 인간까지도 등장한다. 말로 지어졌기에 각각의 피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깃들어 있다. 세상 만물은 초월자의 암호인 것이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두 이레 강아지만큼만 눈을 떠도 세상에 신비 아닌 것이 없다.

 

말씀이 창조의 힘인 것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말도 사건을 일으킨다. ‘사랑해’라는 말은 듣는 이의 가슴에 생명의 봄바람을 일으키지만, ‘네까짓 것’이라는 말은 상대방의 가슴에 겨울 칼바람을 일으킨다. ‘고마워’라는 말은 듣는 이의 가슴에 섬광과도 같은 빛을 일으키지만, ‘실망이야’라는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어둠 속에 가둬버린다. 우리는 말씀을 닮은 말을 통해 어둠도 자아내고 빛도 자아낸다. 우리는 시방 말로서 우리가 살 세상을 짓고 있다. 시인 박노해는 깨끗한 말을 달라며 "말의 뿌리에 흙이 묻어 있지 않은 말/말의 잎새에 눈물이 맺혀 있지 않은 말/말의 꽃잎에 피가 배어 있지 않은 말을/나는 신뢰할 수 없으니"(<깨끗한 말> 중에서)라고 노래한다. 참 말이 그리운 시대이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1:14)

 

영원하신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자가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셨다. 오랜 기간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만 할 아기의 몸으로 태어났다.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고, 엄마의 눈을 바라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잠에서 깨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는 아기로 말이다. 그리고 그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곧 칠정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가는 우리들과 다를 바 없이 사셨다. 문득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 ‘세 명의 목격자 앞에서 아기 예수를 체벌하는 성모 마리아’가 떠오른다. 무슨 일 때문인지 마리아는 몹시 화가 나있다. 그래서 아기 예수를 자기 무릎에 엎드리게 한 후 손바닥으로 때리고 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아기 엉덩이에는 손자국이 나 있다. 경건한 이들은 대경실색할 그림이지만, 화가는 예수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말썽도 부리고 장난도 치면서 성장하는 것이 사람 아니던가.

 

그런데 요한은 돌연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대체 무엇을 본 것일가? 그것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다만 ‘생명’ 혹은 ‘빛’이라는 은유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있음 그 자체로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분이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 현실 저 너머에 계신 초월적 타자가 아니었다.

 

소란한 도심 한복판에서도 마치 숲속의 빈 터처럼 고요하여 주위 사람들조차 고요함으로 물들이는 사람, 그와 잠시만 함께 앉아있어도 들끓어 오르던 욕정과 미움과 시새움의 파도가 절로 잠잠해지는 사람 말이다. 요한은 그런 경험을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는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아닐까?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좋구나, 이 말이여! 충만함이란 넘침을 뜻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속에 가득 찬 것을 밖으로 내놓는다. 불쑥 화를 내는 것은 속에 화가 차 있기 때문이고, 랄랄라 노래가 나오는 것은 속에 노래가 차 있기 때문이다. 사사건건 어깃장 놓는 사람은 속에 불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심정에 북받친 사람의 입에서는 장미꽃다발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예수라는 존재를 가득 채우고도 흘러넘친 것은 은혜와 진리였다. 은혜는 대가가 아니라 선물이다. 예수는 세상에 건네진 하늘의 선물이었다. 그 선물은 수신자에 따라 치유로, 온전케 됨으로, 평화로, 화해로, 불의에 대한 분노로 나타났다. 예수의 삶은 또한 ‘참’(眞)의 ‘열매’(實)로 가득했다. 지켜야 할 자아가 없었기에 거짓에 기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말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1:32-34)

 

남들은 보지 못한 것을 세례자 요한은 어찌 보았을까? 볼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볼 눈은 볼 맘이 있는 사람에게만 열린다. 볼 눈은 절박할 때 혹은 사랑으로 찬찬히 볼 때 열린다. 광야를 방황하던 하갈은 자신과 이스마엘의 죽음을 예기하며 통곡하다가 샘을 발견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하여 달아나다가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층계와 그 위를 오르내리는 천사들을 보았다. 엘리사의 시종은 성을 포위한 시리아 군대의 위용에 놀랐지만 믿음의 눈이 열리자 엘리사를 두루 에워싸고 있는 불 말과 불 수레를 보았다. 스데반은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 옛 세계와 새 세계의 경계선에 서 있던 요한도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위태로운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았다.

 

자기 속에 하늘이 있는 사람만 하늘을 알아본다. 자기 속에 빛이 있는 사람만 빛을 알아본다. 신동엽은 먹구름을 하늘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닦아라, 사람들아/네 마음속 구름/찢어라, 사람들아,/네 머리 덮은 항아리.”(<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중에서) 세례자 요한은 가슴에 하늘을 품고 또 빛을 모시기 위해 손으로 발로 자아를 닦고 또 닦아 맑은 창이 된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자기 뒤에 오는 한 사람을 가리키며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도 없소”(1:27)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 정현종은 베네치아에서 만난 착하고 성실한 마르코를 떠올리며 이렇게 노래한다. “날씨는 음산하고/욕망도 그렇고/자본은 냉혹하고/물결은 차가운데/따뜻한 불꽃 하나/내 옆에서 타고 있다.”(<동트는 마음> 중에서) 세례자 요한, 그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따뜻한 불꽃 하나 일렁인다. 새로운 세상의 문턱에 엎드려 기꺼이 디딤돌이 되려는 사람. 그 사람이 없어 세상이 쓸쓸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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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1-19 03:01)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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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09-27 08:09)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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