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집이 어디에요? 2010년 06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집이 어디에요?

-헨리 나우웬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이런 착각과 방종, 남의 기대에 맞추려는 절박한 몸짓에서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직업이 인간을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재물이 인격과 맞먹을 수도 없습니다. 남들의 평가가 한 사람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귀향’은 진리를 따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나는 따듯하고 다정한 창조주의 사랑스러운 자녀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기 위해 세상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98-99)

 

어린 시절, 울림 좋은 최희준의 목소리에 실려 들려오는 노래 ‘하숙생’을 들을 때마다 가슴 가득 외로움이 밀려왔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친구들이 그립기도 했다. ‘외로움’, 그것은 시간 여행자인 인간의 운명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걸린 외줄을 타고 우리는 어딘가를 향해 간다. 어떤 때는 기쁘고 어떤 때는 슬프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자유를 선고 받고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황홀하지만 고단하다. 흐름을 탈 때 인생은 쉽고 그 흐름을 거스를 때 인생은 어렵다. 그런데 간혹 흐름을 거슬러야 할 때도 있다. 방황은 그처럼 찾아온다.

모두가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달려간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가는 곳을 알고 가는 것일까? 불안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안태본(安胎本) 말고, 더 근원적인 고향을 그리워한다.

 

인류의 영원한 노스탤지어를 형상화한 인물 오뒤세우스는 부하들과 고향 이타카를 향해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로토파고이족의 나라에 당도한다. 뭍에 올라가 물을 긷고 점심 식사까지 마친 후에 오뒤세우스는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 알아보라고 부하들을 보낸다. 로토파고이족은 낯선 침입자들과 싸우기는커녕 그들의 주식인 로토스를 먹으라고 주었다. 꿀처럼 달콤한 로토스를 먹은 이들은 동료들에게 소식을 전하거나 귀향할 생각 자체를 잊어버렸다. 오뒤세우스는 울고불고 하는 부하들을 억지로 배로 끌어가 가둬놓고는, 아무도 로토스를 먹고 귀향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령한다(<오뒤세이아>, 9권 82-102행). 어쩌면 우리도 로토스를 먹고 귀향을 잊어버린지도 모르겠다.

 

‘집’이라는 말의 울림

영성가로 널리 알려진 헨리 나우웬이 하버드 대학을 떠나 중증 장애인들의 공동체인 라르쉬 데이브레이크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은 그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어떤 아우성 때문이었다. 수많은 인재들에게 예수를 가르치면서도 그는 늘 비참하고 우울했다. 성직자로서 혹은 교수로서 하는 일들이 오히려 마음을 스산하게 하고, 하나님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삶을 가로막는 역설에 그는 전율했다. 장 바니에가 이끄는 피정에 참석했던 헨리 나우웬은 “어쩌면 우리 식구들(라르쉬 공동체에서 사는 장애우들)이 신부님께 집이 되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41)라는 바니에의 말을 예언자적 부르심으로 받아들였다. 평생 혼자 살며 외로움을 품고 지냈던 나우웬에게 ‘집’이라는 단어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곳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집’에 대한 그의 환상은 깨지고 말았다. 문제는 자기였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고독이 그를 괴롭혔다.

 

라르쉬 데이브레이크가 지원하는 그룹 홈의 최고참이었던 지적 장애인 존은 낯선 이를 만날 때마다 “집이 어디에요?”라고 묻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다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오늘 밤에는 집에 있을 건가요?” 이 질문은 나우웬에게 마치 화두처럼 다가왔다. 그에게 존은 “그가 여전히 집으로 가는 여행 중임을 확실하고도 지속적으로 일깨워주는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9) 동료들의 배려로 데이브레이크를 떠나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는 조금씩 회복되었다. 라르쉬 데이브레이크로 돌아가기 직전에 그는 사흘짜리 워크숍을 열었다. 그곳에서 나우웬은 예수의 비유와 렘브란트의 그림을 벗 삼으며 고독한 나날을 보내는 동안 자기 내면에서 벌어진 일들을 설명했다. 그때의 강의록을 모은 것이 바로 이 책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때문인지 이 책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고, 지성적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내적인 상처를 드러내 보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런데도 감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집’을 찾고자 하는 영혼의 치열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길

나우웬은 성경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의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로 참여하라고 청중들을 혹은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다. 이야기 속에 뛰어들면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자신의 인생 여정과 연결되는 걸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우웬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들을 그 비유 이야기 속에 초대하라고 당부한다. 그러면 그들에 대한 생각이 더 깊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환>과의 만남은 외로움이라는 오랜 질병에 시달리던 나우웬에게 계시적 사건이었다. 렘브란트는 그 그림을 인생의 황혼에 그렸다. 아름다운 황혼이 아니라 적막한 황혼이었다. 그는 아들과 큰딸을 잃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딸과 아내까지 잃었다. 그 후 함께 살던 여인은 정신병원에 갇혔고, 두 번째 아내조차 세상을 떠났다. 그 사이 재물과 명성도 썰물처럼 스러졌다. 죽음을 앞둔 어느 날 남은 아들 티투스마저 세상을 떠났다. 견디기 어려운 상실감에 시달리던 그를 감싸준 것은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는 방탕한 생활 끝에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긴 탕자의 모습에 자기를 투사했다. 헨리 나우웬은 1986년에 레닌그라드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이 그림과 만났다. 그 만남은 사건이 되는 만남이었다. 이전부터 알고 있던 그림이지만, 사흘 동안 하루에 두세 시간씩 마치 무엇에 홀린 듯 그림 앞에 앉아서 뜯어보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마음에 짚이는 생각을 기록하며 지냈다(59).

 

복음서의 이야기와 자기 삶이 연결되기 시작하는 것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탕자의 이야기는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다. 나우웬은 어려서부터 들은 두 갈래의 목소리에 대해 말한다. 세상에 나가 꼭 성공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죽는 날까지 지극히 사소한 일 하나라도 예수님의 사랑에 의지하라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라르쉬 데이브레이크에 오기 전까지 그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살았다. 하지만 마음에는 평강이 없었고, 신앙이 족쇄처럼,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나마 정신의 균형을 잡아주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실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비로소 집으로 가는 길을 마음으로 찾기 시작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감정보다 행동을 앞세우며, 사랑이 기다리고 있음을 신뢰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기어코 돌아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75)다고 말한다.

 

라르쉬 데이브레이크는 잠시 동안 그에게 집이 되어주었다. 오랜 세월 그의 영혼에 깃든 외로움을 달래주었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또 다른 근원적인 외로움으로 이끌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만족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기대했기에 맛보게 된 쓴맛이었다. 그는 “요구가 많을수록 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고, 관계가 끊어지며, 분노가 커지고, 외톨이가 되고, 더 자주 극심한 고뇌와 고통을 맛보게 마련”(89)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하나님 사랑과 가장 유사하다는 부모의 사랑조차 제한적이다. 그들도 사는 동안 무수히 깨지고 상처 입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외로움이라는 불편한 손님을 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타인들의 인정을 추구한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집을 찾는 격이다. 그런 삶에는 안식이 없고, 영혼의 밤은 깊어만 간다. 근원적이고 실존적인 외로움에 전율하는 순간은 하나님과의 더 깊고 친밀한 사귐에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이다. 아버지 집을 향해 돌아서는 순간 탕자는 이미 빛의 조명을 받게 된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곧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라는 참다운 자아상을 단단히 붙들고 고향을 향하여, 다시 말해서 절제된 삶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는 걸 일컫습니다.”(105)

 

의무의 지옥에서 벗어나기

나우웬이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에서 주목하는 또 다른 인물은 큰 아들이다. 문 뒤에 숨어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동생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움이 묻어 있다. 그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 서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따듯하게 맞아줄 만큼 그의 품은 크지 않다. 그는 매우 성실하고 선량하고 순종적이다. 규범과 관습과 문화가 요구하는 대로 산다. 하지만 그에게 기쁨은 없다. 오히려 내면에는 원망과 분노의 감정이 잠복해 있다. 사랑을 받기에 적합한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동안 쌓인 삶의 찌꺼기이다.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이다. 그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다섯 번째 별에서 만난 사람 등불을 켜는 남자와 같다. 그는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나는 근무중이요'라고 대답한다. 그는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지만 사실은 자기의 일을 저주한다. 자기와의 불화는 다른 이들과의 친밀한 사귐도 가로막는다.

 

의무의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타인과의 교감이나 결속 감정도 맛볼 수 없다. 큰 아들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나우웬은 “큰 아들 역시 사실상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138)라고 말한다. 큰 아들은 집에 있었지만 사실은 집에 있지 않았다. 이런 큰 아들은 우리 속에도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열심히 노력해서 획득해야 할 대가로 생각하는 사람들(155), 만남을 처리해야 할 일거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진정한 집에 이르지 못한 큰 아들이다. 큰 아들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감사이다. 스스로 삶의 주도권을 쥐려는 욕구에 사로잡히는 순간 이웃은 경쟁의 대상이 되고, 차이는 불쾌함을 낳고, 낯섦은 위험한 것으로 인식된다.

이때 삶은 무거움이 된다.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빚어내는 삶의 풍경은 편가름, 집착, 장벽 만들기,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거라고 믿는 것들을 비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소금물을 들이키는 것처럼 마음의 갈증만 심화시킬 따름이다.

 

“‘귀향’이란, 뼛속 깊이 스며들어 관계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비참한 세계에 갇혀 살게 하며 자유를 도둑질해가는 두려움에서 돌아서는 겁니다. 저마다 깨어진 삶의 파편에서 진리의 빛을 알아보는 걸 의미합니다.”(256)

 

렘브란트는 실존의 어둔 밤을 거친 후 마침내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깨달았다.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식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로막지 않는 하나님, 방탕한 삶 끝에 귀향하는 자식을 아무런 책망도 없이 맞아주시는 하나님. 귀향의 전제조건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아버지에 대한 신뢰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부력(浮力)을 믿는 것이라지 않던가.

 

“렘브란트는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을 마음이 한없이 따듯하고 사랑이 가득한 상담자, 다시 말해서 미숙하지만 한창 성장하고 있는 ‘어른아이’를 붙들고, 축복하고, 떠나보내고, 다시 받아들여서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분으로 그렸습니다.”(225)

 

그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두려움의 종살이에서 해방된다. 삶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 고마움이 된다. 삶을 고마움으로 인식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원한을 확인하고 합리화하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게 된다. 나우웬은 감사로 돌아가는 귀향은 창조주 하나님은 물론이고 인간 가족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준다고 말한다. 예수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번역한 분이다. 예수와 그를 ‘사랑하는 아들’이라 부르신 분 사이에는 “부재나 분리의 경험이 파고들 틈”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한 관계 안에 있는 게 곧 ‘집’에 머무는”(196) 것이다. 예수와 그분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의 관계는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 관계는 직접적이고, 지속적이며, 의식하지 못할 만큼 가깝다. 인간의 진정한 ‘귀향’은 사랑이 많으신 분과 나누었던 최초의 친밀함과 안전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정표

에덴 이후 시대의 삶의 특색은 소외(疏外), 즉 자기 동일성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에리히 프롬은 ‘소외란 자기 자신을 이질적인 존재로 느끼는 경험의 한 유형’이라 말했다. 인생은 어쩌면 자기 동일성을 찾아가는 탐색의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면서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 그러나 의미는 현실 속에서 흔들리게 마련이다. 흔들림이 일으키는 어지러움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붙잡을 것을 만든다. 현재와 미래 사이의 창조적 긴장을 견딜 수 없어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출애굽 공동체의 경우를 보면 된다. ‘집’은 ‘저기 저 편’에 있지 않다. 옛말에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서있는 그곳이 모두 진리의 자리’(隨處作主, 立處皆眞)라는 말이 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나다가 돌베개를 베고 누웠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집’은 정신을 차린 자리, 바로 그곳에 있다.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머물 때 공기도 푸른 하늘도 강도 산도 나무도 동물도 집일 수 있다. 혹은 집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우리의 영적 여정에 하나의 이정표로 서있다. 나우웬은 매 장을 마칠 때마다 영적 훈련을 위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말씀과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경청하고, 들은 바 혹은 깨달은 바를 기록하고,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분 앞에서 생각과 감정을 털어놓으라는 것이다. 그 과정의 반복은 우리를 집으로 가는 길로 안내할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이 지나치게 개인의 영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우웬이 한동안 ‘집’으로 여겼던 라르쉬 데이브레이크에서 맛본 근원적인 외로움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공동체의 지원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경험상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이 생활 공동체이든 예배 공동체이든, 공동체는 ‘서로서로 선물이 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외로울 때 함께 있어 주고, 넘어질 때 일으켜 주고, 무기력에 빠졌을 때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사람들, 우정과 친밀한 사귐이야말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임을 일깨워주는 사람들이 없다면 집으로 가는 길을 찾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첫 번째 외로움과 두 번째 외로움을 넘어 나우웬이 당도한 자리에서 우리가 공동체적 삶의 아름다움에로 눈길을 돌려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만물은 제각각 끊임없이 바뀌지만 저마다 제 뿌리로 돌아간다(夫物芸芸, 各復歸其根, 노자 16장).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힌다. 그렇게 만물은 쉼 없이 움직인다. 라르쉬 데이브레이크에 살고 있는 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집이 어디에요?” “오늘밤에는 집에 있을 건가요?”

목록편집삭제

정병철(11 01-21 07:01)
목사님 감사합니다.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