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어느 울보 목사의 순례기 2010년 10월 20일
작성자 김기석

어느 울보 목사의 순례기

--남호, <걷는 기도>

 

“걷기의 철학은 맹목적으로 전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걷는 이는 남들로부터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자유롭게 그들에게 다가가거나 멀어질 수 있다. 걷기에는 멈출 수 있는 자유, 타인을 만날 자유, 그로부터 멀어질 자유가 있으며, 그 본질에는 항상 신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가 숨어있다.”(세실 가데프)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하는 것 가운데 거룩한 일들이 있는데, 나는 그 거룩한 행위로 기도하는 것, 씨를 뿌리고 가꾸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빛을 드러냄), 그리고 걷는 것을 꼽고 싶다.”(16)

 

사람들은 어디를 가도 그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한다. 고성古城의 담벼락에 낙서를 하는 것도, 커다란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것도, 자기 동상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르트르의 말대로 주체자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주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근본적 욕망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닐까?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걸어갈 수밖에 없는 삶의 고단함을 갈짓자 걸음이라는 말로 갈음하기도 한다. 가야 할 길을 알든 모르는 우리는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인생을 노상路上의 실존이라 말하기도 한다. 마땅히 가야 할 곳을 알지 못할 때 삶은 정처 없음이 되고, 가야 할 곳이 분명할 때 삶은 순례가 된다. 길을 가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 길을 걷는 행위의 의미가 바뀌는 것이다. 정처 없는 길을 가는 이의 시린 등짝은 안쓰러움을 자아내지만, 순례의 길을 가는 이의 등짝은 포근하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안다(요8:14) 했던 예수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외로운 사람이었지만, 고독했기에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나선 이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끝끝내 그 길을 걷는 이는 많지 않다. 길 위의 삶은 유동적이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순례자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정착민으로 살아갈 길을 모색한다. 그들은 길옆에 기념품 가게를 차려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예수의 길 이야기를 들려주며 스스로 감동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길을 떠나지 않는다. 떠나지 않음을 일러 타락이라 한다.

 

정착민들도 때로는 ‘떠나라’는 영혼의 부름을 듣는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몸 앞의 길이 몸 안의 길로 흘러 들어왔다가 몸 뒤의 길로 빠져나갈 때, 바퀴를 굴려서 가는 사람은 몸이 곧 길임을 안다”(김훈). 이런 구절을 만날 때마다 몸의 근육은 팽팽해지고 정신은 뻐근해진다. 어디 자전거뿐일까? 일상의 인력을 끊어내 길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아닌가? 길은 만남이고 만남은 이야기를 잣게 마련이니 할 말이 많을 수밖에.

 

길에서 드리는 기도

그러나 땅의 순례자인 남호 목사는 자신이 타박타박 걸은 한 걸음 한 걸음이 기도였다고 말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더라는 것이다. 대체 왜 그는 걷기가 기도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걷는 기도>>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스페인 북부의 오랜 순례지 산티아고를 걷고, 네팔의 설산을 넘나들며 만난 자기 내면의 풍경을 들려준다. 이 책은 여행 생활자의 리포트도, 여행자들을 위한 안내서도 아니다. 자기 안에 있는 심오한 중심과 접속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순례자의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기술되지 않는다. 내면에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시간과 공간이 비교적 자유롭게 교직되고 있다.

 

난지도에서 쓰레기 줍는 사람들과 뒤엉켜 살던 그가 문득 삼십 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오른 것도, 학위를 받고 돌아와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것도 내면의 어떤 부름이 그를 길 위로 이끌었기 때문일 아닐까? 방학이면 배낭 하나 둘러메고 인도로, 네팔로, 페루로, 스페인의 산티아고로 달려간 것도 그 부름의 실체와 만나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느리고 고단한 순례를 통해 그는 속도에 집착하는 현대적 삶이 우리에게서 빼앗아갔던 것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고, 길을 걷는 것이 기도임을 그리고 기도가 곧 눈물임을 알았다.

 

“순례의 걷기는 우주의 리듬에 맞추는 것이고 그 리듬에 빨려들어 가는 것이다.”(27)

 

“길을 걸어가는 동안 주님께서 나의 방어기제를 해체시켜버리셨는지 눈물이 나도 모르게 자주 쏟아졌다. 기도하며 울었고 작은 것에도 감동해서, 그리고 외롭고 힘들어서 눈물은 저절로 넘쳐흘렀다.”(33)

 

그렇기에 그가 발걸음의 리듬에 맞추어 드리는 기도는 단순하다. 키리에 일레이죤(‘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순례자에게 있어서 길은 횡적인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앞서 그 길을 걸었던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이 바쳤던 기도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동안 길이기에 공시적인 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걷기는 자기 정화의 과정이요 속죄의 과정이 된다. 장엄한 자연과의 만남도 신적 누미노제의 순간이 된다.

 

“설산과 기묘한 바위들이 늘어선 모습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없어졌으니 말을 할 수가 없다. 말이 필요없는 것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61)

 

칸트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구분하면서 “밤은 숭고하고 낮은 아름답다. 숭고는 감동시키고 미는 매혹시킨다”. 그가 말하는 숭고함이 전율의 감정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아름다움은 감탄을 유발한다. 그런데 남호 목사는 무구한 자연 세계 앞에서 숭고함을 느낀다. 내가 지워지는 순간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세계와 접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홀로 고독 속으로 걸어간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이 아닐까? 아무도 오고가지 않는 길이 그에게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성전이었던 것이다.

 

만남을 향해 열리다

순례의 길은 홀로 걷는 길이지만 또한 만남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있는 길이기도 하다. ‘내일은 어떤 세상을 보게 될까’ 하는 기대가 잉태되기 때문이다. 만남은 사건을 일으킨다. 그 사건은 때로 덧없어 보이고 무가치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만남 사건은 우리 속에 어떤 변화와 생성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멋진 삶이란 따지고 보면 우연적인 사건들이 빚어내는 광채라 할 수 있다. 어떤 우연한 만남이 섬광처럼 우리 가슴을 꿰뚫을 때가 있다. 그 순간이야말로 야곱의 ‘베델’이라 할 수 있다.

 

순례자는 모든 우연한 만남에 열려 있다. 자기를 지우며 걸으니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아무런 사심 없이 대할 수 있고, 또 그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산티아고 길을 걷던 저자는 어느 날 멋진 동행을 만난다. 선머슴같은 덴마트 여대생 카렌과 아르헨티나인 아니발이었다. 붙임성 있는 아니발은 안데스 산맥 일원에 흩어져 사는 이들의 이야기도 들려주고 노래도 들려주었다.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느 순간 남호 목사는 자기의 동행이 되어준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니발에게 울먹이며 “너희들이 천사로 보인다”고 하자 그도 한동안 말 없이 훌쩍였다. 다음날부터는 걷는 속도가 달라 헤어지게 되었는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만하린 고개에서 만난 스페인 사람 사비에르가 남 목사를 알아보고는 반색을 하며 아니발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길에서 ‘호’라는 한국인을 만나면 자기 대신에 꼭 허깅(포옹)을 하며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한 사람의 가슴에 일어난 어떤 파문이 다른 이의 가슴에까지 전달되고, 그 파문이 또 다른 물결을 일으키는 이 놀라운 순환을 뭐라 일컬어야 할까?

 

일상으로 복귀하는 순간 이런 감동은 스러지기 쉽지만 그런 순간의 기억은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건’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남호 목사는 주체할 길 없이 흐르는 자신의 눈물을 변명할 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우리 세계의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설명하던 중에 “문제의 알맹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법, 기도하는 법, 우는 법, 그 숱한 설득자들의 속임수에 항거하는 법을 모르는 데 있다”(93)고 말했다. 그는 길은 우는 법을 가르치는 공간이라고 과감하게 말한다.

 

고통, 기도의 문

하지만 걷기는 고통을 수반한다. 머리글에서 그는 다소 도발적으로 묻는다. “그대는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아픈 지경에서도 멈추지 않고 먼 길을 계속 걸어가 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왜 그렇게 걸었는가? 그대는 산소 부족으로 인해 숨이 턱 밑에 차오르는 해발 삼천 미터 이상의 고산 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을 느꼈는가?”(11) 안락한 삶에 길들여진 이들은 할 수 있는 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거칠게 말해 그들에게 고통은 피해야 할 악이다. 순례자치고 발바닥의 물집으로 고생하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다. 순례자에게는 그런 고통도 훌륭한 묵상의 주제가 된다. 발에 전달되는 극심한 고통은 곧 바로 예수의 고통을 떠올리게 되고, 예수의 고통은 고통을 제거해 버린 한국교회의 실상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그리고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 먼 길을 걸어왔던 동방박사들도 새로운 존재로 호출된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져온 예물에 집중하지만, 순례자는 그들이 고통을 무릅쓰고 걸어온 길 그 자체가 값진 예물임을 알아차린다. 순례자가 겪는 고통은 그를 더 깊은 기도로 이끄는 통로가 된다.

 

“육체의 아픔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하고 겸허해지게 된다. 순례의 마음가짐을 간직하고 걷는 자는 인생의 변두리, 즉 말석에 앉아 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자이다.”(113)

 

“아픔이 있는 길이지만 그 길은 진정 자유를 주는 길이었다. 어떤 격정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고 나 자신의 모든 것을 활짝 열어놓고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은 나를 가볍게 하는 것이었다.”(128)

 

이런 마음이니 높은 산을 걷느라 지쳤으면서도 그는 차마 포터들에게 짐을 다 맡기지 못한다. 짐이 무겁기에 발걸음은 느려지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무거움을 음미할 수 있게 된다. 그 더딤과 무거움은 그를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의 마음에 비끄러매주곤 했다.

 

고통 속에서 그가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은 자기 속에 있는 분노나 언짢음을 직시하고 또 풀어내는 길이었다. 애써 유지하던 마음의 평정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우리가 다반사로 경험하는 현실이다. 때로는 개 한 마리가, 때로는 무례한 사람이나 도무지 신뢰할 줄 모르는 사람이 우리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이게 우리다. 순례자는 길을 걷는 동안 그 마음을 마음의 주인이신 분 앞에 내려놓는다. 그렇기에 순례는 수덕이요 수행이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고통 속에서 길을 가는 동안 마음의 아우성은 잦아들고, 침묵이 깊어갈수록 마음은 수용적이 된다. 매개조차 없는 메시지가 하늘로부터 전해진다. 그렇기에 순례자는 길을 잃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마음의 귀가 예민해지면 어디든 그분을 향한 길이 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먼 길을 가는 것이 인생 여정과 비슷해서인지 몰라도 자신이 계획한대로 일정이 풀리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이나 바람과는 달리 일정에 차질이 생기거나 방해요소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멈추고 한 발 물러서게 될 때 깨달음의 기회가 더 많이 생길 수 있다”(194)

 

남 목사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가기 위해서 카투만두에서 루크라행 비행기를 타려했다. 하지만 기상의 변화로 인해 그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허탈감과 짜증이 몰려 왔지만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는 여행자들의 거리인 터멜에서 때늦은 점심을 먹다가 신도 몇 명과 담소를 하며 즐겁게 식사를 하는 라마승에게 눈길을 준다. 그 진기할 것도 없는 광경은 문득 성직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웠다.

 

“사제는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어 성취하려는 존재가 아니라 신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일하고 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공동체와 어울려 살며 그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존재가 되야 한다고 여겼다.”(199)

 

하나님의 현존을 삶으로 드러내는 존재가 목회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떤가? 목회자의 성공이 교인수로 치환되고, 영성이 이기심과 결합되고, 목회자들은 관리자와 경영자가 되고 말았다. 본말의 전도이다. 그렇기에 그는 “신과 인간을 위한 봉사자(사제)는 당연히 놀고먹어야 하며 자기 힘으로 먹는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불경한 짓이 된다”(199)고 말한다. 위험한 발언이다. 자칫하면 무위도식을 권장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발언에 담긴 속말을 읽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력(浮力)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검소하고 청빈한 삶에의 열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마음 하나 얻지 못해 우리 삶이 이 지경이다. 이미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다고 할 수 있는 남 호 목사가 순례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는 최완택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고 있다.

 

“맑게 보고, 그리고 바르게 보기를 훈련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본 대로 마음이 움직이기. 그리고 세상 소음을 넘어 세미하게 들리는 신(神)과 자연의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205)

 

그는 그런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인생길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덧쌓인 분노, 원망, 탐욕, 염려를 털어버리고 자유의 푸른 하늘을 훨훨 날고 싶은 꿈을 간직한 목사가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가? 그가 순례길에서 흘린 그 많은 눈물들은 정화의 샘물이 되어 그를 닦아주었다. 길에서 만난 낯선 이들의 존재가 그저 고마워 울먹이고,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흐느낄 줄 아는 울보 목사, 그는 이미 자유인이다.

 

그리고 이 책에 수록된 민들레 교회 최완택 목사의 글 세 편(“가시거리[可視距離]에 대하여”, “오, 베시 사하르!”, “나는 가시거리가 아주 먼 별에서 왔다”)은 이 책에 또 다른 깊이와 빛깔을 더해 주고 있다. 그의 글은 여행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풍경은 오히려 배경이 되어 그의 내면과 우리 삶의 속살을 되비추어준다. 그의 글을 소개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독자들이 누릴 눈 밝아짐의 기쁨을 뺏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수첩에 적어두듯 몇 구절을 적어둔다.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내가 안타까워하면서 우리 땅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은, 도대체 그대와 나 사이에 그 무엇이 잔뜩 기여 있기에 이렇게 가시거리가 제로(zero)에 가까운 세상이 되어버렸느냐는 것이다.”(211)

 

“복되어라, 가시거리 아주 먼 별빛을 본 자여. 그 별빛 들이마시고 자기의 부끄러운 순간을 내쉰 행보는 이제 ‘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아름다운 발자취가 되어 오돌오돌 떨면서 빛을 내는도다. 나는 가시거리가 아주 먼 별에서 왔다!”(233)

 

“아아, 내 평생에 어떤 이름을 베시 사하르 가는 그 버스의 어린 소년처럼 간절하게, 그윽하게, 소망에 가득차서, 그리움으로, 감동을 주는 목소리로 불러보았던가. 어떤 이름을 그 아이처럼 부른다면 어찌 그 이름의 존재가 화답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는가? 어찌 그 소리 듣고 달려오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는가.”(226)

 

천상 이야기꾼인 최완택 목사의 글을 읽으며 나는 질투심을 느꼈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것임을, 아니 존재 전체로 쓰는 것임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남 호 목사가 자기의 책에 최완택 목사의 글을 덧붙인 까닭인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잘 모르겠다. 다만 인생을 순례로 이해하는 이들끼리의 은밀한 수인사로 갈무리해 두고 싶다. 순례라는 중심 화두를 통해 그들은 우정의 연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순례자들을 부르고 있다. 남 호 목사의 말대로 “길을 걷는 것은 몸 자체가 움직이며 주변과 접촉하는 현실인 동시에 미지의 세계와 자유의 세계를 마음껏 그려보는 꿈”(247)일 터이니, 접촉을 통한 확산은 순례자들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책을 덮으며 늘 가슴에 품고 사는 한 구절을 떠올린다. 관광객은 요구하지만 순례자는 감사한다(Turistas manden; peregrinos agradec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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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1-20 10:01)
감사합나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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