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세 개의 의자 2010년 06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세 개의 의자

 

“내 집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한 것이며, 세 번째 것은 사교를 위한 것이다. 손님들이 뜻밖에 많이 찾아올 때는 그들을 위해서 세 번째 의자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대개 서 있음으로 해서 방을 효율적으로 이용했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도서출판 이레, 1998, 163쪽)

 

조르쥬 쇠라가 1886년에 출품한 그림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을 바라본다. 수많은 색점을 찍어 그린 이 그림은 색감이 부드럽고 따뜻하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 휴일의 한 때를 즐기는 이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호수에는 작은 배들도 떠있다. 그런데 화면은 마치 시간이 일시에 정지되어 버린 듯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쇠라의 그림 속에서 일상은 영원과 잇대어 있다. 쇠라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점을 찍어야 했을까? 점 하나하나는 적당한 크기와 색깔을 가지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 수없는 점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그리며 쇠라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삶이란 오늘의 점철(點綴)이다. 오늘이라는 점들이 모여 우리 삶의 풍경을 이룬다. 점 하나를 바로 찍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도 정성껏 살아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반복적인 데다가 누추하기까지 한 일상을 벗어나고픈 욕망에 시달리곤 한다. 아름다운 삶은 늘 저 건너편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에. 이 속에서 행복의 지연은 필연적이다.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는 우리의 일상적 삶이 성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무상한 사물에서 영속하는 것을, 잠시의 것에서 영원한 것을, 세계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모든 사물들, 혹은 직면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을 넘어서는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지시할 때가 있다. 삶을 성사로 바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충만한 삶의 비결이 아니겠는가.

 

홀로 앉음

햇살 좋은 초여름의 어느 날 점심시간,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진 공원 벤치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사람을 본다. 나른한 무력감이 그를 감싸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시든 꽃잎을 몇 점 떨군 채 묵묵히 햇볕을 견디고 있는 식물들이 그의 세상이다. 세상 소음을 뒤로 하고 조용히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조화롭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지만 낙관적으로 보인다. 밖으로 향하던 마음을 끌어들여 자신을 응시하는 시간. 시간은 더 이상 강박적으로 그를 다그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초 단위로, 분 단위로 분절된 시간에 쫓기느라 잃어버렸던 참 자아와 접속을 시도하는 것일까? 모든 겉치레를 벗고 침묵과 마주하고 있는 저 부동의 자세는 어쩌면 번다한 일상을 건널 다리인지도 모른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진계유의 말을 떠올린다.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보통 때의 기운이 경박했음을 알았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조급했음을 알았다.(靜座然後知平日之氣浮, 守黙然後知平日之言躁)" 고요히 앉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구하는 것과 같다.

 

예수의 삶은 나아감과 물러섬의 통일이었다. 나아감만 있고 물러섬이 없다면 삶의 맹목이 되기 쉽고, 물러섬만 있고 나아감이 없다면 삶은 진부함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는 해가 떠오르기 전, 가장 고요한 그 시간에 홀로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늘 아버지 앞에 엎드렸다. 그 시간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 삼아 자기 마음을 조율하는 시간이었다. 눅진눅진한 일상에 하늘의 빛 고요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현대인들은 홀로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늘 누군가와 혹은 무엇인가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고독은 가장 두려운 적이다. 부득이 홀로 있어야 하는 시간, 사람들은 책, 텔레비전, 영화를 보며 자기와의 대면을 피한다. 휴대전화를 통해 누군가와 연결을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관계는 피상적이고 파편적이고 잠정적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한다. ‘외로움’은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되는데서 오는 ‘홀로 있음의 고통’이다. 반면 ‘고독’은 내 존재의 근원과 하나 됨의 희열을 누리는 ‘홀로 있음의 영광’이다. 외로움에 사무치는 이들은 많지만 고독이야말로 외로움의 치유제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고요히 앉아 있는 성 안토니우스, 성 프란체스코, 막달라 마리아를 묘사한 그림을 본다. 홀로 앉음을 통해 그들은 영원한 고향집에 당도했다.

 

마주 앉음

존재의 근원 앞에서의 홀로 앉음은 사실은 마주 앉음이다.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더불어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였던 엘리야는 또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야 길을 가는 동안 그는 외로움의 심연을 맛보았다. 오죽하면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했겠는가? 하나님은 그런 그를 책망하기는커녕 음식과 마실 것을 준비하신다. 그리고 그에게 단잠을 선사한다. 기력을 회복한 엘리야는 마침내 호렙산에 당도하고, 바위굴 속에 엎드려 한 소식을 기다린다. 이때 엘리야는 벽을 향해 앉은 것이 아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곁에 계신 분을 대하여 앉는다. 마주 앉음이다. 이런 마주 앉음은 사람들 사이의 마주 앉음을 가능케 한다.

 

대립(對立), 곧 마주 섬이 긴장과 갈등을 암시한다면, 대좌(對坐), 곧 마주 앉음은 신뢰를 전제한다. 아니, 상대의 말을 경청할 용의가 있다는 몸짓이다.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을 사이에 두고 두 진영이 마주 섰다. 한편에는 예수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가 있다. 그들은 독기어린 말로 예수를 윽박지른다. ‘율법의 규정대로 이 여인을 돌로 쳐죽일까요?’ 당신의 입장을 밝히라는 것이다. 이 말 속에 담긴 다수의 폭력은 얼마나 섬뜩한가? 그런데 예수는 그들과 말을 섞지도, 눈을 부라리지도 않는다.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간단한 몸동작으로 대립의 상황은 지양되었다. 그 시선의 비낌으로 고발자들은 공격의 표적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는 말씀 앞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마주 앉는다는 것은 그동안 상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편견에 찬 이미지들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교만과 자애심이라는 나쁜 멘토에게 잠시 침묵을 명하겠다는 것이다. 상대를 꺾어야 할 적으로 보지 않고 함께 진리/진실을 추구하는 동료로 맞아들이겠다는 뜻이다. 진보와 보수, 사용자와 노동자, 남과 여, 남과 북이 마주 앉지 않을 때 서로에 대한 편견은 강화되고, 두려움은 더욱 깊어지게 마련이다. 마주 앉음을 회피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찬송가 475장 2절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이다. “죄악은 뿌리 깊게 우리 맘에 도사려 편당심 일으키며 차별 의식 넣어서 대화를 막으련다 대화를 막으련다.”

 

마주 앉음이야말로 화해와 평화의 시작이다. 마주 앉아 함께 심호흡을 하고, 서로의 말을 정성을 다해 들을 때 둘 사이에 놓인 간극은 메워지기 시작한다. 사랑의 시선으로 서로를 보듬는 연인들을 본다. 그들은 자신을 비워내고 연인으로 자신을 가득 채운다. 자기 초월이다. 놀랍지 않은가? 사랑으로 마주 앉을 때, 지난 날 내쉬었던 한숨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지고 싶은 생”(황지우)에 돌연 활기가 찾아든다.

 

둘러앉음

마주 앉는 일에 익숙해지면 둘러앉는 것도 어색하지 않게 된다. 신학교 시절 입석에 시설에 퇴수회(退修會, retreat)를 간 일이 있다. 지향하는 가치도 다르고, 시국에 대한 생각도 다른 친구들은 의례적인 인사를 나눌 뿐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한 친구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한 사람이 여기 또 그 곁에/둘이 서로 바라보며 웃네/먼 훗날 위해 내미는 손/둘이 서로 마주 잡고 웃네”. 누구랄 것도 없이 친구들은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무한 반복하는 노래처럼 부르고 또 불렀다.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고, 서로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생각의 차이, 이념적 차이는 이 거대한 어울림 속에 녹아들어 버렸다. 둘러앉은 그 자리 바깥에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놀라운 순간이었다. 상대를 동화시키거나 배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니 우리는 하나였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 체험이었다.

 

예수 공동체의 특색 가운데 하나는 식탁의 교제를 들 수 있다. 예수를 비난하기 위해 점잖은 종교인들이 붙여준 별명을 나는 유쾌하게 받아들인다.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마11:19). 아마도 예수는 음식을 맛있게 드셨던 모양이다. 적어도 께죽거리면서 먹성 좋은 다른 이들을 주눅 들게 하는 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의 식탁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는 아웃캐스트들과 거리낌 없이 식사를 함께 함으로써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으로 선언한 사회의 질서를 깨뜨렸다. 그렇기에 그 식탁에는 금기를 위반하는 기쁨이 충만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다. 예수의 식탁은 공간적으로 위계화된 식탁이 아니라 둘러앉은 모두가 주인인 식탁이었다. 차별이 지양된 그 식탁에 동참했던 이들은 하나 됨의 기쁨으로 그득하였을 것이다. 그 둥근 식탁에 참여한 이들은 누구나 조금쯤 착해졌을 것이다. 더 이상 빈정거리는 말투로 이야기하거나, 독기 품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생명은 비스듬히 기댄 채 살아간다.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 인생은 고마움이 되고, 저 깊은 마음의 심연에 별 하나 떠오른다. 예수의 식탁 공동체를 생각할 때면 정일근의 시가 떠오른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은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을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부분

 

이 둥근 두레밥상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안온함이다. 그 밥상 앞에서 사람들은 귀향의 기쁨을 경험한다. 허물도 탓함도 없는 자리, 빠름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자리, ‘더’보다는 ‘덜’이 소중히 여겨지는 자리, 칭찬이나 비난에 대한 기대와 염려를 내려놓을 수 있는 자리에서 창조적인 삶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홀로 앉음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물고, 마주 앉음으로 자기를 초월하여 화해의 기쁨을 맛보고, 예수의 둥근 두레밥상 앞에 둘러앉아 생을 함께 경축할 때 인생은 고양된다. 고독을 위한 의자, 우정을 위한 의자, 사귐을 위한 의자를 준비했던 소로우를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어느 의자에 앉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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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1-21 08:01)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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