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그것' 세상을 넘어서려면 2010년 11월 18일
작성자 김기석

‘그것’ 세상을 넘어서려면

 

손석춘 선생님,

입동이 지난 하늘에 안개가 낮게 드리워 스산함을 더하는 날입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라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인사말을 전하는 까닭은 좀처럼 안녕하기 어려운 현실 때문입니다. 눈을 뜨고 바라보면 세상은 여전히 문제투성이입니다. 신문을 보거나 뉴스를 들을 때마다 선생님이 잘 쓰시는 표현대로 울뚝밸이 솟아날 때가 많습니다. 가끔은 ‘역사가 진보한다는 말이 참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진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답은 달라지겠습니다만, 저는 진보란 보듬어 안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라는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우리를 몰아치는 현실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다하다보면 시야는 좁아지고 숨은 차오르게 마련입니다. ‘이웃’은 ‘타자’가 되고 ‘타자’는 늘 ‘잠재적 경쟁자’가 되고 맙니다. 가끔 누군가를 보듬어 안으려 하지만 안으로 굽어진 우리 팔은 좀처럼 펴지질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사랑에 무능한 사람이 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사랑이란 말에 덧입혀진 그 상투성과 감상성 때문입니다. 사랑은 결코 나약한 감상이 아닌데, 우리는 일쑤 그 말을 부정의를 가리거나, 현실을 오도하기 위해 사용할 때가 많았습니다. 제집을 잃어버린 말들이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이들의 책임은 떠도는 말들의 제집을 찾아주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세상의 불의에 대한 분노와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절절한 아픔입니다. 선생님의 글에서 감지되는 강건함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기초 위에 서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저의 글쓰기를 돌아볼 때마다 내가 지금 ‘지당한 말씀’(?)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마종기 시인의 <詩人의 用途․1>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이디오피아에서, 소말리아에서/중앙아프리카에서/굶고 굶어서 가죽만 거칠어진/수백 수천의 어린이가 검게 말라서/매일 쓰레기처럼 죽고 있”는 세상, “열 살이면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우고/열두 살이면 기관단총을 쏘아”대는 세상, 하루도 살육이 그치지 않는 세상에서 시인의 용도는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남들의 슬픔을 들으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프고

남들이 고통 끝에 일어나면

감동하여 뒷간에서 발을 구릅니다.

어느 시인이 쓴 투쟁의 노래는 용감하지만

내게 직접 그 고통이 올 때까지는

어느 詩人이 쓴 위로의 노래는 비장하지만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신 하느님

그러나 詩人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시인의 고뇌는 <시인의 용도 ․ 2>에서 더욱 깊어갑니다. 그는 고통 받는 이들의 참상을 보며 ‘내가 고통스럽다는 말 못 하게’ 해달라고, ‘내가 외롭단 말 못 하게’ 해달라고, ‘사랑이란 말 못 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세계의 곳곳에는 그 사랑의 신자들 가득하고/신자에게 맞아 죽은 신자들의 屍身,/내 나라를 사랑해서 딴 나라를 찍고/하느님 영광을 찬송하는 소리 들어” 보시라며, 이런 시대에 시인의 용도는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저는 이 시 앞에서 얼어붙어버립니다. 이것은 시인이 물어야 할 질문이기 이전에 ‘성직자’라 일컬음 받는 이들이 물어야 할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피울음 삼키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일단의 젊은이들이 봉은사에 들어가 소위 ‘땅 밟기’라는 것을 했습니다. 뒤늦게 소식에 접하고 동영상을 찾아보면서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십자군적 열정이 무서웠습니다. 동영상 속에서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기독교적 언어가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런 행태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참담하고 무례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입이 있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합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조롱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일부 기독교인들의 그릇된 행실이라고 혀를 차기도합니다. 기독교 신앙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막을 배경으로 해서 탄생한 유일신교는 하나같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비난이나 꾸지람 앞에서도 저는 유구무언일 따름입니다. 말문이 막히니 귀가 열리나 봅니다. 지금 제 귀에는 마치 이명증처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눅13:34)고 탄식하는 청년 예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오늘의 교회를 바라보며 예수님이 느끼실 씁쓸함과 쓸쓸함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성전체제가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변질되고, 로마 제국의 논리가 마치 악령처럼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을 때, 예수는 사랑과 섬김과 돌봄과 나눔을 기초로 하는 전혀 다른 세상을 가리켰습니다. 그것은 기존 질서의 토대를 뒤흔드는 일이었고, 인습적인 지혜의 담지자들은 즉시 예수에게 불온의 낙인을 찍었습니다. 예나 제나 불온이라는 말의 발화자들은 기득권자들입니다. 죄인과 세리의 친구를 자처했던 예수, 그분에게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혁명이고 전복이었습니다. 십자가는 그런 삶을 선택하는 이들에게 세상이 안겨주는 보상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가슴에 풀고 살다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그 고통의 깊이에서 예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는 기독교인과 교회는 그만큼 예수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이 제도화되고 그에 따라 교권이 발생하면서 예수를 표상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카타콤베에 숨어 예배를 드리던 이들은 예수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둘러메고 오는 선한 목자로 표상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예수상은 점점 초월적인 모습을 띠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지성소의 앱스보다 높은 곳인 돔 한복판에 판토크라토르(Pantocrator, 전능의 주)로 좌정하게 되었습니다. 돔은 물론 우주를 상징합니다. 이 기막힌 높임으로 예수는 더 이상 저잣거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웃고 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섬김의 대상이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침묵을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에서처럼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예수의 머리에 씌워진 금관을 벗겨드려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게는 지금 예수님이 누구보다 불쌍합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자행되는 일들을 보면서 예수는 기뻐하실 수 있을까요?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도적떼>에 나오는 인물 카를의 탄식이 떠오릅니다.

 

“인간이 어쩌면 저렇게 눈멀 수 있단 말인가? 형제의 흠을 찾아내는 데는 아르고스의 백 개의 눈을 가진 자가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저렇듯 완전히 눈멀 수 있단 말이냐? 저자들은 구름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너그러우라고 호통을 치면서, 자신들은 불꽃을 휘두르는 몰록처럼 사람들을 하느님에게 제물로 바치고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교하면서, 팔순의 눈먼 노인은 문밖으로 내쫓는 족속들이다. 탐욕 부리지 말라고 아우성치면서, 금붙이에 눈이 멀어 페루인들을 말살시키고 이교도들에게 짐승처럼 수레를 끌게 한다.”(프리드리히 폰 실러, <<도적떼>>, 열린책들, 119쪽)

 

손석춘 선생님.

"예수님도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는 없었다"는 말이 위로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마음을 모으다가 마치 절벽처럼 버티고 서는 이들을 만나면 온 몸에 맥이 다 풀립니다. 설득도 하고 화도 내보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입니다. 그럴 때면 그를 탓하기도 하고, 자신의 무능을 탓하기도 하다가 급기야는 예수님이라도 이런 때는 어쩔 수 없을 거라며 뜻을 접을 때도 있습니다. 마치 포도원 밖의 여우가 군침을 삼키면서도 '저 포도는 시어서 못 먹어' 하고 말하는 것과 같지요. 예수님도 이런 좌절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가장 친밀한 사이인 어머니와 형제들조차 예수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고향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죽하면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마가6:4)고 하셨겠습니까? 계속해서 마가는 예수님도 자기 고향 나사렛에서는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신 것 밖에는, 거기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의 무능은 사실 그분께 '함부로'와 '억지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옳은 일이라 하여 누구를 강제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강제는 자유의 박탈이니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의 백성들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아주 가끔, 세상일이 난마처럼 얽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뜩해질 때, 고르기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베어버린 알렉산더의 칼이 그립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모순덩어리로 창조했을까? 이 질문은 유사 이래로 반복되어온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한한 시간 동안만 살도록 허락받은 우리가 어떻게 그 문제에 답할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정직하다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고난의 대명사처럼 언급되고 있는 욥을 아시지요? 그는 느닷없이 닥쳐온 불행을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지만,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욥은 쉽게 엎드리지 않습니다. 오연한 그의 항거에 당황하는 것은 친구들입니다. 그들은 욥의 불경한 언사를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친구에게 차마 하지 못할 소리를 합니다. 욥이 그런 불행을 당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럴만한 이유'라는 어구가 지시하는 바는 모호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말이 환기시키는 힘은 매우 규정적입니다. 졸지에 욥은 파렴치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친구들은 지금 그가 겪고 있는 현실이 그의 죄를 웅변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말은 때로 사람을 살리는 칼(활인검)이 되기도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칼(살인검)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불행 당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불원천리하고 찾아와준 엘리바스, 빌닷, 소발을 귀한 우정의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그들은 몰라보게 초라해진 욥의 모습을 보며 칠일 밤낮을 그의 곁에 머물러주었습니다. 그만한 우정을 모르는 저로서는 그들에게 쉽게 돌을 들지 못합니다. 욥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인양 여길 때 그들은 우정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욥의 불행에 대한 해석의 욕망이 작동하면서 그들의 관계는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손 선생님,

이야기가 자꾸 종작없이 떠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게 글의 운명이라 생각하면서 조금만 더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저는 세상을 이해하고 인식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만연한 고통의 많은 부분은 그릇된 정책이나 불의한 구조에서 비롯됩니다. 손 선생님이 언급하셨던 50대 윤씨의 죽음은 물론 자살이지만 기실은 사회적 타살입니다. 사람을 아끼지 않는 세상이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으니 말입니다. 세상에 부족한 것은 재화나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눔입니다. 종교의 사회적 책임 가운데 하나는 나눔의 촉매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를 세우기 전에 먼저 빈민가에 가서 그들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핀 후에 지으라고 했던 간디의 말을 예언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화려한 건물과 장엄한 의례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주변에 주린 배를 부여안고 잠을 청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드러난다는 말씀도 기억납니다. 일단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은행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조종 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섬뜩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요한9:2) 예수의 제자들조차 행위화복관계로 현실을 설명하는 인습적인 지혜에서 한 걸음에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눈먼 사람은 죄인이라는 사회적 통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사태를 전혀 다르게 보고 계십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이 말은 자칫하면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마치 그의 불행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동원되는 수단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정말 그런 것이라면 그 하나님은 얼마나 잔인한 분입니까? 그런 하나님이라면 저는 한시도 그분 곁에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의 말에 숨은 뜻을 저는 이렇게 새깁니다. '이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나요?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가 자기에게 품부된 생명의 몫을 온전히 살아내도록 돕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세계-안에서-도전받는-존재로서의 인간 삶은 요구됨, 명령받음, 기대됨의 술어로만 이해될 수 있다.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은 인간 존재에게 기대되고 요구되는 것을 충족시키려는 시도"(<<누가 사람이냐>>, 종로서적, 1996, 99쪽)라고 말했습니다. 세계에 노출되어 있는 인간은 삶이 던지는 질문에 응답하면서 자기를 초월합니다. 그렇다면 '너' 없이는 나의 '나됨'도 없습니다. 나의 있음의 의미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만 대답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내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은 세상을 꿈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적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는 없었다는 말을 통해 제가 의도했던 바는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하여 스스로 낙심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가다가 넘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일어나 그 길을 계속 걸어갈 것입니다. 세상은 시나브로 그렇게 조금씩 진보하는 걸까요?

 

손석춘 선생님,

세상에 만연한 불의와 고통에 분노하는 선생님의 그 염결한 마음을 저는 헤아릴 수 있습니다. 19세기 러시아 시인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노래했더군요. 문득 문익환 목사님이 떠올라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를 꺼내놓고 읽었습니다. 옥중에서 쓴 것이 분명해 보이는 시 <어머니 ․ 4>를 보다가, 작은 고통에도 신음소리부터 내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봄이 오는 데도 감방은 여전히 겨울입니다. 머리맡의 물이 얼었습니다. 걱정하실 어머님 생각에 시인은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얼마나 추우랴 걱정하지" 마시라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가슴은 이렇게 뜨겁습니다/당신 생각을 하며 글썽이는/눈물이야 얼 리 있습니까/번개로 스치는 시를 잡아/언 손가락으로 자리에 긁적이는/자유야 자랑스럽습니다". 가슴이 뜨거우면 겨울이 문제겠습니까? 이 도저한 자유혼을 짱짱하게 지탱해주는 힘은 불의한 세상에 대한 분노와 고통받는 이들의 현실에 대한 슬픔일 터입니다.

 

죄송합니다. 윤씨로 대별되는 민중들의 고통에 대해 너무 둔감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손 선생님의 말씀은 장군죽비처럼 사정없이 저를 후려치고 있습니다. 1930년대에 영국 북부의 탄광지대를 살펴본 조지 오웰은 "꽃에 뿌리가 필요하듯, 위의 볕 좋은 세상에 있으려면 그 아래 램프 빛 희미한 세상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평서문이지만 이 문장 속에는 명령이 담겨 있습니다. '잊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볕 좋은 세상에 취해 저는 그리고 지금의 주류 기독교는 램프 빛 희미한 세상을 잊고 지냅니다. 간혹 그들에게 먹을 것을 건네기도 하고, 찾아가기도 하지만 그들의 벗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들과 연루될까봐 두려워합니다.

 

손 선생님,

저는 지난 번 편지에서 예수의 마음인 '긍휼'에 대해 말했습니다. 긍휼은 불의에 대한 분노를 소멸시키지 않습니다. 만약 소멸시킨다면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처럼 그것은 '인민의 아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의 신학자 알란 뵈삭은 오늘의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심리학이나 문학이 아니라 '거룩한 분노'라고 말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긍휼의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파토스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이웃들이 겪는 아픔에 분노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권부로 변한 성전 체제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요한2:19),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누가6:5)라는 말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외침은 지금 세상의 소음에 묻혀 교회 지도자들의 귀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불의한 체제와 불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불화를 위한 불화가 아니라 진정한 일치를 위한 방법적 불화이겠지요.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 상처를 치유해주고, 안전지대로 옮겨주는 것도 물론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 길에 강도가 출몰하지 않도록 하고, 강도가 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지요. 얼마 전에 기륭전자 해고노동자들의 오랜 투쟁이 막을 내렸습니다. 언론을 통해 김소연 분회장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 긴 시간 선선한 미소를 지은 채 격려차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아주고, 차돌처럼 단단하게 현실과 맞섰던 그가 흘리는 눈물은 기쁨도 슬픔도 아닌 회한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날 금속노조 구미지부장인 김준일씨의 분신 소식을 들었습니다. G20 정상회의를 준비하면서 감나무를 마련한 준비위원회가 행여라도 감이 바람에 떨어질까봐 철사로 매달아놓았다는 가십성 보도를 접하면서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가야 할 길은 참으로 멀고도 멉니다. 그 먼 길, 혼자서는 갈 수 없기에 울력다짐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선생님은 "대한민국에서 실현가능한 사회의 비전과 정책을 국민 대다수가 공유하는 슬기"를 모아야 할 때라며 그 슬기를 세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민중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슬기, 민중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현실과 다른 사회, 더 나은 사회가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슬기, 민중이 자신이 확신하는 새로운 사회를 자신의 실천으로 창조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슬기가 그것입니다. 저는 이런 슬기가 성서가 전하는 메시지와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적어도 성경은 역사 허무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허무’를 말하는 듯이 보이는 전도서도 사실은 지나가 버리는 것들에 대한 집착의 무용함을 지적하면서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만연한 모순과 불의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피안에서의 정의와 보상을 가르치는 것은 성서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은 압제로부터 자유로의 긴 여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이 과거의 사건이 아닌 것처럼 출애굽도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할 과제이자 사건입니다. 진리는 사건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 사건은 우리의 삶에 파고들어 새로운 진실과 대면하도록 합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로마 제국과 그 삶의 방식에 대한 철저한 부정입니다.

 

로마 제국과 그 삶의 방식은 마틴 부버의 말을 빌어 말하자면 자신들을 제외한 모두를 ‘그것’으로 만듭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제국의 길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주체를 가진 시민이기보다는 소비자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너’의 세상입니다. 불의한 세상은 그런 온당한 꿈에조차 불온의 낙인을 찍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세상’, ‘더 나은 세상’은 그런 꿈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손석춘 선생님,

성경에 나오는 요나 이야기는 우리에게 참 소중한 가르침을 줍니다. 편협한 민족주의자인 요나는 적대국의 수도를 향해 멸망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못마땅했습니다. 행여 그들이 회개라도 한다면 그들의 파멸은 지연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는 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강권에 의해 그는 하룻길을 가며 니느웨에 닥쳐올 심판과 재앙을 선포합니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그런데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이후에 일어난 일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그 다음입니다. 니느웨의 왕도 그 소문을 듣고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백성이 먼저 변해야 왕도 변한다는 사실을 넌지시 들려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새로운 세상은 낡은 세상의 비인간성에 눈을 뜬 사람들을 통해 열리게 될 겁니다.

 

그런 삶을 지향할 때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묵시문학도 옛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때 세상에 닥쳐올 재앙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갈등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증오하거나 조롱하지 않을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를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특정인에 대해 조롱하면서 공모의 미소를 짓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이 마치 목에 걸린 가시처럼 찌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심연 위에 걸린 밧줄’이라 말한 것이 짜라투스트라였던가요? 자칫하면 증오를 향해 곤두박질치곤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어떻게 미워하지 않으며 싸울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런 생각은 사치스러운 것일까요? 물론 답은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한 순간이고, 미움은 지속적인 게 문제입니다.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는 소용돌이치는 버릇이 든 물을 잔잔케 하려면 바닥을 파서 바다까지 길을 내라고 했습니다. 심연의 이쪽과 저쪽으로 기울곤 하는 우리 마음을 조율하는 방법도 다른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엎드림을 통해 솟구쳐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증오에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검질기게 불의와 싸울 수 있는 힘 말입니다.

 

손석춘 선생님,

글이 가리산지리산 헤매고 있습니다.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려니 그리 된 것 같습니다. 이제 글을 갈무리 할 때가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정치를 혐오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상이나 신념은 일상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마련이고 그것은 어떠한 형태든 정치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일은 마땅한 일이고 권장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지인 가운데 한 분이 지리산 둘레길을 함께 걷다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지리산 댐 건립을 막기 위해 여러 해 동안 각계의 시민사회와 연대해 반대운동을 벌여왔는데 성과는 미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방자치단체장이 바뀌자 그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며 그는 허탈하게 웃었습니다. 저는 이런 건강한 정치운동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권력’의 자율성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처럼 달콤한 쾌락이 없다지요? 쾌락은 주체의 몰각을 가져옵니다. 주체성이 무너지면 권력은 오히려 그의 존재와 의식을 규정하기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교계 지도자들의 권력욕입니다. 그들은 세속의 권력까지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권력에 대한 욕구가 커질수록 진리에의 열망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저는 오늘의 주류 기독교가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렵기만 합니다.

 

입동이 지났으니 이제 겨울도 멀지 않았습니다. 목회자들에게 12월은 참 잔인한 계절입니다. 아니, 모든 목회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저처럼 게으른 이들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잎은 무성한데 열매는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12월이 되면 그 나무와 나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쓸쓸함이 깊어집니다. 이 겨울날에 제가 하는 말들이 집 바깥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이 덮는 신문 한 장의 온기도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도 심해집니다. 다시 한 번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안으로 거두어들여야 할 때입니다.

 

손 선생님.

추위를 견딘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부디 이 하수상한 세월 마음 잘 지키시고, 얼음장이 쩡쩡 울리듯 맑은 소리로 잠든 영혼들을 깨워주십시오. 선생님의 건강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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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1-19 04:01)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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