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의 길 위에서 2010년 09월 18일
작성자 김기석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의 길 위에서

 

손석춘 선생님,

흰 이슬로 내리시는 주님의 은총을 빕니다. 손 선생님께 이렇게 목사다운 인사를 드리는 게 합당한 일인지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넵니다. 지난 달 잠시 만나 뵙고 돌아오는 길에 효창공원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비가 내린 후 맑게 갠 하늘빛이 아름다웠고, 나뭇잎 사이로 내려앉는 햇살이 싱그러웠습니다. 물기를 머금고 번지는 흙내음도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쓸쓸함이 몰려왔습니다. 왜 착하고 온유한 사람들이 이토록 어렵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손 선생님의 모습과 음성에 담긴 쓸쓸함과 따뜻함, 그리고 세상의 어둠을 헤쳐 나가느라 겪어낸 시간의 갈피를 언뜻 본 듯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문득 나치에 항거하다가 순교한 독일의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옥중서간>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글을 읽기 위해서는 심호흡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혼란한 역사의 한복판을 온몸으로 기어간 사람의 아픔이 절절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있을 수 없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입니다. 이 시에서 본회퍼는 늘 태연하고 당당하게 현실을 대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뭔가를 갈망하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말과 인간적인 친근함에 목말라하며,

폭정과 사소한 모욕에도 분노로 치를 떠는,

위대한 사건을 기대하다가도

끝없이 먼 곳에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풀이 죽어 있는,

기도와 생각과 창작에 지치고 허탈감에 빠져

무기력하게 그 모든 것과 이별할 채비를 갖춘”

 

사소한 행복에 목말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극복해야 할 악덕도 아닙니다. 성서가 드러내고 있는 평화의 이미지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가꾼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따먹고 포도주를 빚어 마시고, 그 그늘 아래서 쉬는 모습이 히브리인들이 그린 평화입니다. 물론 더 드라마틱한 평화의 이미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사라져 사람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고,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는 세상의 꿈도 있습니다. 몽상처럼 들리지만 이런 세상을 향해 우리가 조금씩이나마 발걸음을 내디딘다면 이것은 몽상이 아니라 비전이 되겠지요?

 

따스함보다 강한 응어리

선생님은 지금 교회나 성당에 다니시지는 않지만 어쩌면 지금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지요? 40대 후반의 어느 날, 서재를 정리하다가 대학 시절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 성경을 들춰보다가 우연히 펼친 곳에서 만난 한 구절이 벼락처럼 다가와 꽂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1서에 나오는 이 구절과의 만남의 예기치 않음을 선생님은 ‘우연히’라는 말로 드러냈고, 그 구절이 준 존재론적 충격을 ‘꽂혔다’라는 단어로 표현하셨습니다.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목사의 버릇 때문일까요? 저는 그 급작스런 ‘만남’ 속에서 어떤 섭리를 느낍니다. 너무 과한 해석이라고 나무라실 것 같네요. 마치 환청처럼 담장 밖에서 들려오는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 하는 소리에 이끌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이르렀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고백이 기독교의 고갱이라는 말씀은 옳습니다. 하지만 질문이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이르면 답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일본의 작가인 엔도 슈사꾸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따스함에 빗대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년 시절부터 어머니를 통해서, 내가 단지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따스함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손을 잡았을 때의 그 따스함, 안아 주셨을 때의 체온의 따스함, 사랑의 따스함, 형제들에 비해 특히 모자랐던 나를 돌보아 주시던 따스함! 어머니는 나에게 당신이 말하는 양파 이야기를 언제나 해주셨습니다만 그때 어머니께서는 양파란 이 따스함보다 한층 강한 응어리, 즉 사랑 그 자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따스함의 근원에 있었던 것도 양파의 한 부분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엔도 슈사꾸, <<깊은 강>>, 고려원, 1994, 181쪽)

 

여기서 ‘양파’는 하나님이란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를 배려하기 위해 소설 화자가 사용하는 하나님의 ‘은유’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실체로서 이해될 수 없습니다. 다만 관계맺음을 통해 경험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다’라는 서술어로만 고백될 뿐입니다. 지극한 실존의 어둠을 경험했던 이들은 하나님을 ‘빛’이라고 고백하고, 삶이라는 황야에서 길을 잃었던 이들은 하나님을 ‘길’이라 고백하고, 수렁에 빠져들듯 난감한 시간을 보냈던 이들은 하나님은 ‘반석’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는 ‘함께 아파하는 사랑’(compassion)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 안에 사랑의 담론은 넘치지만 사랑의 실천은 부족합니다. 딱한 이들을 보며 혀는 차지만, 그들 곁에 다가서고, 말을 건네고, 연루되는 것은 한사코 꺼립니다. ‘온 세상’은 사랑할 수 있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웃은 사랑하지 못합니다. ‘온 세상’은 추상적 실체이지만 가까운 이웃은 구체적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병들고 지치고 자존감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애태움’ 그 자체였습니다. 이때 사용된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는 ‘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에서 유래되었다 합니다. ‘창자’를 가장 깊은 마음이 머무는 자리라고 이해한 것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마찬가지인가요? ‘애간장이 다 녹는다’고 말할 때 ‘애’가 창자인 것을 보면 그런 것도 같습니다. 예수는 자기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형편에 처한 이들을 볼 때마다 창자가 찢어지는 고통을 맛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이니 기적도 가능했겠지요?

 

제 삶이 쓸쓸하고 적막한 것은 어쩌면 이 마음 하나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작가 엔도 슈사꾸는 소설 <<死海의 호반>>에서 교회에서 선포되고 고백되는 예수 말고, 자신이 그리고 있는 예수상을 독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소설에서 예수는 병자를 고쳐달라는 사람들의 요구에 곤혹스러워하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당신들과 함께 괴로워하는 일일 뿐…당신들의 괴로움을 나는…”. 말줄임표 속에 담겨 있는 말은 아마도 차마 언표할 수 없는 그의 마음일 터입니다. 사람들은 무력한 예수에게 실망합니다. 예수는 어떤 마을에서도 기적을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작가는 예수가 “죽어가는 노인의 머리맡에서 하룻밤을 밝히고, 자식을 잃은 어미 곁에 조용히 앉아 지켜보고, 해질녘에 앞 못보는 노파의 손을 잡아주기도 했지만, 그들을 고친 적은 없었다.”(엔도 슈사꾸, <<死海의 호반>>, 청노루, 1988, 40쪽)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존재에 대한 부정일까요? 무력하지만 고통 받는 이를 끝끝내 떠날 수 없는 사람, 작가는 그에게서 하늘을 닮은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공정 사회라는 화두

철학과 윤리가 ‘타자’를 중시한다면 기독교는 그 타자를 일러 ‘이웃’이라 부릅니다. 굳이 이 두 단어를 구별하고 싶지는 않지만 타자가 나의 밖에 있는 객체를 의미한다면, 이웃은 객체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나와 무관한 존재일 수 없습니다. 예수는 ‘이웃’의 범주를 묻는 이들에게 ‘이웃 되기’라는 새로운 윤리를 가르쳤습니다.

 

최근에 정부는 ‘공정사회’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세간에는 대통령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닌가 말하는 이들도 있더군요. ‘공정사회’라는 화두가 던져지자마자 공직사회의 비리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서있는 자리를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 특권층의 자제들을 뽑기 위해 특채 규정까지 바꾸는 것을 보면 ‘그들만의 리그’라는 게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정부가 그리고 있는 공정함이 어떤 것인가요? 절차적 정의, 도덕성의 확립, 사회적 약자 배려 등이 우선 떠오릅니다. 이런 가치들이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제반 구조 속에 활착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정부가 내놓은 ‘공정사회’라는 지침에 대해 뜨악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정책과 지향이 이미 불공정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토건 사업과 부동산으로 대별되는 개발주의, 부자 감세, 국민을 훈육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쌍방향 소통을 거부하는 저들의 오만한 자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정사회는 선언만으로 당도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저는 정부가 ‘공정사회란 이런 것이다’라며 해답을 내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사람들에게 공정사회란 어떤 것이냐고 묻고, 그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겸허하게 청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은 사람들을 하나로 결집시키지만 해답은 사람들을 분열시키게 마련입니다. 질문을 받기도 전에 대답을 내놓는 이들처럼 위험한 사람이 없습니다. 공정사회는 선언이나 프로그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 대한 존중이 전제되지 않은 공정사회는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아끼지 않는 정치나 경제는 거칠게 말하자면 악마의 도구가 되기 쉽습니다. 정부가 ‘공정사회’라는 화두를 들고 나왔을 때 제게 떠오른 것은 성서에 등장하는 몇 가지 개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토라(Torah)는 평등공동체의 꿈을 담고 있습니다. 토라를 관통하고 있는 세 가지 원칙은 ‘미슈팟mishpat’과 ‘쩨다카tzedakah’와 ‘헤세드hesed’입니다.

 

‘미슈팟mishpat’은 재판관이 각자에게 돌아갈 몫이 공정하게 배분되도록 하는 것으로 최소한의 정의(minimal justice)를 일컫는 말입니다. 백성이나 지도자나 잘못하면 벌을 받고, 손해를 입히면 보상해야 합니다. 이중적 잣대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게 무너지면 사회는 존속되기 어렵습니다. 어느 탈옥수의 입에서 터져 나온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여전히 개연성을 갖는 사회는 미슈팟이 무너진 사회일 터입니다. 법은 선이 떠나버린 세계에서 선의 대리자라고 하지요? 그러나 법이 선의 대리자가 아니라 악의 대리자처럼 인식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냉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쩨다카tzedakah’는 박애, 친절, 관용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애타는 마음을 내포하는 개념으로 굳이 번역하자면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라 할 수 있겠습니다. 토라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추수할 때 밭의 한 모퉁이는 남겨두라든지, 안식년이 되면 땅의 소출을 거두지 말고, 동족들의 빚을 탕감해주라는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 잠시 동안 머물다 가는 나그네 혹은 식객들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사회적 약자들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사회적 안전보장 장치를 만드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입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자주 쓰는 ‘베푼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베푼다는 말 속에는 알게 모르게 도덕적 우월감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인에게는 ‘나눔’이 있을 뿐 ‘베풂’은 없다고 말합니다. 의식은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찌가 유대인 멸절 계획을 세웠을 때 그 일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 살해행위를 주저했지만, 그것을 ‘최종적 해결책’이라고 명명하자 별다른 가책 없이 그 일을 수행했다고 하더군요.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모르겠습니다. 이야기가 곁길로 갔습니다만 공정사회로 가는 길은 쩨다카를 통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헤세드hesed’는 언약에 바탕을 둔 사랑 혹은 신실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등지고 사는 백성들에게 진노하시다가도 그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사랑을 베푸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인자함’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형제/자매들에게 같은 사랑을 품어야 합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우리 형제/자매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공정한 사회, 생명 세상이 시작될 것입니다. 인간을 도구화하는 현실의 해독제는 진실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너 살리니 나 사는 회심이여!

너무 낭만적인 현실 인식인가요? 이런 세상은 유토피아, 말 그대로 ‘없는 곳’일까요? 현실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종교가 할 일은 현실보다 더 큰 세계를 가리키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정사회의 꿈은 이미 성서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이 그것입니다. 여섯 해 동안 경작한 땅은 이듬해에 쉬게 해주어야 했고, 빚은 탕감되어야 했습니다. 토라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인 희년이 되면 빚에 몰려 종살이하던 이들은 자유를 되찾고, 땅도 원주인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은 그야말로 사회적 양극화를 주기적으로 해소하고 갱신하기 위한 조치라 하겠습니다. 종교의 언어는 때로는 허황해 보이지만, 허황하기에 사람들의 영혼을 환기시키기도 합니다. 정현종 선생님의 <回心이여>라는 시의 첫 연이 참 재미있습니다.

 

“희망은 많이 허황하지만

허황함 없이 또한 살림살이가

어떻게 굴러 가겠느냐.

ㅎ音이 워낙 바람 빠지는 소리이듯이

희망에 붙어 있는 허황함은

알게 모르게 마음의 통풍 구멍이니

새해 아침이라는 세월의 한 구멍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나 해보자는 것이다.”

 

정현종 선생님이 말하는 회심은 뜻밖에도 상생의 길을 찾는 것이더군요. “나 살리니 너 살고/너 살리니 나 사는 회심이여.” 사실 이것 말고 다른 회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으뜸 되는(宗) 가르침(敎)을 뜻하는 종교는 결국 ‘사이 존재’인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은 ‘너’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이라고 일깨워줍니다. 이것은 종교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문명의 정상성을 전복하다

저는 언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공공성을 중시하는 언론도 비슷한 지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손 선생님께서 그동안 써오신 책이나 컬럼을 일이관지하고 있는 것도 종교가 지향하는 가치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이 세상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말을 다루는 이들이 먼저 변해야 세상도 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 자료들에 대해 주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개는 언론인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신앙인들조차 성서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보다는 매스컴의 눈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기존질서에 대한 성서적 비판을 곧바로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치환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만큼 종교적 담론의 무게가 가벼워졌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비판 기능을 잃어버린 채 기득권 편이 된 언론도 문제지만, 초월적 비전을 잃어버린 채 자본주의의 단맛에 취해버린 종교가 더 큰 문제입니다. 청빈한 삶에 청빈한 마음이 깃들게 마련입니다. 교회가 부유해지고, 권력과 긴밀해질수록 예수로부터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교회는 사회적 강자들의 행태와 욕망을 종교적으로 추인해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참담한 마음으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곤 합니다.

 

그러다가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수적 삶을 실천하는 이들이 있음을 확인하면서 안도하기도 합니다. 신앙에 바탕을 둔 삶이란 고통당하는 사람들, 외롭고 주변화 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병들거나 무기력증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억눌린 신음소리를 경청하고 또 거기에 응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분열을 치유하고, 조각난 경험들을 이어 희망의 모자이크를 만들기 까지는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합니다. 목표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암담한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일을 해결하라고 하신 적이 없다는 자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합니다.

 

가끔 신학생들이 찾아와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커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것 참 큰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대목에서 저는 의도적으로 음성을 높여 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라고 하신 적이 있느냐고. 자기 속에 있는 어둠조차 밝히지 못하는데, 자기 속에 있는 편협함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데 우리가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저는 조금 음성을 낮춰 우리가 할 일은 큰일이 아니라 ‘그분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 앞에 있는 지친 이웃들과 연대해가며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지향하는 것 뿐 아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원장으로 계신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뭉뚱그린 것이 아닌가 싶네요. ‘새사연’이 꿈꾸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제가 번역한 책 가운데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버나드 브랜든 스캇)가 있는데, 그 책의 부제는 ‘세상 다시 그리기’입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유는 문명의 정상성을 전복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늘 불온해 보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불온한 열정이 사라져감을 느낄 때마다 가슴 한쪽이 저릿해집니다. 이런 저릿함은 하나님의 부름일 수도 있고, 양심의 부름일 수도 있습니다. 노자는 우리가 모름지기 속해야 할 곳이 있다며 “바탕의 순진함을 드러내고 타고난 본성을 지키며 자기 본위의 자기와 강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그것”(見素抱樸, 少私寡欲, 노자 19장)이라고 말합니다.

 

선물이면서 투쟁인 인생

이제 ‘과연 인생은 투쟁이 아니라 선물로 받아들여야만 옳은 건인가?’라는 질문을 더 이상 회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투쟁’과 ‘선물’이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의 ‘있음’은 제게 풀리지 않는 신비입니다. ‘왜 나는 없지 않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설 때마다 심연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어지럼증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일상성 속에 매몰되어 살아갈 때는 미처 느껴보지 못한 낯선 느낌에 사로잡히면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어버립니다. 제가 인생을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의 있음이나 재능 혹은 소질이 나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가 주어진 것이라는 자각은 나의 외부에 있는 ‘타자들’ 역시 누군가로부터 품부(稟賦)받은 생을 살아간다는 자각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있는 어떤 존재도 우리의 욕망을 위해 임의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이익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 여성, 어린이, 장애인, 빈민, 소수자들의 인권은 존중되지 않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고 탄식했던 만해 한용운의 억눌린 외침은 아직도 신원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불의한 세상을 숙명인양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신앙이 아닙니다. 들라크루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역할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는 것은 성서를 캐논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라 할 수 있습니다.

 

불의를 향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무신적인 세상 논리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네가 나에게 엎드려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는 사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쳤습니다. 사탄이 예수에게 요구한 것은 옛 세계의 질서를 수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질서는 거짓된 신화와 탐욕과 폭력의 터전 위에 세워집니다. 무한경쟁이라는 살풍경한 구호가 부끄러움조차 없이 회자되는 세상,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하고 또 사라져야 할 존재로 여기는 진흙탕 싸움을 예수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기존 질서에 순응할 수 없었다는 측면에서 예수는 타고난 싸움꾼입니다. 모름지기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면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교리 속에 박제화 된 예수가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을 온몸으로 살아가신, 그리고 지금도 우리 삶 속에 끝없이 화육해 들어오는 예수를 믿는다면 말입니다. 예수는 점잖은 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늘 고통의 한 복판에 서 계셨습니다. 불의한 성전체제와 싸우고, 비인간화된 삶을 강요하는 현실과 싸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런 삶의 결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단순히 구원을 가리키는 기표가 아닙니다. 유르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을 통해 예수라는 젊은이의 선연한 핏방울이 아로새겨진 십자가에 던져진 장미꽃들을 걷어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싸움의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효율적인 싸움을 위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한사코 그런 유혹을 뿌리칩니다. 미운 놈은 미워하는 게 정의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게 우리의 도덕 감정에도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해서는 정의가 수립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응대해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폭력은 강자들이 약자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힘이기도 하고, 약자들이 두려움 때문에 선택하게 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기대고 있는 힘은 물리적 힘(force)이 아니라, 내면의 힘(power)이었습니다. 답답하게 여겨질지라도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비폭력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전제합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는 동료 인간들을 인간으로 대하기 싫은 유혹에 직면할 때가 많습니다. 잔인한 독재자들과 연쇄살인범, 그리고 성폭행범들에 대한 기사에 접할 때마다 그런 생각은 강화됩니다. 그런데도 예수는 비폭력을 선택하라고 가르칩니다.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소심함이나 비겁함 속으로 달아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용기이고 불굴의 의지입니다. 불의와 탐욕과 위선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 종교는 이미 살아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이 세상이 즐겨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무기를 가지고는 세상을 이길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쉽지 않은 길이기에 예수는 당신과 그 동행이 걸어야 할 길을 좁은 길이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손 선생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듯 편하게 써야겠다는 애초의 다짐과 무색할 정도로 설교조의 글이 된 것 같습니다. 어떤 갈급함 때문이려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용의 나라라고 하는 프랑스에서 집시들이 쫓겨나고 있다는 기사를 보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어디에도 반겨줄 이 없어 유배자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요?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가 꿈꾸었던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종작없는 질문으로 글을 마칩니다. 이 가을, 남은 볕으로 아름답게 무르익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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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1-20 03:01)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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