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저 서늘한 그늘처럼 2010년 06월 24일
작성자 김기석

저 서늘한 그늘처럼

 

옛사람들은 하지 절기의 첫 닷새인 초후에는 사슴의 뿔이 떨어진다 했다. 사슴뿔의 근황은 알 바 없지만,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걸어서 출근을 하는 처지인지라 뜨거운 태양이 늘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언덕길을 허위허위 오르노라면 숨은 가빠지고, 체열은 올라간다. 그럴 때면 건물이나 학교 담장이 만들어내는 인색하기 이를 데 없는 그늘을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늘 안에 들어서면 그래도 견딜만하다. 바닥에 떨어진 장미꽃잎을 사뿐히 즈려밟으며 낭만적 보폭으로 걷기도 한다. 그럴 때면 삼각산에 있는 ‘나’의 귀룽나무 생각이 절로 난다. 산새들도 품어 안고, 산길을 걷다 지친 이들에게 아낌없이 그늘을 드리워주는 그 나무의 품은 얼마나 넉넉하던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생각은 순식간에 나를 시나이 반도의 광야로 데려간다. 그 황량한 벌판에 이따금씩 서있는 싯딤나무나 에셀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다. 날이 아무리 더워도 그 그늘 밑에서는 쾌적함을 느낄 수 있다. 잎에 염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에셀나무는 밤이면 대기 중의 습기를 흠뻑 빨아들였다가 태양이 작열하는 대낮에 증발시키기 때문에 주변을 시원하게 만든다 한다. 얼마나 고마운 나무이고 그늘인가? 염천의 세월을 살아가는 이들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그늘을 그리워한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비틀거릴 때, 습습하던 기상은 숙어들고 정신마저 흐리마리해질 때, 그때는 그늘을 찾아야 할 때이다.

 

문득 ‘기댈 언덕’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은 야트막한 언덕을 병풍 삼아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마을 공동체의 삶을 떠올릴 때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모진 북풍도 막아주고, 외로운 마음도 다독여주는 언덕. ‘기댈 언덕’이라는 표현은 그런 외적 풍경을 내적 심상으로 전환시킨 것이리라. 바람에 따라 흔들리며 살아가는 현대인은 점차 뿌리 뽑힌 존재로 변해간다. 마음의 정처가 없다는 말이다. 행복을 찾아 떠돌지만 마음 깊이 도사린 외로움은 가실 줄 모른다. 외로움은 자기와의 불화이고 온전한 삶으로부터의 소외이다. 하지만 외로움은 우리를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부름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고향을 마음에 품은 이들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다. “이러한 고향에서 인간은 들길 옆에 튼튼하게 자란 떡갈나무처럼 광활한 하늘에 자신을 열고 어두운 대지에 뿌리를 박고 산다.” 대지에 뿌리를 박고 하늘에 자신을 열고 살아갈 때 영혼은 아늑함을 느낀다. 이렇게 해서 그늘과 기댈 언덕과 고향은 하나로 이어진다.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걸음 느린 영혼을 기다리기 위해 가끔 멈추어 선다는 인디언들처럼, 경쟁과 효율과 승리에의 염원이라는 염천을 피해 그늘에 들어설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아는가? 세상에는 에셀나무 그늘처럼 나그네에게 조용히 곁을 내주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는 않지만 그저 그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지는 사람, 축제의 함성을 지를 줄 알지만 숲 속의 빈 터처럼 늘 고요한 사람, 우리 속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주겠다고 성급하게 달려들지 않고, 자기 생각을 강요하지도 않는 사람, 있음 자체만으로 시드럭부드럭 사위어가는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 그들은 어떻게 서늘한 그늘이 되었을까?

 

양파는 겨울 한파에 매운맛이 들고, 감은 여름 땡볕 제대로 견뎌야 단맛을 그득 품게 된다. 아파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아픈 이의 마음을 헤아리겠으며, 외로워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외로운 이의 시린 마음을 덮어줄 수 있겠으며, 넘어져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넘어진 이를 일으켜 줄 수 있겠는가? 염천의 세월이든 북풍의 세월이든 오지게 견뎌내며 하늘의 뜻을 장히 품는 사람이라야 그늘도 되고 기댈 언덕도 되지 않겠는가? 이제는 저 여름 땡볕 무섭지 않다. 불편하지도 않다. 다만 고마움으로 저 여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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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1-21 06:01)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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