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내 고향 가고 싶다 2010년 09월 18일
작성자 김기석

내 고향 가고 싶다

 

그날따라 이따금 찾아가는 음식점에 손님이 많지 않았다. 어쩌다 길에서 만나도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싹싹한 주인의 얼굴은 손님이 있든 없든 늘 밝다.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식당 안을 아주 평안하게 활보한다. 주인의 나이로 보아 손자는 아닌 것 같았고, 아들이라기에는 너무 어렸다. 가만히 그 관계를 가늠해보고 있는 데, 아이가 주인과 눈도 맞추지 않은 채 심드렁하게 물었다. “사이다 먹어도 돼요?” “아까도 먹었잖아. 하루에 두 번 이상은 안 돼.” 아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태평했다. 아이는 잠시 후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주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인은 마침 잘 물어주었다는 듯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가게 앞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 자전거를 타고 오가길래 관심 있게 보았는데, 한 번도 누구와 함께 노는 것을 못 봤다는 것이다. 어느 날 땀을 뻘뻘 흘리며 골목을 배회하는 녀석에게 “시원한 물 한 잔 마실래?” 하고 말을 건넸더니, 진작 그럴 일이니 하는 표정으로 식당에 들어오더니 물을 받아 마시고는 휑하니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그날 이후에 아이는 일부러 주인과 눈길을 마주치려고 애쓰더니, 슬그머니 식당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사이다도 주고, 먹을 것도 챙겨주면서 그 아이가 할머니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왠지 딱한 생각이 들어 아이에게 잘 대해주었더니 하루에도 십여 차례 이상 드나드는 손님이 되었다. 그런데 누구를 봐도 인사를 하지 않길래 어느 날 자리에 앉혀놓고 예절교육을 좀 시켰더니 며칠 째 발걸음을 뚝 끊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며칠을 못 견디고 돌아오더니 아이는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얼추 끝나갈 무렵 아이가 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찰을 도는 것처럼 식당 안을 한 바퀴 휙 돌던 녀석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무료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 텔레비전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는 또 벌떡 일어나더니 “이제 갈께요. 또 봐요”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주인은 “그래, 또 와” 하더니, 우리 일행을 향해 “이제 조금 있으면 또 올 거예요” 하고 말했다. 나는 그 어린 친구의 외로움에 감염이 되고 말았다. 그런 한편 귀찮은 내색조차 없이 아이의 품이 되어주고 고향이 되어주는 주인이 고마웠다.

 

고향은 지리적 공간에 국한시킬 수 없다. 마음의 고향도 있으니 말이다. 외로움이 우리 마음에 깃들 때 문득 찾아가고픈 이들이 있다. 그냥 그 곁에 머물면 우리 안의 상처가 치유되고, 슬픔이 녹아내리고, 거친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사람들 말이다. “웬일이야?”라는 물음에 “그냥” 하고 대답해도 전혀 어색해지지 않는 사람, 그가 고향이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는 때이다. 김준태 시인의 ‘강강술래’를 찾아 읽었다. “추석날 천릿길 고향에 내려가/너무 늙어 앞도 잘 보지 못하는/할머니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드린다./어느덧 산국화 냄새 나는 팔순 할머니/팔십 평생 행여 풀여치 하나 밟을세라/안절부절 허리 굽혀 살아오신 할머니”.할머니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드리며 논이 되고 싶고, 밭이 되고 싶던 시인의 꿈은 이루어졌을까?

 

고향, 그곳은 살아남기 위해 악지 부리지 않아도 되고 바사기라는 비난에 주눅 들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하하하’ 웃어도 좋은 곳이다. 이미 논이 되고 밭이 되어 고요해진, 그래서 산국화 냄새 나는 분들의 손등을 가만히가만히 쓸어보다 와도 좋은 곳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교우 한분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손을 가만히 붙잡고 “이제 가고 싶어요. 아무 미련이 없어요. 다만 고향 의주 땅을 못 밟고 가는 게 조금 아쉬워요”라고 말했다. 그 마음의 쓸쓸함을 헤아리면서도 ‘그래도 더 나은 고향으로 가시니 좋으시겠어요’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고향을 찾는 모든 이들이 부디 보름달처럼 원만한 마음으로 돌아오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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