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의 길, 땅의 길 2010년 09월 08일
작성자 김기석

하늘의 길, 땅의 길

유진 피터슨의 <부활을 살라>

 

<<부활을 살라>>는 IVP가 내는 유진 피터슨 목사의 영성 시리즈 마지막 책이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이 책 속에는 저자가 그동안 독자들을 향해 하고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가 농축되어 있다. 이 책은 50여 년의 목회 과정 중 교우들과 에베소서를 가지고 나눈 여러 번의 대화와 강의의 결과물이다. 저자는 이 책을 일종의 대화로 간주하면서 이 책을 쓴 의도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빚어져 가는 것,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는 것에 대한 대화다.”(13)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갈 수 있는 토대는 ‘부활’이다. ‘부활을 살라’는 제목은 에베소서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활의 삶은 우리가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들어가서 사는 땅이어야 한다.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은 부활의 삶을 통해서만 적실성을 얻는다. 하지만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이 오늘의 교회에서는 생경한 일처럼 되어 버렸다. 저자는 “세속 사회가 교육과 활동, 심리적인 영역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교회의 목표”가 되어버렸다(21)고 말한다. 인격의 형성이나 기도의 삶, 거룩의 아름다움과 같은 문제는 도외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는 인간의 제도로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 현존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과정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 하지만 현실의 교회는 자본주의 세계에 동화되고 말았다. 세속적인 야망과 십자가 없는 기독교가 결합할 때 잡종 영성이 태어난다. 교회는 더 이상 땅 위에 세워진 환대의 장소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 표징도 아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제외한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비평은 교회에 대한 지극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에 대해 희망을 말하는 것이 이제는 부질없는 일이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는 사람들이 만든 제도도 아니고, 그들의 활동을 통해 규정되지도 않는다. 일은 은혜를 대체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존재하게 하신 교회는 이미 있다. 우리는 다만 그 주어진 것 안으로 들어가 참여할 뿐이다(187). 현실적 교회에 실망하면서도 저자가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교회의 존재론적 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회복과 부활의 삶을 위해서 극복해야 할 것은 일의 낭만화와 영성화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성숙한 삶의 길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다. 자신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확장하는 방편이 될 때 일은 낭만화 된다. 낭만화 된 일은 결국 자기 우상화로 귀착되기 쉽다. 저자는 일의 영성화도 또한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표현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기도, 예배, 증언과 같은 종교적인 일에 경건의 옷을 입히는 행위이다. 결국 이런 구별과 범주화는 일상 속에서 수행해야 할 일들을 탈영성화하게 마련이다.

 

저자가 거듭해서 강조하는 부활의 삶을 다른 말로 요약한다면 ‘일상의 성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정의는 사랑의 단면’이라 했다. 사랑을 빵 한 덩이라 했을 때 어디를 잘라도 정의가 나타나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일상의 성화란 말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일체의 행위, 즉 먹고, 자고, 일하고, 쉬고, 사귀는 등의 모든 일이 거룩함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장중한 언어로 설명하는 에베소서의 전반부에 감동하는 이들도, 일상의 삶 속에서 구현해가야 할 성도의 삶을 가르치는 후반부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고백과 삶의 불일치, 이것이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현주소이다.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이다. 평화를 향한 인류의 꿈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은 무례하고 전투적인 어휘를 주로 사용하는 메섹과 게달의 자손들이 장악한 것처럼 보인다. 소비주의의 망령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폭력과 테러가 넘친다. 유동하는 공포가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더 나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인격적 성숙의 길은 묵정밭이 되고 말았다.

 

새로운 인류로서의 교회가 바로 서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저자는 ‘하라’ 보다는 ‘하지 말라’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행하지 말라”(4:17). ‘하지 않음’은 소극적 무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활동을 위한 여지를 마련하는 것’(299)이다. 교회의 교회됨은,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더 많은 것을 행하시도록 하는 데 있다. 일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인 성령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인류로 지어져 간다.

 

저자는 마틴 부버의 <<나와 너>>를 통해 인간은 사이-존재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관계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는 말이다. 현대인들의 관계맺음은 ‘나-그것’으로 전락하였다. 효율성이 상호성을 대체해버린 관계 속에 사랑의 자리는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관계의 한복판에 생명을 불어넣는 성령의 역사는 질식하고 만다. 교회도 다르지 않다. 사람을 모으고, 자기편을 만들고, 무력한 이들에게 동기를 불어넣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은 없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이것이 에베소서가 말하는 마귀의 간계인지도 모른다. <<침묵>>의 작가인 엔도 슈사쿠는 우리들 사이에 악이 자리잡는 것을 먼지가 소리없이 쌓여가는 것에 빗대 설명한 적이 있다. 악마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우리 곁에 다가올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기관이 더 커질수록, (나라를 운영하고, 돈을 벌고, 사법 질서를 집행하고, 종교를 조직화하고, 아픈 이들을 돌봄으로써) 선을 위해 존재한다는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홍보 활동을 더 많이 벌일수록, 더 많은 악이 숨겨지게 되며 그 악을 찾아내고 그에 대해 조치를 취하기가 더 어려워진다”(390-1)는 저자의 말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부활을 살라>>는 탁월한 목회자로 신학자로 살아온 저자가 자신의 영적 여정을 돌이켜보며 걸러낸 신앙의 알짬을 담고 있다.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기독교 신앙의 정수인 부활은 비근한 일상의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데 이르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바울의 꿈이 제2바울 서신인 에베소서에서 어떻게 약화되었는지를 다루지 않는다. 우주론적인 그리스도 이해가 자칫하면 현실의 부정성에 대한 눈감음이 될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가 염두하고 지향해야 할 목표를 분명히 가리켜 보이고 있다. ‘부활을 살라.’ 신조로서의 부활은 나와 남을 가르는 담이 되지만, 삶으로 번역된 부활은 나와 남을 하나 되게 하는 강력한 힘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갈림길에 서있다. 유진 피터슨은 부활신앙에 바탕을 둔 일상의 성화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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