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저 고요하고 묵묵한 엎드림 2010년 05월 27일
작성자 김기석

저 고요하고 묵묵한 엎드림

 

감옥에 다녀온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죄수복으로 갈아입고 흐릿한 조명의 복도에 들어서서 숨을 가다듬는 순간, 자기 뒤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삐걱 들려올 때 비로소 세계와의 격절감에 가슴이 사무치더라는 것이다. 그럴 것이다. 앞에서 문이 닫히고 뒤에서도 문이 닫힐 때, 가슴에도 장벽 하나가 세워지게 마련이다.

 

지금 여기저기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화도 교류도 소통도 하지 않겠다는 남북한 당국자들의 단언은 온통 초록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 대지에 들려온 겨울 소식이다. 절로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하는 노래가 귓전에 들려온다. 먹장구름처럼 한반도를 뒤덮고 있는 긴장감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는 거짓과 진실, 네 편과 내 편, 그들과 우리를 가르는 장벽이 날로 높아만 가고 있다.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의 이성은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그래도 희망의 노래를 포기할 수는 없다.

 

2002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임레 케르테스는 그의 소설 <운명>에서 강제 수용소에서 벗어나는 방법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영원히 잠을 잘 수 있게 해주는 자살이다. 수감자들 가운데 단 한 번도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작가는 단언한다. 둘째는 탈출이다. 하지만 성공 가능성은 낮았다. 셋째는 상상이다. 죄수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자유는 상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떠올릴 수도 있고, 하루 종일 집에서 빈둥거리는 상상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 상상은 고단하고 힘겨운 일상을 견딜 힘을 공급해주었다.

 

이스라엘은 정착촌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2002년부터 요르단 강 서안에 분리의 장벽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감옥의 담장일 뿐이다. 두께 1미터, 높이 5-8미터, 길이 700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장벽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마음에는 지울 수 없는 상흔이 생겼다. 장벽은 수십 년을 이웃하여 살아온 이들의 공동체를 갈라놓았고, 집과 마당을 갈라놓았다. 집주인들은 자기 마당에 있는 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러가기 위해서 이스라엘 군대로부터 특별 허가증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 장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창 너머 저편에는 아득하게 펼쳐진 산과 들, 담벼락의 꼭대기부터 바닥에 이르는 사다리, 커튼을 젖히자 드러나는 서럽게 푸른 하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비가 훨훨 나는 그림도 있다. 그 벽화들은 아름답지만 고통스럽다. 장벽에 그려진 벽화와 낙서에 관한 다큐멘터리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인터뷰 하는 사람이 묻는다. “이스라엘이 이 장벽을 세우는 진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응답자는 웃으며 대답한다. “우리더러 날아보라고!” 상상은 힘이 세다.

 

엊그제 전철을 타고 시 외곽으로 가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산과 들판이 보였다. 봄비에 젖은 나뭇잎은 찬란했고, 저만치 물꼬를 살피는지 바닥에 거의 닿을 듯 엎드린 할머니 한 분이 보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뭉클한 것이 올라왔다. ‘저 고요하고 묵묵한 엎드림’이야말로 질기디질긴 생명의 본 모습이 아니겠는가 싶어서였다. 서러움과 노여움을 묵묵히 삭이면서 세상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온 저분들의 그 거룩한 노동 앞에서는 절망조차 사치일 뿐이다. 진보에 대한 환상이나 불가역적인 시간에 대한 회한 없이, 환상에 기대지 않고, 온몸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저 고요한 엎드림을 통해 역사의 봄은 오는 것이리라. 앗시리아의 위협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이사야를 다시 호명하지 않을 수 없다. 어두운 날에도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는 한 희망은 있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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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1 01-21 12:01)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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