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 2010년 08월 24일
작성자 김기석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

 

늘 머물던 장소를 떠나 낯선 곳에 가면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도 달라진다. 우리가 기회만 되면 일상의 자리를 떠나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한 성찰적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올해 전교인 수양회 주제는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였다. 다양한 연령대와 다양한 계층 사람들이 어울려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퍽 아름다웠다. 신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인간을 만들었다는 유대 속담이 있다. 그만큼 살아가는 이야기는 다양하고 다채롭다. 우리는 저마다 저자가 되어 자기 이야기를 써나간다. 그 이야기가 계획된 대로 흘러가는 경우는 드물다. 유장하게 흐르다가도 뜻밖의 장애를 만나면 이야기는 굽이치고, 일렁이고, 넓게 퍼지고, 급기야는 잦아들기도 한다. 실존의 과제는 원본이 되는 것이라는 데 복사본이 되지 못해 안달하기도 한다.

 

고요히 앉아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우리는 이웃들이 써내려가는 인생 이야기의 접힌 부분을 알 도리가 없다. 마음을 열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을 때 우리는 그가 살아온 인생의 곡절에 놀라 눈물짓기도 하고, 말없이 그의 손을 쥐어보기도 하고, 무릎을 탁 치기도 한다. 이때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나면 그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사뭇 달라지게 마련이다.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그의 삶 또한 존중받아 마땅함을 알기 때문이다.

 

중증 장애인들의 공동체인 ‘라르쉬 공동체’의 설립자인 장 바니에는 만일 우리가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다가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살아온 내력을 듣고, 자녀들의 이름을 알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 만나는 사람, 돈을 쓰는 방식 등 모든 것이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피상적인 대화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이런 변화가 두렵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일상성에 갇힌 채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을 가리켜 세인(世人)이라 불렀다. 그들의 존재 양식은 잡담과 호기심, 그리고 모호함이다. 세인들의 특징은 재미를 우선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최대의 악덕은 재밋거리를 놓치는 것이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는 그런 재밋거리를 생산하고 유통시키느라 분주하다. 재미의 가장 큰 적은 반복이다. 그래서 세인들은 날마다 반복해야 하는 일상의 일들을 못견뎌한다. 살림살이도 직장생활도 행복감을 주지 못한다. 일상이 권태로워질 때 사람들은 일탈을 꿈꾼다. 여행은 비교적 창조적인 일탈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금지된 것일 경우 일탈은 더욱 짜릿하다. 도취의 밤이 지난 후에 찾아오는 숙취처럼, 종작없는 일탈은 더 큰 허무감을 안겨주게 마련이다. 그 어질머리 속에서 어렴풋이나마 지도조차 없이 떠나온 인생길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이들도 있다.

 

이때 그에게 필요한 것이 길벗이다. 살아온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또 가야 할 길을 함께 내다보는 사람 말이다. 가끔 벗에게 들은 말 한마디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던 실존의 어둠을 일시에 깨뜨리는 경우도 있지 않던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그를 새로운 소속감으로 초대하는 일이다. 자기를 방어하지 않아도 되고, 자기의 연약함과 무력감을 숨기려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는 곳을 창조하는 일이다.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듯, 진실의 이야기꽃이 피어난 자리에는 삶의 변화라는 열매가 맺힌다.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먼저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어지럽더라도 낙심할 것 없다. 아직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담을 넘는 담쟁이처럼, 여럿이 함께 지어가는 이야기는 절망의 벽, 불통의 벽도 가볍게 넘는다. 여름의 끝자락, 소원했던 이들과 만나 이야기꽃을 피워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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